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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석기자〈사회부〉 |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2010년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에서 검사 역을 맡았던 배우 류승범의 명대사다. 영화가 개봉한 지 13년이나 지났지만, 기막힌 대사만큼은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를 준비하며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대구시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말이기도 하다. 지방자치단체들은 매년 '국감 시즌'이 되면, 국회의 '자료 요구 갑질'에 몸살을 앓기 때문이다. 일부 의원은 70여 건에 이르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빗발치는 자료 요청에 공무원들은 야근으로 밤을 새우거나, 주말에 출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구시를 비롯한 지자체는 피감기관으로서 국회의원실의 무리한 요구에도 피감기관의 자세로 '호의'를 베푼 것이겠지만, 호의가 관행처럼 이어지면서 '권리'로 굳어진 셈이다. 그 결과 국정감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지방 사무에 대한 자료요구도 국회의원의 자연스러운 권리가 돼버렸다.
이에 참다 못한 홍준표 대구시장은 "쏟아지는 국감 자료 제출 요구에 대응하느라 시정이 마비될 지경"이라며 "국정감사 대상 자료만 제출하고 지방 사무 자료는 불응 사유를 적시하고 회신하라고 지시했다"고 선을 그었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고 있음에도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만큼, 올해부터라도 국가 사무와 지방 사무를 엄격히 구분해 국감에 임하겠다는 것이다. '할 말은 한다'는 홍 시장다운 대처다.
이에 대구공무원노동조합도 "대구시의 무분별한 국감 자료 제출 거부를 지지한다"며 "시청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각종 자료 제출 등 격무에서 잠시나마 호흡을 할 수 있는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홍 시장의 말대로 지방자치 사무는 지방자치법에 따라 지방의회의 사무감사 대상에 속한다. 그런데도 국회는 국가 위임 사무와 보조금 등 국비 예산 지원 사업이 아닌 국감과 관련이 없는 자치 사무까지 감사를 하고 있다. 결국 지자체는 국회 국정감사와 지방의회 행정 사무감사, 감사원 감사 등 세 차례 감사를 받으며 한 해를 보낸다.
'내놓아라' 식의 과도한 자료요구 등 국회의원실의 갑질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매년 국감 때마다 나오지만, 개선은 요원하다. 진정한 지방분권 시대를 위해 국회는 이제라도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자체의 호의를 더 이상 권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제22대 국회에서 열릴 내년 국정감사에서는 불합리한 관행의 고리가 끊어지길 기대한다.
민경석기자〈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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