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형의 정변잡설] 해방이 재앙인 사람들

  • 정재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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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0  |  수정 2023-09-20 07:00  |  발행일 2023-09-20 제26면

[정재형의 정변잡설] 해방이 재앙인 사람들
정재형 변호사

해방 직후, 의열단 대장 약산 김원봉이 악질 형사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는 아이러니한 삽화를 오래전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은 요즘 낙양지가를 올리는 홍범도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정부의 행태 때문에 역사학계는 물론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런 일을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맥락 없이 내지르는 넋두리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징용공에 대한 배상책임을 아무런 관련 없는 우리 기업의 돈으로 대신하고 핵오염수의 방류를 수수방관 또는 옹호하면서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사살했음을 자인한 백선엽의 동상을 세우고 그 묘비명에서 친일경력을 지운다든지, 또 헌법에 명기된 '불의에 항거한 4·19'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는 등의 일련의 도발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수수방관하면, 복거일의 소설(비명을 찾아서)처럼 1910년 식민지가 된 조선이 아직도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오겠다고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일전 강연회에서 대구대 나인호 교수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독립운동을 비하하면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을 패전시켰기 때문에 해방된 것 아니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들에게 "독립운동가와 민중들의 독립의지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패전국 일본의 일부로서 항복했을 뿐, 강대국들이 조선의 독립을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꾸하신단다. "그때 해방되지 않고 일본의 일부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속셈을 숨기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민주주의란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36년간 친일하고 매국한 부류들을 해방된 후에도 단죄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했던 과거가 몇십 년의 잠복기를 거쳐 나타난 대상포진처럼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 참회하기는커녕 두고 보자고 벼르던 놈들이 여전히 주류로서 가진 권력과 돈줄을 이용해 우리 할배가 뭘 잘못했냐고 으름장을 놓는 형국이 지금이다. 이놈들이 건국절 운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선열의 무장투쟁을 마치 비적들의 약탈행위인 것처럼 폄훼하려는 것은 자신들의 원죄를 벗기 위한 몸부림임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 돈과 권력은 쥐고 있지만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애비와 할애비의 매국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위해서 그놈들과 싸운 독립열사들을 하나씩 둘씩 지워가려는 것인데 참으로 가증스럽다. 지금 너희들이 가진 것이 친일의 대가가 아니라 조상이 애써 번 것이고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조상의 패악이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여름 끝에는 서리가 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재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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