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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파 작가들. 〈Wikimedia Comm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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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
1890년대의 빈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쏟아지게 된 배경에는 기득권을 잡은 시민 사회에 대한 반발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정 국가에서 시민 중심의 사회로 개혁을 주도하던 부르주아들은 권력을 잡으면서 이전의 권력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더 귀족 사회에 편승하고 귀족들이 가진 권력과 명예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했다.
이미 앞의 기고문에서 필자는 당시 시민 계급이 자본과 권력을 소유했음에도 절대 가질 수 없었던, 부르주아들의 콤플렉스인 '교양'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학교와 박물관, 극장을 짓고 그 내부를 예술품으로 채우며 예술 후원자나 고상한 예술적 안목을 가진 교양인이 되려고 했으나 교양은 자본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이면의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감출 수 없었던 가벼움이 그 콤플렉스의 원천일지 모른다.
절대 왕권에 반발했던 시민 사회 혁명은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의 권력을 아래로 끌고 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그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권력은 여전히 왕과 귀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시민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였던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들이 예술을 사용하는 방법 속에 상징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아들들은 아버지 세대가 제공하는 부와 더불어 수준 높은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아버지 세대를 비판하는 것에 앞장섰다. 정치, 문학, 철학, 예술 분야에서 '젊은이 Die Jungen'들이 등장했고 사회적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1890년대 중반에는 젊은 문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 빈파 그룹 Das Junge Wien'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의 모순적 태도와 '저급한 예술 사용법'을 비판했고 새로운 시대적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과 예술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시대적 예술관이 젊은 세대에 와서 얼마나 급격히 변화했는지는 클림트의 활동 변화를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886년에서 1888년 사이의 클림트는 응용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건축장식가로 활동했다. 링스트라세의 권력자들을 위한 기념비적 건물인 부르크 극장과 예술사 박물관에 역사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1887년 시의회가 의뢰해 구 부르크 극장의 모습을 그렸다. 클림트는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구도로 이 그림을 완성했는데 객석에 앉아있는 엘리트 집단 100여 명의 얼굴을 그림으로 기록해 그들을 불멸의 존재로 남게 했다. 그러나 이후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1897년의 클림트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예술 운동인 '분리파'를 결성하고 링스트라세의 주인이 된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적인 규범, 도덕주의에 대한 도전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분리파의 상당수는 화가, 건축가들로 구성되었지만 많은 문학인, 철학가,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함께했다. 이런 다양한 지식인들은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을 개발했으며 이는 빈의 문화적 특징으로 구별된다. 빈은 이중 국가, 입헌군주제라는 시스템이 가져온 봉건과 근대의 대립, 본국 시민들과 이민자들의 갈등, 빈부격차, 부르주아 계급 내에서의 세대 갈등 등 너무 복잡하고 또 깊은 대립으로 인해 무기력과 상실감을 안고 있는 도시였다. 분리파들은 현실 도피적 쾌락주의에 빠진 도시의 민낯을 경험했고, 관찰했고, 비판했고, 질문했고 또 표현했다. 그것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혼재되어 표현되는 것,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내면에 숨겨진 것, 혹은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 여러 모티브가 하나의 작품 속에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여기에 니체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가설은 당시 예술가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예술 형식의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니체는 유럽 정신의 근간이 되는 신의 존재를 죽음으로 선언하면서 정치와 결탁해 세력화된 교회를 비판했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존재 의미는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 삶의 가치에서 온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1899년 '꿈의 해석'을 발표해 꿈과 무의식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확산시켰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은 청년 빈파 그룹은 과거의 '합리적인 인간'이 아닌 '심리적인 인간'을 현대 인간의 사실적인 모습으로 파악해 인간 내면 속에 있는 본능, 욕망, 공포, 두려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분리파의 예술가들은 꿈과 환상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를 예술적 소재로 사용하며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창작했다.
대상을 명료하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주의, 그 속에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태도를 담은 자연주의 같은 과거의 사상과 결별했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질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질문은 그 이전까지 유럽인들이 믿고 있었던 인간상을 흔들고 해체했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모든 심리적, 감정적, 정서적 요소들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그 형태는 다양하고 복잡했으며 '이 그림은 무엇을 그렸다'거나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세기말 빈의 예술은 정치·사회적 변화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대해 매우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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