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 is의 세계'와 'must의 세계'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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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5  |  수정 2023-06-06 16:27  |  발행일 2023-06-05 제26면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

과학 넘은 '미국산 불가' 신념

신념이 증폭되면 이념이 돼

과학은 대통령 체면도 제지

이념만 남으면 국가가 불행

[박재일 칼럼]  is의 세계와 must의 세계
박재일 논설실장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는 집권 1년 차부터 거대한 저항에 마주했다. 광화문 촛불시위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를 외치며 수십만 명이 모였고, 청와대로 진격했다.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는 이른바 '광우병 시위'였다.

경대 사대부고 출신으로 당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의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털어놓은 후일담이다. 미국 대표단과 마주 앉았는데 미국 측이 말하길 "광우병이 어떻게 그렇게 인간에게 쉽게 전염되나. 과학적으로 설명해보라". 김 본부장은 미리 준비한 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한밤 광화문에 수십만 명이 모여 수입 반대를 외치고 있다. 김 본부장은 "그러면 당신들은 이 사진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 과학을 벗어난 정치가 한국에 있다는 토로였다. 양측은 서로 양보했고, 협상은 타결됐다.

학창 시절 교수님이 칠판에 '사실(fact)'을 적고 반대말을 물었다. 아무도 대답 못 했다. 답은 '가치(value)'다. 사실의 세계는 영어의 'is' 즉 과학의 세계이고, 가치는 'must'나 'ought to' 즉 당위의 세계다. 같은 사실을 놓고 서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광화문 시위는 'is의 세계'를 넘었다. 그건 미국산 쇠고기는 먹어서는 안 되고, 미 제국주의 제품은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신념이 증폭되면 이념이 된다. 물론 정치는 사실과 신념의 세계가 혼재된 세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커녕 거짓과 무가치마저 뒤섞여 돌아간다. 문제는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그 선두에 있다는 점이다. 선동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린이들과 함께 누리호 발사를 지켜보기로 했다가 연기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는 뉴스가 있었다. 만약 대통령의 체면을 생각했다면 당일 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과학은 대통령의 체면을 제지할 수 있다. 누리호는 다음 날에야 발사됐고 성공했다. 북한이 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까지는 과학이지만, 김정은이 딸을 대동하고 미 제국주의를 쓸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선동과 이념이다.

공영방송 라디오를 듣다 귀를 의심했다. 원전을 혐오하는 듯한 무슨 평론가 왈(曰), "아니 그러니까 경주 불국사 옆에 원전(소형원자로 SMR)을 짓는다는 말입니까". 그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놓고는 거의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이다. '오염수를 대통령 니가 마셔봐라' '독극물을 타란 말이냐'는 말들이 난무한다. 일국의 야당 대표까지 서슴없다. 과학은 실종이고, 이겨야만 한다는 'must의 세계'만 남았다. 오염수는 태평양을 돌아 한반도에 온다. 3~5년이 걸린다. 그것도 30년에 걸쳐 방류한다. 그럼 미국이나 인접 태평양 국가는 왜 가만히 있는가란 사실 기반의 논리나 가치판단은 없다. 행여 대지진의 후유증을 마주한 이웃 나라의 사정을 과학에 근거해 헤아려보자면 민족반역이 될 수도 있다.

모래알로 비유되는 대중은 잡설을 늘어놓아도 용서될 수 있겠지만, 지도자들까지 현실과 과학의 세계, 이뤄져야 할 이상과 당위의 세계를 똥오줌 구분 못 하며 처신한다면 이건 미래 한국의 불행을 계약한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광우병 시위가 반복된다면 국제사회는 매번 이해하고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은 없고, 이념만 남은 국가는 모두 후진국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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