[문화산책]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 윤규홍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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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13  |  수정 2022-12-13 07:21  |  발행일 2022-12-13 제14면

[문화산책]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윤규홍 (아트디렉터)

12월 중순에 접어든 지금, 올해 안에 내가 끝내야 하는 글 숙제를 살펴봤다. 열두 편의 평론과 세 편의 칼럼이다. 보고서 작성과 연말 정산, 성적 처리 같은 딴 일도 쌓였으니까 산술적으로 하루에 한 건씩 그것들을 완성해야 하는 셈이다. 뭐, 괜찮다. 나는 오늘의, 내일의, 다음 주의 나를 믿는다. 이건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늘 이렇게 해왔으니까. 우선 오늘의 나는 아침에 '문화산책' 칼럼을 쓰고, 낮에는 서울에서 시작될 전시의 서문을 쓸 생각이다. 욕심을 낸다면 경남 김해에서 벌인 기획전 도록에 실을 글도 시작했으면 좋겠다. 뭘 하는 김에 뭣도 한다고, 이 글을 쓰는 김에 미리 밤에 할 일의 틀을 잡아본다.

김해에서 시작한 전시는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내가 행사를 준비하고 꾸몄다. 제목을 달았는데, '그와 함께 한 여행'이다. 전시에 참여한 미술가들과 기획자인 나는 모두 그곳에 머무는 여행자들 같다는 생각에서 붙인 이름이다. 전국에서 모인 작가들은 김해에 머무는 동안 멀게는 고대 금관가야 역사를, 가깝게는 일상 속에서 바라본 지역의 인상을 작품에 담았다. 여기엔 그림과 사진과 조각, 설치작업과 음악과 영상까지 준비돼 있다. 장르가 다양한 만큼 전체의 주제를 만드는 게 중요했고, 그걸 할 사람이 결국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일에 쓸 일이 겹쳤지만, 난 일주일에 이틀을 머무는 김해에 가면 전시와 작가들 생각만 했다. 나는 전시 개념을 짜면서 수로왕릉과 대성동 고분과 시가지를 걷거나 차를 몰거나 킥보드를 타고 무수히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중고서점을 보았고, 나는 머리도 식힐 겸 들어가서 책을 들춰봤다. 그런데 무슨 일을 겪으면 어떤 노래를 들어도 꼭 내 이야기 같지 않나? 그것처럼 내가 펼쳤던 책 속에는 전시작가들의 작업을 설명하는 듯한 구절이 있었다. 나는 한 명의 작가와 한 권의 책을 서로 짝 짓는 식으로 매주 그 헌책방을 들릴 때마다 책을 샀고, 그 작가를 생각했다.

예술에 대한 앎의 깊이가 얕은 나로서는 비평할 때마다 그 예술가를 깊이 생각해야 했다. 앉으나 서나 그 작가만을 생각하는 건 마치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과 같다. 물론 비평이라는 예술의 사회적 교류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고, 관심의 대상은 매번 바뀐다. 이 점이 사랑과 다른 점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외도를 죄악으로 여긴다. 우정은 어떤가? 많은 친구와 교제하는 걸 오히려 좋은 미덕으로 생각한다. 예술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연애와 우애 사이에 있다. 이점은 여행과 닮았다. 여행은 한 번에 한 곳씩 떠나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살면서 이따금 스치는 여행자와 여행지이다.

윤규홍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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