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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
1982년 전두환 정권이 프로야구 대구 연고 팀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지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첫 사업을 시작한 곳이 대구였고, 당시엔 제일모직을 비롯, 삼성의 방계 기업들이 대구에 포진해 있었다. 최근 대구에서 열린 아시아연구학회(AAS)에서 배영철 대구컨벤션뷰로 대표가 외국인 앞에서 대구를 소개했다. "대구는 삼성의 탄생지"라고 하자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다음 반응이 의외였다. "삼성은 이제 대구를 떠났다"는 코멘트에 박장대소했다. '삼성 탄생지 대구'는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 첫 장에 나온다. 삼성의 공식 입장이다. 삼성은 1998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삼성상용차가 파산한 뒤 더 이상 대구와 거래는 없다.
역대 정권에서 대구의 강한 지지를 받은 범보수 지역 국회의원들은 선거 때만 되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 기자, 이번에는 유치될 거야. 선거결과만 좋으면 삼성이든 현대든 SK든…VIP(대통령)의 의지가 강해." 다 공수표였다.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인천으로 선회했고, 기껏해야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읍소 끝에 삼성이 메인 스폰서로 나선 정도다. 하긴 대기업 계열이 전혀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범삼성가(家)라 할 신세계백화점이 대구에 별도법인으로 문을 연 게 그나마 전부다. 대기업 유치는 선거 때만 등장하는 유혹이 됐고, 선거가 끝나면 없던 일이 됐다. 그건 대구의 수십 년 희망고문으로 화석화됐다.
서울의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오래전 중소 제조업으로 옮겼다. 이유를 물으니 "자금흐름, 경리, 총무, 현장까지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대기업 가면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이사가 됐고 주식도 받아 비교적 성공했다. 개인적으로 기자가 되기 전 증권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다. 주식 그래프를 그리던(당시는 직접 그리기도 했다) 나에게 지점장이 말했다. "대박은 중소형주야. 기업은 설립 유아기를 거쳐 이륙하는 성장기가 있지. 늙은 대기업은 주식가치로 매력이 떨어져".
홍준표 시장이 대구경제를 진단하면서 "기업인들이 배짱이 없다. 스스로 기업을 키우지 않는다"고 한 적 있다. 피터팬처럼 성장을 두려워함을 꼬집었다. 자본주의의 엔진, 기업가 정신의 부재다. 따지고 보면 삼성이나 현대, LG, SK 같은 작금의 대한민국 대기업군도 중소기업이란 올챙이 시절을 거쳤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엔비디아,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메타플랫폼스, 구글 모두 하나같이 '개라지(garage·차고지)'나 골방에서 창업한 동화 같은 스토리를 자랑한다.
짝사랑도 지나치면 스토커가 된다고 했던가. 이제 대구는 오지도 않을 대기업 유치의 미련을 접어야 할 때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2차전지, 자동차부품, 금속, AI 분야에서 급성장하는 강소기업들이 부상한다. 1천억 매출 100개 기업이 눈앞에 와 있다. 수십억원씩의 지방법인 소득세를 내는 풀뿌리 토착 기업들이 등장 중이다. 최재훈 달성군수도 세미나에서 "늙은 대기업보다 젊은 중소기업이 낫다. 독일을 가보니 그렇더라. 달성의 국가산단도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껍데기 공장만 오는 대기업보다 기업의 두뇌와 심장이 현지에 뿌리박는 중소기업이 대구 미래의 답이다. 그나저나 라이온즈의 꼴찌 탈출과 우승마저 희망고문이 되는 것은 끔찍하다.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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