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믿음이 없으면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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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24  |  수정 2023-04-24 07:48  |  발행일 2023-04-24 제13면

[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믿음이 없으면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성경 히브리서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체(substance)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믿음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소망은 몸의 부활이나 예수의 재림, 최후의 심판과 천국과 같이 신자들이 미래에 소망하는 것들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이런 소망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은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구소련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붕괴 전문가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붕괴의 다섯 단계'에서 사회 붕괴 과정을 5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1단계는 금융 붕괴다. 금융 붕괴가 오면 정상적인 영리활동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은행에 저축한 돈은 휴지 조각이 된다. 2단계는 상업 붕괴다. 상업 붕괴와 함께 시장에 가면 무엇이든 다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3단계는 정치 붕괴로 정부가 우리를 돌봐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4단계는 사회 붕괴다. 이웃들이 당신을 돌봐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마지막 5단계는 문화 붕괴다. 인간의 선한 마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가족이 해체되고 '내가 더 살려면 네가 오늘 죽어야 한다'는 새로운 행동 원리가 나타난다.

오를로프의 붕괴 사회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그는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는 미래의 성장을 놓고 판돈을 늘리는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래가 현재보다 부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수많은 은행이 지급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며, 결국 이러한 금융 붕괴는 무역과 제조업 네트워크의 붕괴라는 상업 붕괴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 귀결된다고 한다.

'붕괴의 사회정치학'의 저자인 파블로 세르비뉴와 라파엘 스테방스는 "붕괴는 세상의 종말이나 묵시록이 아니다. 단순한 위기도 아니고, 몇 달 만에 잊어버리는 일회성 재난도 아니다. 붕괴란 기본적인 필요(물, 음식, 주택, 의복, 에너지 등)가 법으로 규제받는 서비스를 통해 인구 대다수에게 더 이상 (합리적 비용으로)제공되지 않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했다. 기후 변화와 자원 고갈, 신냉전 시대의 도래와 정치의 낙후성 등으로 지구의 미래는 갈수록 불확실하게 변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에 이어 정치적 양극화도 점차 심해지고 있다. 국제적 협력보다는 국가적 이익이 중요시되자 많은 국가에서 극우적 정치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1991년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류는 거대한 정보망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인류는 마침내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현재 인터넷을 통한 정보는 거꾸로 진영논리를 강화하고 타 진영에 대한 불신의 벽을 높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현실은 타인과 공유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편 가르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뉴스를 볼 때도 뉴스의 내용보다는 댓글을 통해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으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오늘날 인터넷은 고립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인터넷은 소통과 화합의 공간이 아니라 대립과 분열의 공간이 되었다.

'논어(論語)'의 안연편(顔淵篇)에서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는 "양식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 부득이 한 가지를 버린다면 군사를 버려야 한다. 한 가지를 더 버린다면 양식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거니와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공자 역시 믿음을 공동체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음식이 없으면 3주밖에 살 수가 없고, 물이 없으면 3일밖에 살지 못하며, 공기가 없으면 3분밖에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단 3초도 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직면한 이 거대한 붕괴의 위기 앞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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