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서애 류성룡 출생지…맥문동 꽃피운 '사촌서림' 한폭의 수채화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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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18  |  수정 2023-08-18 08:03  |  발행일 2023-08-18 제15면

[주말&여행]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서애 류성룡 출생지…맥문동 꽃피운 사촌서림 한폭의 수채화
천연기념물 405호인 사촌 가로숲. 고려 말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방풍림으로 마을의 서쪽이라 사촌서림이라 불린다.

당진영덕고속도로에서 의성으로 들어서기는 처음이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금세 단촌면 소재지. 작은 마을의 작은 장터를 지나면서 오래되어 아주 깊이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쑥 떠오른다. 이 길, 기억나.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네. 사과가 익어간다. 사촌 가는 길, 발그레한 사과밭 모퉁이에서 '점곡사촌물놀이장'이라 쓰인 작은 안내판을 본다. 사과밭이 계속 이어진다. 점곡 사과를 자랑하는 글귀를 본다. '점곡 사과 맛 최고' 가을이 깊어지면 시장의 붉은 사과 더미 앞에서 점곡을 생각하게 되겠지. 물놀이장 안내판을 또 본다. 벌써 네 번째인가. 그래, 가보자.

[주말&여행]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서애 류성룡 출생지…맥문동 꽃피운 사촌서림 한폭의 수채화
점곡사촌물놀이장의 점곡퇴적층. 이곳에 인공빙벽을 만들어 운영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촌빙벽, 점곡빙벽, 옥사과골 빙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점곡퇴적층과 물놀이장

들을 가로질러 하트가 그려진 전봇대를 지나 삼거리에서 사촌1빙벽 텐트전용, 사촌2빙벽 캠핑카 전용이라 쓰인 이정표를 본다. 멀리 웃고 있는 허수아비를 따라 직진, 사촌1빙벽으로 향한다. 커다란 고래를 지나 둑으로 오르자 천막 아래 앉아 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난다. 물놀이장은 폐쇄 중이다. 오늘은 참 물놀이하기 좋은 날이지만 지난 태풍의 여파가 너무 컸다. 천변에 하얗게 펼쳐진 돌밭이 눈부시다. 물은 꼬록꼬록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층층의 섬세한 줄무늬를 가진 절벽이 거대하게 솟았고 그 아래 검은 물빛 위로 물놀이 금지 플래카드가 처량하게 매달려 있다.


안동 김씨 감목공 김자첨
1392년 마을로 이주
안동 권·풍산 류씨와 집성촌
과거 급제자 46명 배출
임란전 목조건물 만취당
보물 1825호로 지정

600년전 마을 입구 숲 조성
상수리나무·느티나무 등
울창한 노거수 청량감
거대한 절벽 '점곡퇴적층'
인공빙벽·물놀이장 활용



저 거대한 절벽은 '점곡퇴적층'이라 불린다. 중생대 백악기 때 만들어진 경상분지에는 점곡층, 사곡층, 춘산층 등과 같은 지질학 용어가 있는데 점곡층이 바로 이곳 점곡면에서 온 이름이다. 지난 6월, 의성은 전국에서 15번째로 환경부 국가지질공원이 되었는데 점곡퇴적층은 그 명소 중 한 곳이다. 천은 미천(眉川)이다. 아름다운 천이라 예상했는데 눈썹 같은 천이다. 점곡퇴적층은 미천을 따라 하식절벽으로 서 있고 미세한 모래와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백악기 때 경상분지 위를 자유 곡류하던 천이 신생대에 들어 감입곡류하면서 모래와 진흙을 쌓아 놓은 것이 이곳의 퇴적층이다. 의성에서는 이곳에 인공빙벽을 만들어 운영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촌빙벽, 점곡빙벽, 옥사과골 빙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입추가 지났는데 다시 물놀이장을 개장할지는 의문이다.

[주말&여행]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서애 류성룡 출생지…맥문동 꽃피운 사촌서림 한폭의 수채화
물놀이장으로 가는 삼거리에 사촌1빙벽 텐트전용, 사촌2빙벽 캠핑카 전용이라 쓰인 이정표가 있다. 뒤쪽으로 점곡퇴적층이 보인다.
[주말&여행]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서애 류성룡 출생지…맥문동 꽃피운 사촌서림 한폭의 수채화
사촌마을 만취당. 임란 이전의 것 중 사가로는 유일한 목조 건물로 보물 제1825호다.

