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시나브로

  • 김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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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31  |  수정 2023-08-31 06:58  |  발행일 2023-08-31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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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엽기자〈사회부〉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1973년 윤흥길이 발표한 소설 '장마'의 마침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을 읽으며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는 장마 기간을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생각했던 결과였을까. 국어 시험 문제를 몇 개 틀렸던 것 같다.

수차례 점수를 까먹은 결과 여름철 어김없이 찾아온 장마 기간엔 해당 소설이 생각난다. 정말 지루한 장마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거스를 수 없는 날씨를 나름 긍정해 본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 기후와 여름철 대기 특성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우리네 숙명이리라. 받아들이지 않을수록 옷가지는 젖어 들고 불쾌지수는 올라가리라. 받아들이고 난 뒤부터 장마는 특별할 것이 없는, 우산을 챙겨 들면 그만인 여름철 대기 특성에 불과했다.

유난히도 올해 맞닥뜨린 장마는 아직까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6월 말부터 한 달간 지속된 올여름 장마는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정체전선, 태풍, 대기 불안정 등 이유를 달리하며 비가 내리고 있지만 내겐 여전히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한반도를 휩쓸고 간 정체전선이 남긴 상흔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마 기간 경북지역에 내린 폭우로 25명이 숨졌다. 그리고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주민 2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로 남아있다. 실종된 주민을 찾기 위한 수색작업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사이 내린 잦은 비는 야속하기만 하다. 상처 난 곳엔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일부러 뿌리는 듯.

세력이 비슷한 서로 다른 성질의 기단이 만나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정체전선이 발생한다. 장마는 대표적인 정체전선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여름철 대기 특성이라 지나고 나면 쉽사리 잊기 마련이다. 그렇게 지구는 끓어올라 더 크고 강한 전선을 형성하게 될 전망이다. 이렇게 뜨거운데,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데, 이렇게 피해가 큰데 매년 잊는 인간이 지구는 밉다.

2023년에 발생한 일 중 유일하게 놀랍지 않은 것은 우격다짐으로 만들어낸 6·25전쟁 시절식 이념 다툼도, 면피성 보여주기식 수해복구 투어도 아니다. 시나브로, 하지만 분명히 다가온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피해가 결코 놀랍지 않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차례 경고해 왔기 때문에 무감각해진 지구온난화를 마주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선례에 비춰봤을 때 인류는 지구보다 먼저 소멸할 가능성이 크다. 거스를 수 없는 인류를 나름 긍정해 왔던 지구는 인류가 사라진 뒤 나지막이 마침표를 찍는다. '정말 지루한 종이었다.'
김형엽기자〈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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