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준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단순 콘텐츠가 아니다 '시네마'는 찬란한 문화유산

  • 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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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9 08:19  |  수정 2023-05-19 08:22  |  발행일 2023-05-19 제39면
원주 아카데미극장 소재 김현정 감독의 '유령극'
단관극장 존치문제 다루며 오래된 것의 가치 시사
본 영화 수상 소식과 함께 극장은 결국 철거 결정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
영화박물관 탄생시키며 영화 수집·보존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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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장윤아기자 baneulh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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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얼마 전 막을 내린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김현정 감독의 신작 <유령극>이 단편경쟁 부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김현정 감독은 단편영화 <은하비디오>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감독의 유년 시절을 모티브로 한 차기작 <나만 없는 집>은 5년 동안 대상작이 나오지 않았던 미장센단편영화제 대상 수상과 함께 세계 3대 단편영화제라고 불리는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도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후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위해 서울을 오가는 지방 청년의 소외와 관계를 다룬 <입문반>으로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감독 자신의 부녀관계에 대한 고민이 바탕이 된 첫 장편영화인 <흐르다>는 얼마 전 극장에서 개봉해 지금까지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런 그가 새롭게 들고 온 영화 <유령극>은 원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관 극장인 아카데미극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에 대해 '영화가 급격하게 쇠퇴, 또는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현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낸 작품'으로 평가했다. <유령극>은 보존과 철거 사이의 위태롭고 오래된 존재를 다루고 있는 만큼 어쩐지 지나온 세월 속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온 김현정 감독과 닮아있기도 하다. 김현정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아카데미극장과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며 "낡고 오래된 것들을 지루하고 없애 버리고 치워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누적된 시간과 인연과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현정 감독의 수상이 발표된 그날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철거가 결정되었다. 현실의 아이러니는 이토록 영화적이다.

영화에 있어 보존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이다. 영화의 역사가 비록 130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록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존하는 건 여느 국가를 막론하고 중요한 문화정책으로 다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1974년 한국필름보관소로 시작된 한국영상자료원(KOFA·Korean Film Archive)이 한국영화를 수집, 복원, 보존, 전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은 영화가 만들어지면 의무제출제도(한국영화의 올바른 보존 및 후대전승을 위해 영상물등급위원회부터 심의를 받은 작품은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제도)를 통해 한국영상자료원에 수집되고 있지만, 영화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영화역사의 출발과 같이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초창기의 영화필름을 비롯한 관련 자료는 많은 부분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값비싼 오락으로 여겨지던 시절, 영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수집, 보존하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창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였다. 그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 인기가 없어진 무성영화가 마구 버려지는 것을 보고 무성영화만 상영하는 시네클럽인 '세르클 뒤 시네마'(영화의 서클)를 만들었다. 무성영화가 훌륭한 고전이라 생각한 그는 이를 수집하고 보존하고 상영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이 시네클럽은 1936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라는 최초의 영화 박물관으로 재탄생한다. 당시 많은 문화예술인이 마치 사랑방처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이용했다. 그 와중에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던 어린 관객도 있었는데, 그들은 장 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와 같은 훗날 세계 영화사를 새롭게 쓴 '누벨 바그' 감독들이었다. "랑글루아는 상영을 통해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는 고다르의 말처럼 앙리 랑글루아는 그저 필름과 자료를 모으는 것에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시네마테크가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했다.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시네마테크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이 이뤄진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만큼 시네마테크라는 영화박물관은 영화 유산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지금도 공고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미래에 역사가 될 현재의 자료들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22년부터 한국영화 문화, 산업,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 기록사업의 첫해 지역 최초의 독립영화전용관인 대구 오오극장을 비롯해 서울의 허리우드극장, 인천의 미림극장과 애관극장 등이 기록되었다. 영화 <유령극>의 배경인 원주 아카데미극장도 포함되었다.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 개관하여 우리나라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극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 교육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2021년 철거 위기를 맞았지만 시민의 보존 캠페인을 통해 원주시가 매입을 결정하고,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지자체장이 바뀌며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결국 철거가 결정되었다. 철거된 자리에는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이 들어설 거라고 한다.

한 극장의 철거는 역사, 문화, 교육 그리고 미래의 가치가 함께 철거되는 것이다. 현실의 경제 논리에 다른 가치는 마치 육신을 잃은 영혼처럼 침묵을 강요받을 뿐이다. 어쩌면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이미 유령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필름에 기록된 과거의 유령은 그것이 다시 상영됨으로써 부활하는 것처럼 아카데미극장도 다시금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부활할 수 있길 바란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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