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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 시장 골목 |
아무도 말하지 않는 슬픈 마을 '아파치 무라'의 그림자는 화려한 오사카성 때문에 더욱 짙어 보였다. 일본에서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재일교포를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다. 국교정상화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특별영주자 자격을 얻은 한국계 거주자를 '재일 한국-조선인'이라고 부르고, 그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은 '일본 거주 한국인'이라고 부른다. 일본인들은 전자를 흔히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르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한국인(민단)과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조총련)으로 구분한다.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구분이다. 이러나저러나 이들은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재일동포이다. 그래서 자이니치라는 말에 담긴 언외의 뉘앙스가 복잡다단하다. 멸시와 조롱이 묻어있고, 서러움과 외로움도 풍긴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문득 '자이니치'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자이니치의 삶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사카는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 '쓰루하시(鶴橋)'가 있는 곳이 아닌가. 우리 일행은 서둘러 쓰루하시 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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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 시장 골목 |
쓰루하시에는 대규모 코리아타운이 자리 잡고 있다. 거주 등록된 외국인 중 80% 이상이 한국계이다. 0.33㎢의 면적에 6천명 정도가 사는 작은 지역이다. 하지만 오사카의 중심부이다. 번화가인 난바(難波)역에서 동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 점포가 약 800여 개, 6개의 시장과 상점가가 있다.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의 대문인 백제문 현판에 큼지막하게 적힌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는 경상도 사투리 글귀가 정겨웠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어둠이 내리면서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았지만 간판과 메뉴를 통해 치열하게 살아낸 자이니치의 삶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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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 선술집. 한국어 표어가 정겹다. |
시장통을 이리저리 훑었다. 김치, 부침개, 김밥, 떡 같은 다양한 한국 음식은 물론 한복, 이불 등 한국 생필품도 판매하고 있어 지역에 밀착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음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간판이나 메뉴판은 전부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재일교포들도 이미 3세대를 거쳐온 만큼 한국어보다는 일본어가 편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터였다. 게다가 또 관광객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오사카 시민이 주 고객이니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찌짐(チヂミ)' '김치(キムチ)' '창자(チャンヂゃ)' 등 익숙한 단어가 많았다. 가타카나로 음역한 이 친근한 단어들에서 타국 생활의 고난과 애환이 느껴졌다. 우리말을 고집하는 재일교포들의 굳센 마음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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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 찌짐 가게 |
자이니치는 제주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다고 한다. 비율로 보면 제주도가 50%, 경상도가 40%란다. 일본과 거리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통계를 보니 코리아타운 입구의 문구나 부침개를 '찌짐'으로 음역한 이유가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재일교포는 대략 45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간사이 지역에 40% 이상이 거주하며, 그 가운데 10만명 이상이 오사카에 살고 있다. 당연히 쓰루하시는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되었다.
좁은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우리 일행은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규이치(牛一)'라는 간판을 단 야키니쿠 전문점이다. 야키니쿠는 재일교포가 일본에 정착시킨 한국식 구이를 말한다. 말 그대로 굽는다는 의미의 '야키'와 고기라는 의미의 '니쿠'가 합쳐진 것이다. 일본은 육식금지령이 내려진 675년부터 1872년까지 육식을 하지 않아서 육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식 고기구이 야키니쿠가 비교적 수월하게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다. 쓰루하시는 한국의 특별한 요리 야키니쿠로 이름나 있단다. 특히 퇴근 무렵 쓰루하시역 전철 출입문이 열릴 때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오면 이곳에 내리지 않고는 배겨낼 재간이 없다고 토로하는 일본인이 많다고 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열악한 동네 '아파치 무라'
日 국적 미취득 '자이니치' 중 경상도 출신 40%
현지 최대 코리아타운 자리 잡은 '쓰루하시'
재일동포가 日 정착시킨 한국식 구이 '야키니쿠'
사이드로 김치·비빔밥 등 韓전통음식 함께 판매
야키니쿠 전문점에서는 김치, 육회, 냉면, 부침개, 나물, 비빔밥 등 한국 음식을 함께 파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 식당도 그랬다. 부위별 고기를 석쇠 위에 굽는 방식이나 밑반찬과 쌈 등이 제공되는 등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한우구이처럼 특별한 맛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이니치 삶의 역사가 담긴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측면에서 그냥 고기만 먹기는 힘들었다. 우리 일행은 소주를 곁들였다. 간단하게 요기를 마치고 우리는 쓰루하시 일대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미로 같은 좁다란 길을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건어물, 일용품, 과일, 한국 식자재 등을 중심으로 한복점과 이불 가게 등 온갖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생선 도매시장까지 있어서 새벽 일찍부터 오사카 시내는 물론 교토 등지의 요리사들이 재료를 사기 위해 몰려든다고 한다.
