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구미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허가이 세르게이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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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9 06:59  |  수정 2023-04-19 09:00  |  발행일 2023-04-19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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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박 기자님이 5년 전 키르기스스탄에서 취재한 적이 있는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 허가이 블라디슬라브(72)가 딱한 사정에 처해 있어요. 사모님이 편찮으신 데다 독립운동가 후손 자격으로 특별귀화해 2019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둘째 아들 허가이 세르게이가 최근 키르기스스탄에서 한국 여권이 필요해 대사관에 문의했더니 주민등록증이 없어 여권 발급을 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세르게이가 한국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채 키르기스스탄으로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는데, 여권을 만들려면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다시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지난 3월 중순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이 같은 페이스북 메신저가 왔다. 출입국행정사에 문의했더니 신분 확인상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여권발급이 어렵다고 했다. 결국 세르게이가 한국에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는데, 녹록지 않은 형편에 '항공료와 체류비용이 부담될 수도 있겠다'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궁즉통(窮則通)이었을까. 이 같은 소식을 구미시에 알렸더니 구미시 복지정책과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구미시와 왕산기념사업회, 광복회 구미지회 등 지역 보훈단체가 선뜻 나서 십시일반 여비와 체류비를 마련한 것이다. 때마침 김장호 구미시장이 4월18~23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시-구미시 자매도시 교류 협약차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는데, 일정 중 20일 허가이 블라디슬라브 부자와의 간담회에서 성금을 전달하고 오찬을 함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구미시와 비슈케크시는 한국-키르기스스탄 수교 1년 전인 1991년에 자매결연을 했고, 2013년엔 비슈케크시에 '구미공원'을 조성할 만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4월2일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관에서 열린 허위 선생 탄신 168주년 춘계향사에 참석한 김장호 구미시장께 "고민했던 일이 김 시장 덕분에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했더니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왕산 선생 후손이 어려움을 겪는데 당연히 고향 구미가 도와야 한다"며 오히려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실감했다.

왕산 선생의 증손자 허가이 세르게이(35)는 비슈케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키르기스스탄 러시아대학을 졸업하고 현지에서 IT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그가 키르기스스탄 국적에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유 중 하나는 외국에서 IT 관련 비즈니스를 하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란다. 이와 관련해 2006년부터 17년간 한국정부가 특별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1천200명이 넘는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니더라도 재외동포의 경우 지금보다 복수국적 허용범위를 확대하고, 국내에 영주할 목적으로 입국하는 만 65세 이하 동포에게도 복수국적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저출생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와도 관계가 깊다. 더욱이 재외동포 후손의 경우 세대가 내려갈수록 언어, 관습 등 민족적 연결고리가 약해지기에 이를 타파한다는 명분도 있다.

한국 인구의 15%에 달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700여만 명은 미래의 잠재적 인적 자원이다. OECD 국가 대부분이 복수국적을 허용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만 단일혈통을 고수하는 건 시대와 맞지 않는다. 허가이 세르게이의 국적취득 경과를 곱씹어보면서 재외동포와 대한민국이 상생하는 방안을 하루빨리 찾아내야 할 거란 생각이 든다.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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