◆사촌마을

사촌마을은 사과 따는 농부의 그림으로 시작된다. 납작한 집들이 늘어선 마을길에는 군데군데 솜씨 좋은 벽화가 정겹다. 마을이 생긴 지는 1천년이 넘었다 짐작되지만 1392년 안동 김씨 감목공 김자첨이 이주하여 사촌이라 한 것이 600여 년 전이라 한다. 이후 안동 김씨와 더불어 안동 권씨, 풍산 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은 영남의 와해라 불렸다.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낙향한 송은 김광수, 송은의 외손자 서애 류성룡, 퇴계 학맥을 이은 거유 김종덕, 임란창의 정제장 김사원, 병신 의병대장 김상종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국채보상운동 참여자가 75명, 과거 급제자 46명, 문집류를 남긴 분은 94명에 이른다.

흙과 돌을 이겨 쌓은 담장이 강고해 뵈는 긴 안길로 들어선다. 한때 고래등 같은 한옥들이 기와의 바다를 이루었다는 의성 사촌마을. 눈앞에 보이는 건 고래등도 바다도 아니지만 우련한 옛 모습들이 역사를 가늠케 한다. 마을은 임진왜란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를 아우르는 무작한 파괴의 시간을 피할 수 없었다. 남아있는 기와집들이 천연한 고색을 잃은 것도, 흙벽담의 말끔한 생김도 그 탓이라 여기고 싶다. 구획된 땅들의 규모와 주저 없이 뻗은 담장의 질주에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의 집성을 그려본다. 그중 온전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만취당이다. 퇴계의 제자였던 만취당 김사원이 3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꼽히며 임란 이전의 것 중 사가로는 유일한 건물이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고, 천장에 걸린 가마틀은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가 쓰던 것이라 한다. 만취당은 보물 제1825호로 지정돼 있다.

만취당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송은 김광수가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향나무다. 비도 햇살도 한 줌 스미지 않을 것 같은 큰 그늘의 나무다. 근처에는 눈비음으로 단장된 우물이 하나 있다. 존재감은 없지만 임란 전부터 있어 온 걸출한 물맛의 우물이라 한다. 물 지는 머슴이 줄을 이었고 사람들은 우물물을 장수의 근원으로 믿었다 한다. 처음 우물을 팠을 때는 황토물을 마시면 큰 인물을 낳는다 하여 열 두어 살이었던 김진사 댁 넷째 딸이 몇 바가지나 마셨다는데, 그 소녀가 훗날 서애 류성룡을 낳았다. 사촌마을은 3명의 정승이 태어날 형세라고 한다. 신라 때 이미 '나천업'이 나왔고, 두 번째가 류성룡이다.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한 명의 정승이 더 날 것이라 믿는다.

◆사촌 가로숲

마을 입구에는 길게 가로누운 숲이 펼쳐져 있다. 600년 전 입향 때 조성한 숲이라 한다. 마을의 서쪽이라 사촌서림이라 불리는데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설에 따라 서쪽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숲이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낙엽수가 주를 이루는 숲은 짙은 청량감을 내뿜으며 고고하게 서 있다. 300년에서 600년에 이른다는 둥치 굵은 나무들, 노거수의 숲이 지닌 녹음의 깊이는 어둡지 않고 강하다. 바로 이 숲에서 서애 선생의 어머니가 선생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황토물을 마셨던 소녀는 안동으로 시집간 후 정승이 난다는 해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친정으로 왔다가 쫓겨났는데 결국 이 숲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때 나뭇잎들이 일제히, 모조리, 떨어졌다고 한다.

숲에는 등뼈 같은 물길이 있다. 낙동강의 지류와 합류하는 대곡천으로 물길은 바싹 말라 있고 촘촘한 자갈들 속에 한 무더기 풀들이 자라있다. 부부가 수건을 휘휘 저으며 숲속을 걷는다. 여름 숲에서 깔따구의 습격은 어찌할 방법이 없는 걸까. 나도 팔을 휘휘 저으며 걷는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길 건너 점곡초등학교의 알록달록한 외벽이 꽃핀 듯하다. 저 보랏빛은 무엇이지. 맥문동이다. 지금이 맥문동 꽃피는 때구나. 남쪽의 과수원에서 음악소리 들린다. 사과는 음악을 들으며 태양 아래 익어가고, 맥문동은 나무그늘 속에서 꽃을 피우고, 깔따구는 자꾸만 렌즈 앞을 어지럽히는데, 문득 미천 둑에 꼼짝없이 앉은 청년의 시간은 꽃 같을까 사과 같을까 혹은 모래가 퇴적되는 만큼일까 하는 생각에 짠해진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가다 안동 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 영덕방향 북의성IC로 나간다. 톨게이트 앞에서 안동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하다 고운사, 단촌 방향 오른쪽 길로 빠져나간다. 바로 나타나는 다리를 건너 단촌면소재지를 가로질러 굴다리 지나 계속 직진한다. 사촌2리 들길식당 앞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물놀이장, 도로 따라 계속 가면 사촌가로숲 지나 사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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