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자세…사나운 물결에도 두려움 없이…선비의 마음은 고요한지고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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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18  |  수정 2023-08-18 07:55  |  발행일 2023-08-18 제13면
장소 달라도…잔잔한 계곡·파도 치는 바다

그림 속 선비들 평온한 모습 삶의 자세 보여줘

강세황의 '박연폭포' 세찬 물줄기 청량감 가득

속세의 티끌 씻어내듯 시원…무념무상의 경지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자세…사나운 물결에도 두려움 없이…선비의 마음은 고요한지고
심사정, '선유도',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자가 없다. 모양도 색깔, 냄새도 없다. 무한대로 흡입하는 블랙홀 같다. 부족해서 안 되지만 넘쳐서도 안 된다. 이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자가 왕이 되었다. 무엇일까? 바로 만물의 근원인 물이다. 사람들은 유동적인 물의 생리에서 인생의 지혜를 길어 올리곤 했다. 옛 그림을 적시는 물도 다양한 표정과 상징성을 품은 채 흐르고 있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자세…사나운 물결에도 두려움 없이…선비의 마음은 고요한지고
조영석, '고사관수도', 종이에 연한 색. 〈선문대박물관 소장〉

◆부드러운 물결과 소용돌이치는 물결

물결을 살피는 선비가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밝힌다. 선선한 바람에 시름을 잊는다.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속세를 떠나 홀로 선정에 들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관수'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인데, 선비들이 물을 보며 인격을 닦았다. 물은 마음을 교정하는 선비들의 치료사였다.

사대부인 조영석은 서민을 대상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시도하였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시대를 거스르는 파격적인 주제를 선보인 것이다. '관아재'는 '나 자신을 살피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는 자신에 대한 절제에 엄격하였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는 병(病) 같은 것이 있어서 대략 그 삼매(三昧)를 알았지만 이를 일삼지 않았다"라고 문집에 적었다. 선비의 근본을 잊지 않고, 그림은 수양의 덕목으로 여겼다. 이에 부합하는 그림이 '고사관수도'다.

매미 소리가 맹렬한 가운데, 더위를 피해서 선비가 몇 권의 책을 들고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심히 걷다 보니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제법 큰 물결을 치며 흐른다.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도 있다. 그 아래 자리를 잡았다. 책을 놓고 비스듬히 앉아 물결 삼매에 빠진다.

조영석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사관수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산수인물화'이다. 엷은 먹으로 그린 물결을 앞에 두고, 바위와 얕은 언덕을 경계로 선비가 앉아 있다. 수염을 기른 선비는 도인의 풍모를 닮았다. 무릎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린 그는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는 중이다. 선비 뒤에는 큰 바위가 절벽처럼 솟아 있다. 그 사이에 뿌리내린 나무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삶을 버틴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무성한 잎으로 건재함을 과시한다. 그늘은 선비에게 꿀 같은 휴식을 제공한다. 그림 오른쪽에 '관아재'를 적고 낙관을 했다. 물의 부드러운 본성을 닮으려는 화가의 초상화 같다.

한적한 강물을 벗어나 바다로 향한 선비들이 있다. 선비들의 호방한 스케일이 놀랍다. 폭풍 같은 파도가 배를 덮칠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도타기를 즐긴다. 그들은 놀이기구를 탄 사람처럼 마냥 신났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선유도(船遊圖)'이다.

배를 타고 노니는 선비의 스릴 만점인 그림이다. 화가의 거침없는 필치가 출렁이는 물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심사정은 아버지 죽창(竹窓) 심정주(沈廷胄·1678~1750)의 그림실력을 이어받았다. 심정주는 빼어난 포도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심사정의 외가 역시 대단한 화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면서 그는 화가로서 삶을 영위한다. 그림으로 살아남기 위해 중국의 명화를 따라 그리며 자신만의 개성을 벼리는 한편, 고전을 재해석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토착화시켰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상(李圭象·1727~1799)은 심사정을 "그림에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로 칭송했다. '선유도'를 자세히 보자.

푸른 파도의 몸짓이 거세다. 소용돌이치듯 흰 이빨을 드러낸 물결이 사납다. 큰 배도 아닌 작은 배에 임시거처를 만들어 놓고 책상에 여러 권의 책을 올려놓았다. 옆에는 붉은 꽃이 핀 가지를 꺾어 화병에 꽃아 두었다. 뒤틀어진 고목 등걸에는 머리에 붉은 점이 박힌 학이 묘기를 부리듯 서 있다. 뱃머리에 앉은 선비는 파도를 감상한다. 뒤에 앉은 선비는 기대어 하늘을 살핀다. 급박한 상황에 시동이 삿대를 젓는 중이다.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데, 두 명의 선비는 느긋하기만 하다.

