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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발을 내딛기 전까지 영화 상영, 감독, 배우, 스태프를 초청해 진행하는 부대 프로그램과 영화를 소개하고 사고파는 마켓(Market) 운영 등 지금은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형태의 영화제는 한국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상 시상식이 있었을 뿐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전까지 영화제라 했을 때 사람들은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이라고 하면 가장 명쾌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사람들에게 영화제라고 하면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을 떠올리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라 일컬어지는 칸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도 최근 10~20년 사이 많은 한국 작품들이 진출하거나 수상을 하고 있어 일반인에게도 그 이름이 익숙할 정도이다. 세계 최초의 영화제는 베니스국제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1932년 가장 오래된 국제 미술전인 제18회 베니스비엔날레의 한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자그마치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영화제가 수천 개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영화인과 관객들이 모두 인정하는 권위 있는 영화제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제는 출품작 사고파는 마켓 역할
프로젝트 개발·자금 조달 플랫폼 수행
관객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존속 위기
제24회 대구단편영화제 23일 개막
지역 영화인 발굴 場으로 자리매김
사람들이 영화제가 뭘 하는 행사냐고 질문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건 그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상영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제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어떤 영화에 무슨 상을 수여하느냐에 따라 그 영화제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제는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시대정신을 가장 잘 담아내는 영화를 선택할 뿐이다.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로 인정받는 칸영화제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개입으로 최고상을 '무솔리니상'으로 제정하는 등 변질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또한 자국인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알제리의 투쟁을 그린 영화에 대상을 수여하고,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여해 그로 하여금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연설에 준하는 수상소감을 말하게 하는 등 소위 저항하는 영화예술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결국 영화제의 정체성은 영화제 스스로가 만들고, 영화인과 관객이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제의 또 다른 역할은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마켓이라는 점이다. 영화제에는 주목받는 감독들, 거장 감독들의 신작 영화가 즐비하다. 관객들은 이를 보기 위해 밤샘을 마다하지 않고 티케팅을 하고, 영화 관계자들은 이 영화들을 수입하고 배급하기 위해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광경은 국제영화제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세계 각국의 배급사들이 새로운 영화를 찾는 데에 있어 수많은 작품이 모여드는 영화제만큼 훌륭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소위 '프로젝트 마켓'이라고 해서, 제작된 영화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제작될 영화 프로젝트의 개발과 자금 조달 등을 위해, 미팅, 피칭 등 업계 주요 관계자들과 연결하는 회의 중심의 마켓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영화제는 사실상 영화시장을 떠받치는 거대한 플랫폼이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제의 이러한 기능과 역할이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독립성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영화제들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이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였지만, 많은 영화제들이 지자체 등 지원기관의 과욕과 운영 미숙 등으로 명멸을 거듭한 끝에 사라지기도 했다. 이는 영화만 있으면 영화제를 치를 수 있다는 안일한 인식과 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은 지원을 해주는 쪽에서 얼마든지 관여할 수 있다는 비상식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영화는 그 탄생 이래 줄곧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활용돼 왔다.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스스로 영화광임을 자처하며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단행했다. 이로써 독일영화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고, 이때 나치를 칭송하는 영화들이 줄곧 제작되고 상영되었다. 비단 나치 독일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미국 등 사회주의, 자본주의 가릴 것이 없이 영화는 훌륭한 프로파간다 도구였다. 영화의 거대한 흑역사인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 이후 강원도에서 개최되던 두 국제영화제는 폐지되었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는 내부 인선을 두고 갈등을 겪으며 개최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비단 큰 규모의 국제영화제뿐만이 아니다. 인천독립영화제는 자금난으로 인해 올해 개최를 중단하였다. 인천여성영화제는 프로그램 검열로 인해 크게 논란이 일었다. 그런 가운데 대구단편영화제가 올해 24회째를 맞아 8월23일 개막했다. 대구단편영화제는 지금까지 전국에서 만들어진 훌륭하고 새로운 단편영화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 그리고 지역영화인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네트워크 장이 기꺼이 되겠다는 스스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많은 영화제들이 외적인 요인에 의해 위기를 겪고 있다. 언젠가 대구단편영화제에도 그런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제라는 물신을 경계해야 한다. 언론은 소동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고, 영화제는 일시에 경기장이 되며, 예술은 스포츠가 된다." 비평가로서의 영화제에 대한 비판이겠지만, 어쩌면 대구단편영화제는 이러한 영화제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써왔는지 모른다. 여전히 영화제들의 위기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해야 할 일에 머뭇거리지 않는 대구단편영화제를 그래서 응원한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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