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북 청송 신성계곡…기기 묘묘 괴괴…태양·바람·물이 빚은 선계의 뜰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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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13 07:26  |  수정 2023-01-13 07:32  |  발행일 2023-01-13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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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탄은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내'라는 의미다. 개울 바닥의 회백색 바위들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치는 동안 파이고 깎이면서 만들어 낸 장관이다.

안개인가, 서리인가, 혹은 눈인가. 희부윰한 대기로 가득한 굽이진 산길을 구름 속을 나는 듯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달린다. 길 아래는 천이다. 천은 구불구불한 만곡으로 너붓했다가 조붓했다가 바짝 가까웠다가 훌쩍 멀어진다. 이 길을 좋아한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모두 좋아한다. 아, 여름날 검은 초록의 거대한 육박은 감당하기 힘든 면이 있긴 하다. 봄의 연두는 어떤가. 가을의 단풍은 또 어떤가. 좋은 것들은 의외로 모진 구석이 있다. 딴생각 말라는 듯, 희미하던 길이 훅 다가와 심장을 쿡쿡 찌른다. 심장을 쿡쿡 찔린 채로 아슴아슴 달리는 겨울의 신성계곡이다.

신성리~고와리 곡류하는 15㎞ 계곡
굽이굽이 비경 가득한 '청송 제1경'

행성 표면같은 백석탄 바위들 장관
수만년 시간 동안 깎이고 다듬어져
성벽처럼 선 붉은빛 벼랑 자암단애
여행객 시선 빼앗고 발길 멈추게 해
골짜기 절벽 위엔 효심 품은 방호정

◆신성계곡 백석탄

청송의 서북쪽에 위치한 안덕면은 연점산, 면봉산, 천마산, 노래산 등의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그 가운데를 보현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 길안천을 만나 안동 임하로 향하는데, 신성리 방호정에서 고와리 백석탄까지 숨차게 곡류하는 15㎞의 계곡을 신성계곡이라 한다. 굽이굽이 비경으로 가득한 청송의 제1경이다. 영천에서 청송으로 들면 물길 따라 방호정을 먼저 만나고, 안동에서 청송으로 들면 물길을 거슬러 백석탄을 먼저 만난다. 봄과 가을엔 영천으로 간다. 하늘거리는 것들을 오래 보려고. 여름과 겨울엔 안동으로 간다. 육박하는 것들에 빨리 지려고.

서늘하고도 담백한 대기에 젖은 채로 골짜기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풀밭 가운데로 오솔길이 나 있고 억새와 마른 풀줄기들이 무리 지어 가볍게 서걱댄다. 그리고 곧 눈얼음처럼 하얀 계곡이 나타난다. 정수로부터 푸르스름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백색의 바윗골이다. 신선들이 노는 선계의 뜰 같고 아무도 모르는 먼 행성의 표면 같다.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깎고 다듬은 흰 바위계곡, 백석탄(白石灘)은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부하를 잃은 장수 고두곡(高斗谷)은 이곳을 지나며 상처를 달래어 씻고는 '고와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조 때는 경주 사람 송탄(松灘) 김한룡(金漢龍)이 이곳에 반해 마을을 만들고 '고계(高溪)'라 했다 전한다. 옛 이름이 지금도 남아 마을은 고와리(高臥里)다.

바위들은 기기하고 묘묘하고 괴괴하다. 흰 피부에 난 절리는 산화돼 붉은빛을 띤다. 실핏줄 같고 생채기 같다. 태양과 바람과 물이 만든 지구의 틈이다. 구르고 질주하는 물을 바라본다. 먼 행성에서 물줄기를 발견한 듯 바라본다. 물은 모든 소음을 지우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흐른다. 겁도 없이 손가락을 넣었다가 날카롭게 서슬 진 기세에 심장까지 얼얼하다. 백석탄은 개울 바닥의 회백색 바위들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치는 동안 파이고 깎이면서 만들어진 장관이다. 구르고 질주하던 물은 바위에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 구멍을 포트 홀(pot hole)이라 한다. 긴 시간 동안 이 바위를 휩쓸고 지나간 물줄기가 바위에 상처를 냈고, 상처의 오목한 틈으로 들어간 모래와 자갈들이 급류를 타고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래서 '돌개구멍' 또는 '구혈 (구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로 이웃한 구멍들은 각자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서로 만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약 1억2천만년 전부터 오늘까지, 구멍도 생채기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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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자암단애. 기반암이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자암이라 부르는 벼랑으로, 적벽 혹은 붉은 병풍바위, 붉은덤 등으로 애칭 된다.

