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귀를 씻고 싶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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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04 06:53  |  수정 2023-09-04 06:52  |  발행일 2023-09-04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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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논설위원

세이(洗耳). '귀를 씻는다'라는 뜻. 옛적 선비들 사이에서 있었던 관행이다. 악담이나 추담을 들으면 귀가 더럽혀진 걸로 여겨 물로 귀를 씻었다. 상스러운 언어가 뇌리에 남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이 귀씻이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영조 임금이다. 그는 상대의 언행이 탐탁지 않으면 하던 일도 멈추고 귀를 씻었다. 사도세자와 극심한 갈등을 빚을 땐 더 유별났다. '한중록'에 따르면 하루는 영조가 세자 처소 앞을 지나면서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세자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네 먹었습니다"라고 했다. 세자를 병적으로 싫어했던 영조, 그 말소리조차 소름 끼쳤는지 곧바로 귀를 씻었다.

각설하고, 작금도 귀씻이 할 게 차고 넘친다. 관료나 정치인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다. 자기 일인 걸 알면서도 아무런 상관없는 듯 말하는 버릇이다. 모른 척하거나 책임을 떠넘긴다. 짜증과 분노를 유발한다. 멀리 볼 것 없다. 지난달 막을 내린 새만금 잼버리 때다. ①"위기 대응을 통해 세계에 대한민국 역량을 보여줬다"('부산엑스포 유치에 악영향을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동문서답도 유분수지,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였다. ②"대회를 유치한 대통령으로서 사과를 전한다. 사람의 준비가 부족하니 하늘도 돕지 않았다."(문재인 전 대통령) 현 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③"SNS 소통이 과거보다 활발해져 초반에 문제가 이슈화된 것이다. 과거엔 국민 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인내의 수준도 높았다."(김관영 전북도지사) 집행위원장·개최지 수장으로서의 할 말은 아니었다.

조선 성종 임금은 천재나 인재지변 때마다 '내게 잘못이 있는지, 언로가 막혔는지' 등 10여 가지를 꼽으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숙종 때 김창업이 쓴 '연행일기'엔 중국에서 안씨(顔氏)하면 아무리 비천해도 고매한 사람으로 존중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가문 대대로 지켜 온 '안씨가훈십조' 덕택이었다. 그중 하나가 '잘된 일은 남 탓으로, 잘못된 일은 반드시 내 탓으로 돌려라'는 것이다. 1990년대 '내 탓이오 운동'이 문득 기억난다. 이기주의에 매몰돼 서로 남 탓하지 말고 자기 반성을 먼저 하자는 캠페인이었다. 이들 얘기를 곱씹어 본다. '사과의 정석'을 다시 깨닫는다.

관료·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네 범인(凡人)도 사과를 허투루 해선 안 되겠다. 사과하는 '척'이 아니라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는 얘기다. 사과의 키포인트는 잘못에 대한 인정이다. 사족이 없어야 한다. '다만' '하지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다면' 등의 군더더기 말. 이들 표현은 '사과하고 싶지 않다'는 뜻과 다를 게 없다. "이유 불문, 내 잘못이다" 진정한 사과는 이 한마디면 끝이다. 그래야 사과에 의구심이 남지 않는다.

잼버리를 둘러싼 공방이 여전하다. 자칫 덤터기를 쓸까 봐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때다 싶어 진영 싸움만 벌인다. 국민이 무슨 죄냐. 그런 작태를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귀도 눈도 씻고 싶다. 김 여가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잼버리와 관련해 처음으로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도 책임 소재는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누구의 책임이 큰지 모르고 있나? 잼버리 공동조직위원장이자 관할 부처 수장인 김 장관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최종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이런 사과를 듣기란 요원한 것인가.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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