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2019·한국)…눈앞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라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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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20 08:06  |  수정 2023-01-20 08:08  |  발행일 2023-01-20 제39면

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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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연초에 몸이 아팠다. 아프니 사물을 보는 시선이 좀 달라진다. 우선 욕심이 없어진다. 그저 아프지 않기를, 다른 건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되었다. 하여 올 한 해 개인적 화두는 '자족(自足)'으로 정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한 해를 잘 사는 비결이 아닐까 하며, 근래 가장 좋았던 영화 '자산어보'를 떠올려 본다.

'자산어보'는 신유박해(1801년) 때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이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생물의 실태를 기록한 책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마을의 청년 어부, 창대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다. 신분을 초월한 우정이 진하게 펼쳐지며,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조화롭고, 맛깔스러운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흑백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를 끌고 가는 두 가지 축, 유쾌함과 묵직한 메시지가 균형을 잘 이뤄 영화 보는 즐거움을 안긴다. 조연들의 감초 연기와 함께 설경구, 변요한 두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다.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작품성과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정약전이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를 집필한 사람. 두 가지 외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인물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불러냈다. 베일에 싸인 인물을 택할 때는 상상력의 폭이 커진다는 미덕이 있다. '자산어보' 책 서문에 두세 줄 남겨진, 창대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토록 마음을 움직이는 드라마를 엮어낸 것이 놀랍다. 관념에 갇힌 성리학 대신 '자산어보'의 길을 택한 정약전과, 성리학의 질서를 따라 '목민심서'의 길을 꿈꾸는 어부 창대의 관계가 시종 흥미진진하다. '인생의 방향을 묻는 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라는 평처럼 삶에 대한 본질적 통찰력이 담긴 영화다. 아름다운 영상으로 가득한 흑백 필름은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순교자인 아우 정약종처럼 철저한 신앙인도 아니고, 유배 기간 내내 책을 썼던 정약용과도 달랐던 정약전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를 하겠다며, 사물로 자신을 잊어보겠다고 말한 정약전.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에서 그는 억울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끝이라는 곳에 유배 와서, 집필에 힘을 쏟는 강진 아우와 달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기존 질서를 거스르는 사고방식 탓에 기존 방식의 책을 쓸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 있는 바다를 연구했다. 바다밖에 보이지 않으니 바닷속을 탐구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서당을 열었다. 억울함과 좌절감에만 사로잡혀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고, 조선 최고의 해양종합과학서적을 썼다. 못내 존경스럽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라고. 올해 개인적 화두로 삼은 '자족'이란 만족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 한다. 지금 내 주변의 것들을, 상황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 정약전의 삶에서 그것을 본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삶을 배운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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