◆만안자암단애와 방호정

남쪽으로 향하다 상현달 모양으로 굽이진 길에서 성벽처럼 선 단애를 만난다. 기반암이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자암(紫巖)이라 부르는 벼랑이다. 공식 이름은 만안자암단애(萬安紫巖斷崖)이며 마을 사람들은 '적벽(赤壁)' 또는 '붉은 병풍바위' '붉은덤' 등으로 애칭 한다. 붉지 않다. 오히려 희다. 신성계곡의 수수 많은 절벽 가운데 억 소리 날 정도로 빼어나지는 않지만 시선을 빼앗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단단하고 야무진 모습을 가졌다. 자암을 구성하는 암석은 사암이다. 무슨 일을 겪어야 모래가 저리될까. 그러나 자암의 내부에 퇴적구조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환경에서 퇴적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자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층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절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직에 가까운 고각도의 절리가 가장 뚜렷하다. 수많은 절리가 수천의 시선처럼 보인다. 많이 겪고 오래 견딘 이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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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깊은 큰 골짜기, 기울어진 퇴적층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절벽의 가장자리에 방호정 정자가 돌올하니 앉아 있다. '방호'는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자암으로부터 두어 번의 심한 곡류를 겪은 끝에 '방호'에 닿는다. 바닥 깊은 큰 골짜기, 기울어진 퇴적층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절벽의 가장자리에 정자 하나가 돌올하니 앉아 있다. 방호(方壺) 조준도(趙遵道)가 조선 광해군 때 지은 정자다. 1610년 친어머니 안동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벼랑 위의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1619년 정자를 지어 '풍수당(風樹堂)' 또는 '사친당(思親堂)'이라 하고 '정자를 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후 정자는 조준도의 호를 따 '방호정(方壺亭)'이라 불린다.

'방호'는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신선과 성인의 무리'라고 한다. 조준도는 형 조형도(趙亨道)와 창석(蒼石) 이준(李埈), 풍애(風崖) 권익(權翊), 하음(河陰) 신집(申楫) 등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이들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정(詩情)을 나누었는데, 주 근거지가 바로 방대(方臺)였다. 신집의 기록에 의하면 방호의 속칭이 방대다. 학봉 김성일이 '옥돌 갈아 세운 절벽 천첩으로 쌓였는데/ 수정같이 맑은 물은 몇 굽이로 흐르고/ 구름 속에 달을 보고 울타리에 개 짖고/ 은빛 날개 갈매기는 백사장에서 졸고 있네'라고 한 곳이다. 다섯 선비는 스스로를 신선이라 칭하며 이곳을 '오선동(五仙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계곡은 깊고 넓고 가파르고 높다. 그 바닥이 없을 것 같은 단애에 방호정은 섬처럼, 바위처럼 앉아 있는데 신선들은 어디서 평온하신가. 방호에 올라 세상을 멀리 놓아둔다. 유유한 물길 바라보며 사운거리는 마음도 그냥 내버려 둔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 방향으로 가다 안동분기점에서 30번 당진영덕고속도로 영덕 방향으로 간다. 동안동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청송 길안, 현서 방향으로 가다 송사삼거리에서 오른쪽 930번 도로로 계속 가면 백석탄이 나타난다. 백석탄에서 조금 더 가면 만안삼거리다. 삼거리에서 직진해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만안자암단애를 볼 수 있고 우회전해 방호정로를 따라가면 방호정이 자리한다. 대구포항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북영천IC에서 내려 청송 방향 35번 국도, 현서면에서 안동 방향 68번 지방도로로 가다 신성, 방호정 이정표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방호정, 만안자암단애, 백석탄 순서로 드라이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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