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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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2  |  수정 2023-05-12 07:48  |  발행일 2023-05-12 제12면

[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바위를 뚫어 만든 서암정사 입구에는 '비로궁 대방광문'이라 새겨져 있다.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지안재를 넘는다. 꼬부랑길을 천천히, 백미러 속으로 들판과 옥녀봉의 가슴을 흘끔거리며 더욱 천천히 오른다. 흰 머리 노부부의 커다란 오토바이가 부릉 앞지른다. 단단한 엔진 소리에 한 대 맞은 듯 정신을 차리고 굽이진 길에 집중한다. 고갯마루 전망대에 빼곡히 선 사람들을 스쳐 사방으로 바짝 좁혀진 골짜기로 든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을 따라 더욱 높은 오도재를 넘는다. 잿마루에 우뚝 선 '지리산제일문'을 통과해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동안 자전거를 탄 날씬한 남자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종아리에 핏줄이 곤두서 있다.

지리산서 가장 험하고 길다는
칠선계곡 스치듯 오른 벽송사
한때 300여 僧·10여 부속암자
'빨치산 루트' 둘레길 코스 포함

아래 서편엔 '미타굴' 서암정사
바위 뚫어 통로·바위벽 사천왕
눈 닿는 곳마다 온통 석상·석탑
한 석공 11년 조각 굴법당 감탄


[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무한의 전망을 가진 너른 터에 벽송사삼층석탑이 서 있다. 보물 제474호다. 그 앞에 도인송과 미인송으로 불리는 소나무가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다.

◆지리산 벽송사

무사히 지상에 착지했다는 느낌도 잠시, '칠선계곡, 벽송사, 서암'이 하나로 묶인 이정표를 따라 다시 골짜기로 들어선다. 지리산에서 가장 험하고 길다는 칠선계곡. 시인 이원규는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고 했지. 길은 초록으로 맑고 인적이 드문 낮, 뜨끔뜨끔한 마음으로 칠선계곡의 아랫자락만 슬쩍 밟고 벽송사로 향한다. 사하의 몇몇 집에 하얀 불두화가 환히 피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절이다. 몇몇 사람들의 움직임에도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다. 색색의 연등이 차분히 그림자를 드리운 마당은 바람이 없는 연못 같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때인 1520년에 벽송지엄 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부터 절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곳의 3대 조사가 서산대사 휴정이다. 서산대사 문하의 사명대사도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법을 떨쳤다 한다. 한때는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부속암자는 10여 개가 넘었으며 선원과 강원이 개설되어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였던 초월동조 대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서암정사 입구의 사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 순서로 부조되어 있다. 경주 석굴암의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했다.

절집을 빙 둘러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무한의 전망을 가진 너른 터가 펼쳐진다. 터 가운데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벽송사삼층석탑이 서 있다. 보물 제474호다. 그리고 도인송과 미인송으로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벽송사의 어느 위치에서도 보이는 가장 강력한 생명들이다.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해지고 한 가지 소원을 이룬다 하고,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고 한다. 아래로 벽송사의 모든 지붕들이 한눈에 보인다. 벽송사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고 토벌대와의 교전을 거치며 전소, 전멸되었다. 이후 1963년 원응스님이 다시 짓기 시작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간혹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벽송사 주변은 무덤 없는 묘지였다. 지금 벽송사는 대단히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다. 지금도 조금씩 불사를 일으키고 있는 모습이다.

벽송사는 지리산 둘레길 4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절 입구에서 둘레길 화살표를 따라가면 모전마을에 닿는다. 이전에는 '지리산 빨치산 루트'라는 이름의 등산로가 있었고 둘레길이 만들어지면서 일정 부분 코스를 공유했다. 그때 길은 모전마을이 아니라 송대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송대마을은 빨치산의 중요한 보급 투쟁로이자 은신처가 되었던 화전마을이다. 등산로였을 때는 한산했던 길이 지리산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곧 도보꾼과 주민 사이에 문제가 생겼고 길은 폐쇄되었다. 둘레길과 등산로가 길을 공유했을 때 그 길은 '산 사람의 길'이었다. 세상에, 자전거 탄 남자가 끙끙대며 올라오고 있다.

◆서암정사

벽송사 조금 아래 서편에 서암정사가 있다.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은 절이다. 원래는 벽송사의 부속암자로 '미타굴'이라 불렀다. 온통 바위와 돌이다. 절집 입구 바위벽에는 사천왕을 새겼고, 통로는 바위를 뚫어 만들었다. 눈 닿는 곳마다 크고 작은 석상과 석탑이다. '지어진'이 아닌 '만들어진', 차라리 '조각'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자연 석벽을 조각하여 만든 절, 그것이 서암정사다. 처음에는 무협소설에나 나올 듯한 산중 정원의 분위기라 느꼈다. 벽송사의 주지였던 원응스님은 이곳에서 젊은 원혼들의 비탄과 울부짖음을 들었다 한다. 그들의 영혼이 쉴 수 있도록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와 내면의 이상향을 구현하려 했다 한다. 서암정사는 1989년부터 1998년까지 약 10여 년에 걸쳐 바위를 파내어 완성했다. 평화로운, 그러나 소설적인 긴장이 감도는 이곳에서 가장 명확히 느끼는 것은 차가움과 스산함이다.

[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비로자나불, 문수보현보살, 선재동자 등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는 서암정사의 비로전. 경내 전역에 무수한 불보살을 조각하여 영원한 이상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주말&여행] 경남 함양 벽송사·서암정사…모든 부처와 보살,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연못과 극락전. 극락전은 석굴법당과 연결되는 스님의 수행처다.

사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 일은 좀 드물다. 그러나 서암정사를 찾았다면 석굴 법당에 꼭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믿든 아니하든 그곳에서는 스스로 작아짐을 느끼게 되고 이름 모를 타인들을 위한 기원이 쑥스럽지 않다. 굴법당 내부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부처와 모든 보살과 구름과 꽃들이 이 한곳에 모였다. 극락세계와 이상향을 위해 그것에 대한 기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한 장인이 무려 11년간 조각했다고 한다.

그는 홍덕희라는 석공이다. 그는 33세 때 서암에 들어와 10여 년 동안을 굴법당 조각에 전념하다 44세가 되어서야 제대로 햇빛을 보았다고 한다. 젊은 석공은 매일 아침 목욕을 하고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쪼았다 한다. 들리는 것은 연못의 물줄기 소리뿐, 연못 아래에는 그가 거처하던 굴피집이 아직 남아 있다. 절벽 쪽으로 테라스처럼 내어놓은 넓은 마당에 서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아득히 보인다. 마주하는 칠선계곡과 백무동 계곡 사이의 창암산 자락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깍깍 까마귀가 운다. 왜 이리도 많이 우나. '주인은 손님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을 이야기하네./ 지금 꿈을 말하는 두 사람/ 모두 꿈속의 사람이라네.' 서산대사의 시다. 지리산에서 지리산을 마주한 순간이 벌써 꿈같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지안재, 오도재를 넘어 칠선계곡, 벽송사, 서암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벽송사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다. 서암정사 앞까지도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으나 길이 아주 가파르고 주차장이 좁다. 서암정사 조금 아래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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