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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
때는 1970년대. 데뷔작을 제외하고는 뻔한 치정극이나 찍는다고 평론가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던 김 감독(송강호)은 얼마 전 촬영을 끝낸 영화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될 거라는 망상 속에 제작자 백 회장(장영남)을 찾아가지만, 백 회장은 제작사 후계자인 신미도(전여빈)를 설득하고, 시나리오가 사전심의에 통과해야만 추가 촬영을 허락하겠다고 한다. 의외로 신미도는 바뀐 시나리오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김 감독을 도와주려 하는 반면, 시나리오는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 회장이 출장을 떠난 이틀 동안 김 감독은 스튜디오를 걸어 잠그고 결말을 바꿀 촬영을 감행한다. 스케줄이 꼬인 배우의 짜증, 배우들 사이의 스캔들, 갖가지 불화 등 촬영장은 어수선하기만 한데, 백 회장이 돌아오고 문공부 사람들까지 들이닥치면서 바뀐 결말을 완성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 보인다.
추석을 앞두고 한국영화들이 대거 출사표를 던졌다. '거미집'(감독 김지운)은 평자들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지만, 흥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검열을 피해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감독의 욕망, 그로 인해 벌어지는 우스운 상황극이 '가벼운 블랙 코미디' 정도로 명명될 수는 있겠지만, 이 영화의 성격과 매력을 담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차라리 비장르영화라고 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익숙한 서사 구조와 신들, 결말을 가진 장르 영화들과 달리 아수라장이 된 영화촬영장, 혹은 영화, 혹은 감독의 최후를 예측하기 어렵기에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니까. 사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소위 '자기반영적' 영화들은 대개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에 있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이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과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영화를 찍을 때, 감독들은 실제로 자신이 영화를 만들면서 겪는 일들과 느끼는 감정들을 재료로 삼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담아낸다.
'거미집'은 신연식 감독의 각본을 김지운 감독이 각색한 것으로, 60~70년대 실존했던 감독들과 영화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영화를 만든다는 지난한 작업과 명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관점도 엿보게 해준다.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후,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 대부분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장 최근에 선보인 '인랑'이 혹평을 받으면서 명성에 타격을 입었다. 이 경험은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객관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 감독을 카리스마 넘치는 거장이 아니라 지질함을 겸비한 인물로 희화화시킨 장면들에서 그의 심중을 잘 읽을 수 있다. 가령, '거미집'에는 평론가들이 등장하는데, 김 감독은 그들의 비아냥에 속으로 '평론은 감독이 못된 자들이 열등감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신작도 그들에게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며 억지로 재촬영을 시도하고 있으니, 감독 자신을 모순적인 인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거미집'은 김지운 감독 영화의 제목이자 김 감독 영화의 제목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거미와 거미집이 은유하는 원관념이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층 유연하고 성숙해진 김지운 감독의 신작이 다시 관객을 즐겁게 해주리라 믿는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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