쓰루하시와 이쿠노구를 잇는 길거리에는 한류 스타나 K-pop의 굿즈숍, 한국 화장품 가게 등이 많이 보였다. 500m 정도 이어지는 근처의 미유키도리 상점가(御幸通商店街)에는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치즈 핫도그, 호떡, 트위스트 포테이토, 수제 소고기 꼬치 등 길거리 음식도 쉽게 맛볼 수 있었다.
쓰루하시는 종전 직후 허허벌판이 된 이 일대에 암시장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갖가지 물건이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져 오늘의 번화한 시장과 상점가를 형성했다. 이곳 상인들은 대부분 시장 형성기 때부터 계속 장사를 해 온 사람들이어서 외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우리의 70·80년대 시장통 모습 같기도 했다. 익숙한 한국 냄새와 함께 좁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풍경이 마치 교동의 도깨비시장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납작만두에 어묵 국물이 생각날 즈음 '자주 봐요 우리 정들게'라는 한글 표어가 툭 튀어나왔다. 각종 '찌짐'을 안주로 파는 선술집이다. 이쯤 되면 이곳이 정들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이곳 쓰루하시는 재일동포의 삶을 그린 소설 '파친코'가 크게 화제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43년이며, 공간적 배경은 이곳 쓰루하시 지역이다. 당시 오사카의 면적 187.44㎢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재일동포들의 치열한 삶의 궤적은 오사카 전역으로 뻗쳐나갔다. 소설 속의 이곳은 화려한 오사카와 대비되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열악한 동네이다. 이삭과 순자가 정착했던 쓰루하시가 앞으로 그들이 겪을 일본 생활의 막막함과 차별을 뚫고 살아내야 하는 1세대 이민자의 둥지였다면 오사카는 자이니치 2세 노아와 모자수가 일본인들과 얽혀 뻗어 나가는 공간이다. 1세대는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2, 3세대는 어떻게든 뿌리내리고 싶어 한다. 그 뿌리의 매개가 '파친코'이리라.
언젠가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교포들 가운데 결국 이곳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한 이도 많았다.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었던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는 곳이 '토코쿠지(統國寺)'이다. 우리가 흔히 '통국사'라 부르는 사찰인데, 텐노지공원(天王寺公園)과 인접해 있다. 이 사찰은 백제 유민의 후예들이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백제 유민은 '백강전투(白江戰鬪)' 패배 이후 대거 일본으로 이주했다. 백강전투는 동북아 최초의 국제전쟁이다. 멸망한 백제의 부흥을 내세운 '백제-왜 연합군' 20만이 663년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백제는 또다시 패배했고 영원히 터전을 잃었다.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건축, 제련, 공예는 물론 종교와 학문 등 백제의 선진문물도 대거 옮겨왔다. 오사카가 다른 도시보다 앞서 번성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그래서 이 사찰의 원래 이름도 '쿠다라데라(百濟寺)', 즉 백제사였다. 1972년 재일교포 최무애(崔無碍) 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한반도 통일의 염원을 담아 '토코쿠지'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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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사찰은 작고 아담했다. 먼저 눈에 든 것은 베를린 장벽 조각이었다. 통일의 염원이 읽혔다. 그리고 마주친 제주 4·3 위령탑과 무연고 위패들은 한반도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재일교포의 반 이상이 제주 출신이다. 일제시대 때도 많이 건너왔고, 4·3사건 때는 1만여 명이 한꺼번에 이주했다고 한다. 수십 년을 숨죽여 살다가 1998년부터는 공개적으로 매년 '4·3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20년 만인 2018년에 이곳에 마침내 4·3 위령탑도 세워졌다. 탑 위에 얹혀 있는 돌들은 제주도 170여 개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2019년에는 이곳에 모셔져 있던 74구의 강제징용자 유해가 본국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하지 못한 유해가 훨씬 더 많다. 매년 12월29일에는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손님풀이' 공연이 열린다고 한다. 그들에게 건네는 유일한 위로인 셈이다. 한일의 슬픈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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