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 심장소리] '유 캔 카운트 온 미'(케네스 로너건 감독·2000·미국)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 |
  • 입력 2023-05-12 06:46  |  수정 2023-05-12 08:11  |  발행일 2023-05-12 제39면
"나를 믿어줘" 라고 말하는 순간

2023050701000217000008412

오랜만에 DVD를 샀다. 소장하고 싶은 영화를 만났기 때문이다. CD나 DVD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지만, 파일보다는 훨씬 정겹게 다가온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의 표지를 보노라면, 마치 값진 재산을 보듯 마음이 뿌듯해진다.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는 오래 간직하고 싶을 만큼 좋은 영화다.

어릴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새미와 테리 남매는 어른이 된 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산다. 여전히 작은 동네 스코츠빌에서 사는 누나 새미와 달리, 자유로운 테리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빈털터리로 고향에 온 테리는 어린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사는 누나 집에서 머문다.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은 새미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테리는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새미의 어린 아들은 테리를 좋아하며 따르지만, 불안정한 테리는 실수를 거듭한다. 늘 동생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새미지만, 마침내 테리에게 집을 나가라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다른 누나와 동생은 화해할 수 있을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으며, 여러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로 잘 알려진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첫 영화다. '갱스 오브 뉴욕'의 대본을 쓰기도 한 그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지원으로 영화를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제 역으로 출연도 하는데. 덤덤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이 역할에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새미 역, 로라 리니의 연기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발달 장애 동생을 돌보는 사라 역의 배우다. 두 작품 때문인지 그녀에게는 '영원한 누나' 이미지가 있다. 반듯하고 착하고 야무진,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이 많다. 테리 역 마크 러팔로와의 연기도 조화로운데, 두 배우의 진실한 연기는 관객을 상황 속에 몰입시킨다.

2023050701000217000008411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내내 흐르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처럼 영화는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분위기다. 부모의 이른 부재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두 남매의 모습 때문이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닮은 데라곤 전혀 없는 남매, 소통 불가의 이들이 마침내 진심이 통할 때의 감동은 크다. 그래서 제목이 '유 캔 카운트 온 미'다. '나를 믿어' '나에게 기대도 돼' 등의 뜻이다. 교과서 같던 누나 새미가 일탈행동을 할 때나 부랑아 같기만 한 테리가 조카를 챙길 때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복잡미묘한 인간들의 다양한 면을 섬세하게 그린 솜씨가 놀랍다. 연극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극작가 케네스 로너건의 실력이 돋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고향을 떠나는 테리가 말한다. 안 좋은 일이 많았지만, 함께 있어 참 좋았다고. 자신을 믿어달라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고 한다. "내가 어떤 바보짓을 해도 누나가 집에서 날 기다린다는 걸 알았어"라고 말한다. "유 캔 카운트 온 미"라고 하듯 눈물과 미소로 서로를 바라본다. 각자의 길로 가지만, 그렇게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해진다.

아프고 힘든 삶일지라도 "나를 믿어줘" "나에게 기대도 돼" 그렇게 말할 수만 있다면, 괜찮다. 한 사람만 있어도 살만한 인생이다. 두 남매의 고단한 인생을 아프게 지켜보는 이에게, 괜찮다고,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가만히 말해주는 영화다. 소품이지만 여운이 길다. 영화 칼럼니스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