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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충격이었다.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인간에 대한 기계의 위협처럼 다가오진 않았다. 수학적 환산이 가능한 바둑의 세계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람을 능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인공지능 기술은 좀 더 발전된 수학적 연산을 제공하는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챗GPT의 등장은 인공지능 기술의 실체가 알파고와 차원이 다른 세계로 무한 확장이 가능함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 날 벼락처럼 일상으로 틈입한 챗GPT는 리포트, 기사, 드라마 대본 쓰기 등 창의적인 작업이라 여겼던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상적 활용이 시작됐다.
세간의 반응은 명암이 교차한다. 고된 글쓰기 노동의 훌륭한 조력자란 기대가 있는가 하면, 수학적 계산보다 더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인간의 지적 영토인 글쓰기를 빼앗길까 하는 불안도 있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욕망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고유한 지적 영토가 축소하는 모순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술의 오작동이 아니라도 기술 발달 자체가 삶에 드리우는 변화에 대한 불안은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최근 미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 개발의 속도를 국가가 나서서 강제적으로라도 늦추어야 한다는 공론이 형성된 것도 이런 맥락의 반영이다. 인공지능 기술 개발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이제야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이로운 인공지능 기술의 활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당장 있을 턱이 없다.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의 과정은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위험성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인간을 닮은 기계를 욕망하는 까닭은 뭘까. 그 이유에 대한 하나의 가설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참조해 볼 수 있다. 인간이 문명화 과정에서 깊이 내면화한 역사적 유전자는 노예제이다. 노예제는 인간들이 동족을 지배해야 이익과 쾌락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였다. 그렇다면 노예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노예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기계 노예의 생산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됐든 인간 노예를 기계 노예로 대체하는 것은 기술 발달에 힘입은 역사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을 기계적으로 극대화해 인간의 노예를 만드는 이러한 기획은 타인은 물론 본인까지도 생산의 도구로 간주하는 인간소외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만약 노예가 아닌 친구를 욕망한다면 인공지능 기술의 성격은 어떻게 변할까. 좀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 기술의 사용을 위해선 다른 상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동물과 구별 짓는 근거로 지적 능력을 내세웠다. 그런데 인공지능 기술은 동물도 아닌 기계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인간은 오랫동안 사물보다는 생명을 상위의 존재로 여겼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사실은 인간존재가 동물보다 하위의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이제 사물인 기계와 구별 짓기 위해 동물과의 공통점인 생명을 강조하고, 동물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지적 능력 이외의 인간성을 참조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인간성 중에 동물과 구별되고 인공지능으로 대체 불가능해서 인간을 정의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로 삼을 만한 능력이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챗GPT에 가장 먼저 넣어 봐야 할 명령어는 이 질문이 아닐까.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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