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준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역대 최고작에 여성 감독 영화 '심사 기준이 달라졌다'

  • 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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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06 08:17  |  수정 2023-01-06 08:19  |  발행일 2023-01-06 제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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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서 무언가를 결산하는 각종 순위 혹은 리스트가 발표되고 있다. 그중 최근에 발표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리스트가 하나 있다. BFI(British Film Institute·영국영화협회)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 매거진을 통해 10년마다 발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이다. 이 리스트는 1952년에 시작되어 70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올해가 8번째 발표이다. 세계 각국의 영화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만큼 영화인들과 관객 사이에서 매우 권위 있는 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 '기생충' 역대 100선 리스트 포함
"계급 분열의 악 보여주는 프리즘 같은 작품"

1위는 벨기에 출신 여감독 작품 '잔느 딜망'
전통적 방식 벗어난 아방가르드 作 선정 눈길
영화 보는 관점 남성 중심 탈피 시사한 사례


이번에 유난히 한국에서 이 리스트가 많이 회자된 이유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으며,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등과 같이 공동 90위에 랭크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사이트 앤 사운드가 발표하는 또 하나의 리스트인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에도 '기생충'으로 93위에 이름을 올려, 감독과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감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기생충'에 대해 '사회적 리얼리즘에서 코미디로, 스릴러에서 디스토피아로 변모하며 계급 분열의 극명한 악을 한 번에 간결하게 보여주는 프리즘과 같은' 그리고 '유머, 아이러니, 공포, 비극이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같다'며 선정의 이유를 남겼다.

이번 발표에서 아쉬웠던 점은 '한국 영화 100선' 등 한국 영화에 대한 순위 발표도 종종 이루어지는데, 이 순위에서 항상 1위를 다투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년) 등 훌륭한 한국 고전 영화들이 세계적인 리스트에는 오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고전 영화 외에도 한국에는 분명 훌륭한 영화들이 많이 존재함에도 세계적인 리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건, '기생충'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칸 영화제 등에서의 수상을 통한 전 세계적인 조명을 좀처럼 받아보지 못했었기 때문에(한국 영화는 80년대 후반에서야 세계에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소위 'K-콘텐츠' 또는 'K-무비'와는 달리 전 세계 영화 관계자들이 여전히 잘 주목하지 않는 탓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선정된 100편의 작품 중 대부분을 유럽과 미국 영화가 차지하고 있지만, 4위에 랭크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1953년), 5위에 랭크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년) 등 상위권 작품들 외에도 아시아국가의 영화가 13편이나 이름을 올린 것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순위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훌륭한 한국 영화의 가치를 먼저 발견하고, 나아가 전 세계의 관객과 비평가들을 만나게 하는 다양한 시도는 분명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발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1위를 차지한 작품이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해왔던 오손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1941년)이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8년)이 아니라, 이름도 낯선 샹탈 애커만 감독의 '잔느 딜망'(1975년)이라는 점이었다. 샹탈 애커만 감독은 벨기에 출신의 여성 감독이다. 여성 감독으로서 이 리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샹탈 애커만이 최초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이번 투표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1천639명의 비평가·프로그래머·큐레이터·학자 등이 참여했다고 밝히며, 이 영화에 대해 '반복되는 일상의 사건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을 제시하는 장엄한 실험 영화 서사시'라고 소개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잔느 딜망'이 1위에 오르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며 스스로 놀라워했다. 여성이 만든 다른 영화 중 어떤 영화도 상위 10위권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도 언급하며, 그동안 투표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주로 남성이었다는 점과 2012년 이 영화가 처음으로 리스트에 진입했을 때는 투표에 참여하는 비평가의 풀(Pool)을 확장했을 때라며, 이제 정상에 오른 것은 여성영화의 승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영화를 보는 관점이 남성 중심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점과 이제야 많은 여성 또는 소수자를 대변하는 비평가들이 이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일어난 변화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관점의 변화와 투표자의 변화만이 이 영화가 1위를 기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잔느 딜망'이 여성영화의 승리를 넘어 주류의 전통적인 방식의 영화가 아닌 아방가르드 영화에 더 가까운 영화적 스타일과 3시간30분이라는 험난한 관람 시간을 요구받고 있음에도 1위로 오른 것은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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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최근 영화들은 꽤나 실험과 도전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소위 웰메이드(Well-made) 영화만이 많은 관객으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독립영화계에서도 전통적인 형식과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영화들이 훨씬 많이 제작되고 있다. 독립영화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냐고 이야기를 할 때, 주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기존의 관습, 말하자면 영화의 형식, 이야기의 구조, 촬영 기법 등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전통 혹은 관습으로부터 탈피(독립)하고 도전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물론 웰메이드 영화가 폄훼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느새 비슷한 만듦새와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가 영화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예술적 체험과 상상력을 제한시키는 요소로 작동될 수밖에 없다.

예술적 가치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에서 창조된다. 그래서 급진성, 실험성을 바탕으로 표현되는 예술적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무엇보다 그것을 발굴하는 시선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과연 예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고 있는지, 또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적 시도를 지원하고 발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에 대한 대답을 1970년대의 페미니즘 영화이자 아방가르드 영화인 '잔느 딜망'이 이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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