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줄서기 문화

  • 이창호
  • |
  • 입력 2023-09-26 06:50  |  수정 2023-09-26 07:00  |  발행일 2023-09-26 제23면

점심때 회사 인근 맛집에 긴 대기 줄이 선 경우 발길을 돌릴 때가 있다. 밥 한 끼가 뭔 대수라고, 굳이 식당에서까지 차례를 기다릴 필요가 있냐라는 알량한 자존심이다. 한국인은 혼자서는 잘 기다리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러 타인과 함께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엔 익숙하지 않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트라우마 탓일 수도 있다. 과거 예약문화가 드물었던 시절, 긴 대기 줄엔 으레 불청객인 '새치기족'이 있었다. 시비가 붙어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줄 서면 손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

섬나라 영국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깡패' 같은 짓도 많이 했지만, 국민 저변엔 '줄 서는 문화'가 뿌리 내려 칭송을 받았다. 영국인의 줄 서기 습관은 각별하다. 영국인이 혼자 길거리에 서 있으면 금세 행렬이 생긴다는 얘기도 있다. 인기 스포츠인 프로축구·크리켓·테니스 대회에 줄을 서서 입장하는 요령을 담은 안내 책자까지 나와 있다. 지난해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대기 줄은 최장 16㎞에 이르렀다. 추모객은 불과 몇 분간의 참배를 위해 길게는 하루 이상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이른바 '웨이팅(waiting) 맛집'이 인기다. 유튜브 먹방과 SNS 영향이다. 웨이팅 시간·인원은 해당 식당의 퀄리티를 나타내는 바로미터로 통한다. 그래서 웨이팅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다. 웨이팅 맛집에 사람이 몰리자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엔 '바람잡이 대기 줄 알바 모집 공고'도 등장했다. 손님이 많은 것처럼 홍보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대행 전성시대'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이창호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