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천일영화] '인어공주'를 위하여

  •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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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2 06:57  |  수정 2023-06-02 06:59  |  발행일 2023-06-02 제22면
실사판 인어공주 혹평 거세
주인공 강한 이미지도 영향
추억속 판타지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겐 다양한 인종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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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어공주를 위하여'(이미라)라는 순정만화가 있었다. 푸른고등에서 펼쳐지는 10대의 로맨스와 꿈을 향한 열정이 또래였던 내 가슴도 한껏 흔들어 놓곤 했다. '푸르메' '이슬비' '서지원' '백장미' 등의 주인공들은 외모가 근사했음은 물론, 이름까지도 예쁘거나 특별했다. 그것은 물론 만화책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학교에도, 학원에도, 교회에도 그렇게 아름답고 멋지고 자유로운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어공주를 위하여'가 나를 헛된 망상으로 이끌거나 아름다움에 대해 잘못된 기준을 심어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판타지로서 10대 소녀의 욕망을 완벽히 대리 충족시켜주었고, 침대에 앉아 몇 시간이고 나달나달해진 만화책을 거듭 읽어나갔던 기억은 아직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실사판 '인어공주'에 대한 혹평이 거세다. 디즈니사는 몇 년 전부터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를 앞세워 인종, 성별, 문화, 취향의 다양성을 고려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가치관 정립에 많은 영향을 주는 유소년기부터 이런 콘텐츠를 향유하면 편견과 차별 없는 세상이 될 거라는 확신이 느껴진다. 실사판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과 달리 주인공 '에리얼'을 흑인으로 만들고, '에릭' 왕자는 흑인 왕비에게 입양된 인물로 설정했다. 그런데 에리얼 역에 가수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될 당시부터 관객들은 난색을 표했다. 인종차별로 몰아붙이면 곤란하다. '알라딘' 실사판의 '지니'도, '피터팬' 실사판의 '팅커벨'도 흑인으로 각색되었지만 큰 논란은 없었다. 오히려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지니역의 윌 스미스, 팅커벨역의 야라 샤히디는 그 캐릭터와 잘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할리 베일리의 강하고 독특한 이미지는 에리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국내 흥행성적은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평단과 흥행 양면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인어공주'의 국내 관객 수는 개봉 1주일 남짓한 지금까지 약 50만명에 불과하다. 참고로, 5월31일 개봉한 '범죄도시3'는 하루 만에 7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관객들이 극장에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 흥행 부진의 이유는 아니다. 북미에서는 극장가에서 그런대로 선전하고 있으나 영화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가 68% 정도로 좋지 못한 편이다. '시카고' '숲 속으로' 등 뮤지컬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롭 마셜 감독의 연출은 상당히 훌륭하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세트, 의상, 미술, 음악, 시각 효과 등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에 열 가지 미덕이 있어도 주인공의 하나의 매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의 대다수는 순정만화를 읽을 때처럼 '인어공주'가 꿈결 같은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로맨스물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 신데렐라와 왕자가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을, 왕자와 공주라고 해서 모두 선남선녀는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는 다양한 인종이 있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어공주'의 본래 이미지나 중장년층의 추억을 훼손해 가며 교육용 블록버스터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과유불급. 지나치게 특정한 관점을 주입하려는 태도는 또 하나의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이라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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