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북한강 만나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茶山 향기 그윽하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1.jpg) |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
두물머리는 천연 생태계다. 빙하기 이후 진화한 꽃과 나무, 살아남았던 새와 동물이 역사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해 한강본류의 머리가 되는 곳. 거기에는 인생의 가장 즐거운 때, 마치 김환기가 그린 추상화 '십만 개의 점'과 '꽃의 아이들'처럼 가슴 뭉클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른 아침마다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 강은 알고 있다. 여기가 청자 항아리 같은 공간이란 걸. 사방이 탁 트인 자연 경치와 산책로, 한강 제1경 두물경은 정말 감탄사가 비명을 지르는 장관이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3.jpg) |
다산 정약용의 생가(여유당) |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4.jpg) |
시대를 앞서간 다산의 업적과 발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 |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자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었다. 고기잡이, 배 건조가 금지되고, 옛 영화가 부침한 나루터, 강변에 늘어진 수양버들, 그리고 물풀과 우거진 갈대 사이 정박한 황포 돛단배. 눈에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다. 강가 마을은 무슨 로렐라이처럼 우리를 부른다. 그저 아름답다고 해야 할 경치로 인해 웨딩, 영화, 광고, 드라마, 촬영장소로 출사자의 발바닥을 시나브로 달군다. 사진작가들의 눈에 애면글면 군침이 흐르고, 특히 겨울 설경과 일몰은 렌즈에 멍을 때린다. 두물머리는 드라마 출사지로 엄지척을 세우는 곳.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명승지에 고유번호를 두고 있다.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세 그루,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그 나무 그늘에서 하염없이 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이테가 많아질수록 티가 난다는 느티나무, 마찬가지로 연민의 가슴을 되찾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 주름살에도 곰비임비 티가 나겠지. 이제 두물머리 물레길 그 길을, 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걷는다. 길을 지우며 걷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바람이여 걷는 저 사내 뒤에 부는 바람이여.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불어왔을 것이다. 아 아, 하츠네 미쿠의 '꽃의 아이'를 코러스 해 본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어, 평소처럼 꽃으로 왕관을 만들고 있는, 그때 너를 사랑하게 됐어, 외로운 것도 슬픈 것도 전부 다 끝이 나지만, 소원은 새에게 부디 들키지 않기를 이야, 그루터기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어, 코끝에 나비가 앉아서 씨익 웃었어…' 나는 새에게 들키지 않고 그렇게 마재마을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에 소원처럼 도착하였다.
정약용 생가·문화관서 여정 시작
목민관의 자세 고민했던 삶 기려
파란만장했던 생애 돌아보며 쓴
그의 자찬묘지명 음미하며 마무리
다산 정약용의 생가(여유당)와 문화관 기념관을 먼저 답사한다. 누가 뭐래도 다산은 우리 한국사 밤하늘의 안드로메다은하다. 거대 가스 행성을 거느린 밝은 별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크고 무거운 별과 그 군집 은하처럼. 그러하듯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그는 박학다식한 학자, 수원 화성을 축조한 실력자, 훌륭한 관리, 한강의 배다리, 거중기 발명, 정조의 신임이 높았던 암행어사, 음악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래서일까 다산(茶山)이라는 그의 호에 빗대 '다산(茶山)은 어떤 사상가보다 많은 것을 다산(多産)한 인물이다'라는 농담이 사람들 입술로 굴러다녔다. 정말 그의 망망대해 같은 사상은 다 헤아릴 수 없다. 저 안드로메다은하를 다 헬 수 없듯이. 그러하므로 정약용은 여러 이름으로 바느질한 키메라(Chimera)처럼 여전히 환영의 무언가이다. 다산은 사서육경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 마음을 닦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통해 치인(治人) 즉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했다. 다산이 살았던 생애의 배경과 일표이서에 나타난 그의 치세에 관한 정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6.jpg) |
다산이 발명한 거중기 |
정약용은 조선조 영조 38년(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미용, 호는 다산, 시호는 문도다.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모친은 파평 윤씨다. 성실히 공부하여 28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우부승지까지 승진했고, 36세에 곡산 부사를 지냈다. 이년 후 내직으로 이동, 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제수되어 직책을 다하였다. 이후 여러 번 복직과 모함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다산을 신임하던 정조가 붕어하자, 1801년 신유교난으로 강진으로 유배, 그때 그곳에서 18년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다산은 이 기간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목민심서도 이때 완성한 것이다. 유배에서 해제되자,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현종 2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다산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한 편의 장중한 드라마였다.
