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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논설실장 |
테니스장에서 만난 중년은 늘 여유로워 보였다. 퇴역 군인이었다. 상사로 일찍 제대했는데 연금을 제법 받는다고 했다. 주변에서 퇴직 공직자나 교사들을 종종 접한다. 이들은 연금이 많아 좋겠다는 질투 섞인 덕담을 듣는다. 그러면 '우리는 월급에서 많이 떼였다'고 항변한다. 작금의 퇴직 공무원, 교사, 군인들은 300만원 전후 혹은 교장이나 법관은 그 이상 평생, 매월 연금을 받는다.
이제는 개혁의 숙제로 정치논란이 되지만 사실 우리가 작금의 연금제도를 갖기에는 깊은 역사가 있다. 1960~70년대 박정희 집권 당시, 골격이 만들어지고 진화해 왔다. 박정희는 국민소득 수백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공무원을 비롯한 나라의 중추 인력에 대한 연금을 구상했다. 기본 철학은 '지금은 우리가 가난하지만 박봉을 참고 이겨내면 당신들한테 평생 먹고살 퇴직연금이 기다린다'고 비전을 제시했다. 20년, 30년 뒤 대한한국은 반드시 중진국, 선진국으로 올라서고 그때는 국가가 나서 보상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공직자가 아닌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게 참 재미있는 대목이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은 노동3권에서 단체행동권을 제한했다. 박정희는 기업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인 내가 노동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단체행동권까지 제한했으니 대신 당신들도 뭔가 내놔야 한다. 그건 강력한 퇴직금 제도"라고 요구했다. 세계적으로 한국처럼 기업이 순수하게 강제로 돈을 적립해 퇴직자에게 목돈을 준 경우는 드물다.
여기다 국민연금이 얹혔다. 1973년에 국민복지연금법이 공표돼 시행을 앞뒀지만 석유파동으로 무기한 연기됐다가, 1988년 노태우 정부 들어 시작됐다. '퇴직금+국민연금'이란 중층구조의 노후보장 설계가 탄생했다. 공무원은 사실 퇴직금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셈이다.
지난 주말 국민연금공단의 자문위원 회의에 갔다. 국민연금은 2055년 기금고갈이 추계되면서 국회특위까지 구성됐다. 모수개혁이니 소득대체율 같은 복잡한 대안으로 시끄럽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연금제도를 불신하는 기류마저 포착된다.
연금은 그렇게 비난받을 제도일까. 사실 국민연금만 해도 기금이 고갈되더라도 국가가 존속하는 한 책임진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연금을 지급한다고 국민연금공단은 확언하고 있다. 수익률도 2~4배인 데다 종신제로 오래 살면 살수록 유리하다. 지난해 세계 주식시장이 흔들리면서 890조원으로 추락했던 기금도 올 들어 4월 현재 960조원으로 불어나 작년 손실을 거의 만회했다. 운영의 노하우가 변수로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어떤 형태의 국가보장도 결국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가 아니라는 명제다. 크게 보면 퇴직금이든 연금이든 국가 경제의 성장과 괘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매월 불입하는 금액도 따지고 보면 기업이나 국가가 낸다. 현재의 공무원, 교사, 군인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해 온 오늘날 대한민국의 혜택을 입었다. 미래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 기업과 국가의 성장이 없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믿고 함께 가는 것이 연금의 본질이다. 주식시장이 1만 포인트라도 돌파한다면 연금고갈 논란은 쑥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본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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