1764년, 58세에 그린 '선유도'는 호방한 필치에 물이 올랐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몰락한 가문은 삶을 어둡게 했지만 마음까지 잠식하지 못했다. 폭풍 속에서도 길을 찾아 즐기는 선비의 표정이 해맑은 이유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자세…사나운 물결에도 두려움 없이…선비의 마음은 고요한지고
강세황, '박연',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떨어지는 폭포수와 일어서는 파도

물의 모양은 천차만별이다. 계곡에서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높은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된다.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간다. 여행길에서 폭포를 보며,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그림을 그렸다. '박연폭포(朴淵瀑布)'다. '박연폭포'는 송도(지금의 개성) 박연리에 있다. 송도를 유람하면서 폭포를 직접 보고 그려서, 사실적이다. 경치가 빼어나 폭포의 웅장함을 더한다.

강세황은 안산에서 그림을 그리며 문화적인 교류를 한 몰락한 선비였다. 61세에 영조의 명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며, 가문에도 볕이 들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화가들의 그림을 평한 '표암유고(豹菴遺稿)'를 저술하고, 여행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 기행화첩을 남겼다.

'박연폭포'는 강세황이 1757년 45세의 나이에 개성을 여행하며 제작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사실적인 구도에 서양식 원근법을 적용하고 대담한 채색을 구사하여 신선한 맛이 있다.

'박연폭포'는 청록으로 이루어진 수채화 풍의 실경산수화이다. 절벽의 바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나무와 풀은 미점을 찍어서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오른쪽 아래에는 유람객들이 웅장한 폭포를 감상할 수 있게 정자를 배치해 놓았다. 폭포수 위쪽에는 작은 바위가 점처럼 찍혀 있다. 그 바위에 선 두 그루의 나무가 현장감을 살린다. 시원한 물줄기는 곧게 떨어지고, 물웅덩이에도 바위를 그려서 변화를 주었다. 그림이지만 실제 박연폭포와 같은 모습이다.

화면 위쪽에 강세황이 당시의 느낌을 적었다. "하늘에서 세차게 흘러서 땅을 쪼갤 듯 내려오니, 지척의 천둥소리에 속세의 티끌을 시원하게 쓸어버렸네. 놀란 새들은 물러나 어디로 날아가려나, 붉은 해도 짙은 그늘 속에 가리어서 어둡기만 하구나." 폭포는 천둥 같은 소리로 시원함을 주면서 무념무상에 젖게 한다.

물결을 보니 더불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모든 것은 흐른다. 세월도 인생도 물줄기도 하염없이 흘러 변한다. 임전(琳田) 조정규(趙廷奎·1791~1860 이후)의 '해금강'은 보는 이마저 물결처럼 출렁이게 한다.

조선 후기에 금강산과 관동의 팔경을 유람하고 그린 화첩이 유행하였다. 조정규의 '해금강(海金剛)'은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그린 그림으로 제작한 8폭 병풍 중의 한 폭이다. 마지막 폭에 '경신년(1860) 봄 임전 조정규가 그리다'라는 묵서가 있어,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해금강'은 일렁이는 파도에 기괴한 바위가 날아갈 듯 둥실 떠올라 숭고함마저 든다. 바위는 승천할 순간을 기다리는 용 같다. 마치 용솟음치듯 솟아올랐다. 출렁이는 파도와 낮은 해변을 사선으로 구분 지었다. 세 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며, 바위를 감상 중이다. 그 아래쪽에는 한 인물이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이 생선 떼처럼 펄떡인다.

◆순둥이 같은 물과 블랙홀 같은 물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자세…사나운 물결에도 두려움 없이…선비의 마음은 고요한지고
김남희 (화가)

물은 서두르지 않는다. 돌아갈 줄도 안다. 그 물이 보고 싶어서 동생들과 부산 기장에 갔다. 물은 낭만만 주지 않는다. 도착한 날, 밤새 파도와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졌다. 전쟁터다. 태어나서 그렇게 거센 파도는 처음 봤다. 새벽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쳤다. 순둥이 같은 물이 모이고 넘치면 괴물이 된다.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인간사를 짓밟는다. 수해를 입은 지역의 상처가 깊다. 옛 사람들에게 물은 지혜의 보고였지만, 이제 물은 기후위기의 경고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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