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악몽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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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8  |  수정 2023-05-08 07:56  |  발행일 2023-05-08 제18면

[문화산책] 악몽을 수집합니다
임수현〈시인〉

요즘 나는 꿈을 꾸지 않고 아침까지 잔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꿈 없이 아침까지 내리 자는 날이 계속되면 불안하다. 뭔가 내 정신의 발전기가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랄까. 청소년 시집 '악몽을 수집하는 아이'(창비교육·2022)는 나를 괴롭혔던 악몽에 대한 후일담이다. 책이 나오자 악몽도 시적 소재로 승화시키느냐, 어디서 이렇게 많은 꿈을 '줍줍'했냐고 대단하다고 했다. (분명 칭찬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스마트폰 메모장에 꿈 이미지를 적어놓곤 했으니 이쯤이면 악몽 수집가라 불러도 좋겠다.

가장 무서운 악몽은 옛집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늙지 않은 아버지와 아무 일 없다는 듯 부엌에서 도마에 호박을 썰고 있는 엄마, 그 집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꿈은 나보고 여기가 너의 출발점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깨어나 꿈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안도감이 뭔가를 쓰게 했다. 그 집에서 멀리 달아났지만 한 발짝도 달아나지 못한 어린 내가 있는 집. 한번은 마주해야 이 악몽에서 벗어날 것 같아 용기를 내 옛집을 찾아갔다.

홍수가 나면 흙탕물이 집과 황소를 삼키던 냇가는 몇 걸음이면 건널 것 같은 도랑으로 변했고, 무덤이 많던 언덕은 어깨가 풀썩 주저앉았다. 무덤을 열고 누가 쫓아올 것만 같아 후다닥 뛰어가던 길은 쪼그라들어 몇 채 남지 않은 집을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늙은 사과나무 몇이 겨우 과수원을 지키고 있었다. 집이 있었던 자리에는 비닐하우스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바람에 삐져나온 비닐이 펄럭이고 있었다. 내 악몽의 근원지를 마주하고 나니 허망하기까지 했다. 흔적조차 없어진 곳으로 나는 돌아오고 돌아오고 했구나! 마음 한 귀퉁이로 더운 바람이 빠져나갔다. 옛집 터를 다녀온 후로부터 악몽을 꾸지 않았다. 내가 마주하기를 피했기 때문에 나를 쫓아왔던 거였다. 끝끝내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 있다면 눈을 부릅떠야 할지 모른다. 그 실체와 마주하고 나면 꿈처럼 흩어져 다시는 뭉쳐지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그 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악몽을 꾸지 않으면서 시의 발전소도 돌지 않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이 기분은 또 뭐란 말인가. 악몽 수집가인 나에게 꿈을 빼앗아 버리면 이제 나는 뭘 수집해야 할까. 동전, 우표, 그것도 아니면 돌멩이…글쎄? 여기가 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임수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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