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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지〈작가〉 |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의 정씨는 몇백 리나 떨어진 먼 바닷가에 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삼포에 가겠다고 고집이다. 동행자 영달이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라고 만류하니 정씨는 "내 고향이오"라고 간명한 답을 한다.
하지만 정씨는 '마음'만이 아니라 '산천'까지도 돌변해 버린 고향과 마주친다. 관광호텔 신축장이 되어버린 삼포는 더 이상 "한 열 집 살까?"라고 소개할 수 있는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결국 정씨는 삼포를 향해 떠나는 기차가 도착했어도 발걸음이 내키질 않는다. 방금 고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롭고 높은 것에 가치를 둔다. 하지만 인간에게 귀소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고향(Home)의 이미지는 낮고 완만한 동산과 같다. 이곳은 요나가 머물렀던 고래의 배 속처럼 인간에게 되돌아갈 심리적 안식처를 제공한다.
고향은 좁고 낡아도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인간이 머문 시간은 과거에 있고 기억은 축적되기에 멀리 두고 온 집은 오래되었지만 밀도가 있다. 그래서 릴케는 노래한다. "오 덧없이 지나간 시간에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장소들에 대한 향수여!"
학부시절 은사님은 오래된 옛집들을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집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이 무엇을 본 것이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끌리는 것은 그림 속의 때, 켜켜이 묻어난 벽의 흔적, 담벼락에 떨어져 나간 스피커와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필자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에 재개발 소식이 들렸다. 골목골목 추억을 좇다 슬러브 지붕의 단층 양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초록색으로 칠한 대문에는 우유바구니가 걸려있었다. 호랑이 코에 걸린 손잡이와 '입춘대길' 계절을 맞아 복을 바라는 마음, 명패에 새겨진 집주인의 이름이 정겹다.
화초 화분이 나란히 놓인 집의 정취가 무색하게 담의 꼭대기에는 뾰족한 철 막대가 꽂혀있었다. 화살표를 닮은 철 막대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완공을 앞둔 고층 아파트가 하늘의 반을 가리고 있다.
대문의 인상을 담고자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났다. 남의 집 앞에 카메라를 들고 선 낯선 이는 그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대문이 예뻐서 그림을 그리려고요."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필자를 비켜 가며 나지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딴 게 뭐 그림이 된다고." 정연지〈작가〉

정연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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