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억 칼럼] 정치 실종의 시대

  • 김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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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06  |  수정 2023-03-06 06:56  |  발행일 2023-03-06 제26면
뭘 하든 혼돈만 부추기는
별난 재주 지닌 정치판
민생현안·국민 고통은 뒷전
특정인·정파 지키기에 급급
혼돈 멈추고 제자리 찾아야

[김기억 칼럼] 정치 실종의 시대
서울본부장

'혼돈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에 관한 농담이라네. 누군가는 태초의 땅과 물의 자리를 만드는 토목엔지니어를, 누군가는 에덴동산의 정원사라고 했어. 마지막 사람이 그럴싸한 대답을 했네. 혼돈이 최초의 비지니스(우주)였다면, 뭘 하더라도 온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는 재주가 있는 정치가야말로 최초의 직업이 아니겠냐는 거지.'

문화전문기자인 김지수 작가가 이어령 선생 작고 1년 전쯤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실린 문구다. 요즘 우리 정치판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딱 '혼돈'이다. 이쯤 되면 이어령 선생도 정치가를 최초의 직업으로 인정할 듯하다.

국어사전에는 정치를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 정치는 국민들을 짜증나게 하고,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와 정반대다. 정치의 대상을 공동체 전체가 아닌 내 편으로 한정한다. 그러니 잘못은 없고 억지만 판친다. 내 허물은 감추고 남의 허물만 들추어낸다. 상식은 온데간데없고 아집만 넘친다. 배려는 없고 욕심만 가득하다. 책임은 뒷전이고 권한만 앞세운다. 비울 줄은 모르고 채우려고만 한다. 두레박에는 관심 없고 물독만 되려 한다.

정치 실종이다. 국민은 고물가·고금리에 아우성이다. 수출은 수개월째 내리막길이다. 지난해 국민연금 80조원이 사라졌다. 연금 개혁은 아직 첫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16년간 280조원이나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0.7명대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지방 소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사라질 판이다. 그럼에도 정치판은 한 사람과 한 정파를 지키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직 공천에만 목을 맨다. 타협은 없고 충돌만 있다. 대책은 없고 남 탓과 비난만 난무한다.

야당은 이재명 대표 구하기에만 급급하다. 눈물겹기조차 하다. 아슬아슬 부결된 불체포동의안이 불안했던지 벌써 체포동의안 표결 불참 주장까지 하고 있다. 아직 총의 실체도 없는데 방탄복을 입고 있는 꼴이다. 난데없이 때아닌 수박 찾기에 혈안이다. 겉과 속이 다른 과일이 수박만이 아닌데 하필 죄 없는 수박만 욕 먹이고 있다. 제헌국회 이래 처음으로 3월1일 국회를 열어놓고는 야당 국회의원 누구도 국회를 찾지 않았다. 국회는 누가 지키라고 20여 명의 야당의원들이 베트남으로 워크숍을 떠났다. 국회 소집 명분으로 내세운 산적한 민생 현안은 어떡하라고. 이 대표는 죄가 전혀 없다는데 야당이 준비하는 방탄복의 두께는 어찌하여 날로 두꺼워지는지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3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첫 재판까지 시작됐다. 이제 방공호를 파야 하지 않을까.

여당은 정권 창출 후 첫 전당대회가 막바지다. 비전은 없고 이전투구다. 공감은 없고 연대만 있다. 윤심(윤대통령 마음)은 찾는데 국심(국민의 마음)은 뒷전이다. 칭찬은 없고 비방만 있다. 과거만 외치고 미래는 말하지 않는다. 좌고우면 줄서기 경쟁에 정신없다. 윤핵관과 땅 투기 얘기만 들린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사는데,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믿는다. 이러니 내로남불만 그득하다.

이제 혼돈을 멈출 때다. 카오스(혼돈)에서 창조가 생긴다지만 수습 가능한 카오스에서만 창조를 기대할 수 있다.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야 공동체가 산다. 국민이 각자도생을 생각하는 순간 정치는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김기억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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