다산이 살았던 시대는, 그전부터 그랬지만, 조정은 당파 싸움에 아등바등 정신이 없고, 백성은 굶주림에 허덕여 피폐해졌다. 즉 나라는 병들고 백성은 토지를 생업으로 경작을 하건만,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아 등짝을 벗겨 먹고 배를 두드리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통치자들의 사리사욕이 횡행하는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희망을 잃은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것인가. 삼천리 강토는 백성의 아픔과 신음으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에 빠져들었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7.jpg) |
실학박물관의 내부 풍경 |
이런 참담한 현실을 보고, 다감한 천재이자 어진 목민관이었던 다산이 그냥 있을 리 만무했다. 다산은 경전에 의거, 공리공론으로 하는 허식의 학문과 이를 이용하는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원인으로 보고, 그 대안으로 벼슬아치가 청렴 공정 정의로 의식을 개혁하고, 실학으로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통치를 하면 나라를 구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뛰어난 선견지명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나라 전체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뿐이다(一毛一髮 無非病耳 及今不改 期必亡國而後己)…"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왕과 관료들이 개혁과 실학으로 통치할 리 만무했다. 그 결과 조선조 말 여러 강대국에게 이리저리 뜯기다가 마지막에 일제에 나라를 통째로 잃고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부정부패는 지금도 여전하다. 국가 상부 계급 특히 입법기관의 국회의원들이 사리사욕으로 정치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주야로 정쟁만 일삼고, 그걸 위장하기 위해 끝없이 가짜뉴스, 선동, 날조로 사회를 혼란케 한다면 그 나라 미래는 역시 희망이 없을 것이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5.jpg) |
문도공 다산 정약용의 묘 |
그럭저럭 오늘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다산의 묘소에 당도했다. 다산은 생전에 이미 자기 사후에 떠돌 마뜩잖은 억측을 차단하기 위해 명문의 자찬 묘지명을 지었다. 묘지명은 명료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서릿발 같은 예지력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 마지막에 있는 부분을 나름으로 재음미해 보자.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유적 탐방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2309/2023090301000047700001612.jpg)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이었던 한 갑자 60여 년은 온통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흐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 과거를 거두려고 한다. 과거를 회고하여 다듬고 현재의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지금부터 그물처럼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하여 실천하려 한다. 저 하늘이 나에게 내린 지상의 명령인 본성을 고요히 해서 그걸 거울로 자신을 바르게 세우려 한다. 나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한 생의 고해를 건너면서도,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끝내 삼켜야 했던 말들이 이제는 스스로에게 털어놓은 고백이 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논어에 '불원천 불우인(不怨天 不尤人)' 구절이 있다. 그 뜻을 따른 것인지. 다산은 항상 현실을 받아들였고, 어떤 원망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실로 역사의 귀감이 되었다 할 것이다. 사기와 범죄를 밥 먹듯이 하면서 사과 반성이 한 번도 없는 수치를 모르는 집단이 있다. 그들이 이번 탐방에 참석했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사진작가
☞문의: 경기도 남양주시 문화관광과 (031)590-4760
☞내비 주소: 다산 정약용 생가 (여유당)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3-2
☞트레킹 코스: 두물머리~두물머리 물레길~다산 문화유적지~다산묘소
☞인근의 볼거리: 석창원, 용문산 자연휴양림, 수종사, 두물머리 생태학교, 마재 성지, 황토마당, 조류생태습지, 아조타농원, 세지원, 대가농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