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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규홍<아트디렉터> |
며칠 전에 어느 곳으로부터 2023년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를 내다보는 키워드 셋을 가려달라고 부탁받았다. 내가 꼽은 세 가지는 산책자, 뉴진스, 뉴스공장이었다. 산책자는 샤를 보들레르의 도시 산보자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고색창연한 개념이 예술계 여기저기에서 한동안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튀어나올 거란 게 내 예측이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는 지금 대중문화의 한 가지 공급처인 복고 바람이 대세로 자리 잡는 시점을 주목한 이유다. 뉴스공장은 지난 정권교체 이후 언론을 간섭하는 힘과 그 허망함이 드러날 상황에 관한 키워드다.
문화산책의 2022년 종반부 필진으로 끼여 마지막 원고를 쓰고 있다. 실은 여기서 다룰지 생각하다가 뺀 소재가 있다. 그건 올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때 윌 스미스가 자신의 부인에 대해 선 넘은 우스갯소리를 한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린 일이다. 이 사건에 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의견이 들끓었다. 나는 가장 큰 책임이 윌 스미스에게 있다고 봤다. 그 까닭은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선 유명인에 대한 조롱 섞인 농담이 허다하게 일어났으므로, 그 짓궂은 예술의 장에 모인 참여자들은 게임의 규칙에 따라 화를 삭이는 게 맞는다는 논리다. 그때 사건은 예술사회학 수업에서 좋은 토론 주제가 될 소동인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서 이 지면에선 안 썼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쓴 칼럼에는 빠진 게 많았다. 이를테면 "예술은 삶에서 필요한 가치, 문화가 훼손되어서 아쉽다"라는 보편타당함이 빠진 터라 내 차례의 연재는 다른 날 칼럼보다 격이 떨어졌다. 딴 분들이 쓰는 문화칼럼은 심성 곧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들 그렇게 쓰니까 나 하나쯤은 딴 식으로 가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다른 매체에서 다뤘던 키워드, 철 지난 윌 스미스 사건을 굳이 소개한 이유가 이것이다. 지금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 연재 덕분에 나왔다는 감사함이다.
내게 칼럼처럼 짧은 글쓰기는 머릿속에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들이 아니라, 일기식으로 적어뒀던 내용이 씨앗이 되어 튼 싹이다. 20년 가까이 매일 빠짐없이 쓴 일기가 내게는 잊음에 맞서는 기록이 되었다. 한동안 쓰고 발표했던 비평문과 칼럼을 책 몇 권으로 정리할 일이 내년 숙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비망록도 간추려서 책으로 만들까 생각 중이다. 거기엔 감상문과 독후감, 윌 스미스처럼 누구를 미워한 감정, 가족에 대한 사랑, 또 내 어처구니없는 실수담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책 제목을 미리 붙인다면, 불경스럽게도 '난중일기'다. 내게 글쓰기란 혼란투성이 같은 세상살이에서 정신 차리기 같아서다.윤규홍<아트디렉터>

윤규홍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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