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준영 논설위원 |
언젠가부터 계절이 얄궂게 변하고 있다. 꽤 오래전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비교적 선명한 형태로 존재했다. 지금도 구분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는 봄과 가을이 실종됐다 싶을 정도로 짧아지고 있다. 매서운 추위를 뒤로 한 채, 싹이 트고 꽃이 핀다 싶으면 이내 반소매고 여름이다. 지긋지긋한 더위가 물러나고 이제 쾌청한 가을하늘과 예쁜 단풍을 좀 즐길라치면 어느새 두꺼운 겉옷을 챙겨야한다. 11월 초만 하더라도 30℃에 육박하는 희한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며칠 사이 겨울임을 직감할 정도의 냉기 가득한 바람이 분다. 일교차가 10℃ 이상 나는 날들은 범사가 됐다. 기억 속의, 혹은 기대치에 맞는 형형색색의 단풍을 눈에 담으려면 보물찾기급 노력이 필요할 지경이다. 생활동선에 위치한 가로수나 공원의 나무에는 그저 시들거나 푸르죽죽한 잎들이 마지못해 붙어있는 느낌이다.
계절에 대한 호감도는 개인별로 다르다. 서핑이나 스키를 즐기고 호캉스나 불멍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여름과 겨울을 반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은 폭염이나 한파 같은 극단에 치우치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계절, 봄과 가을을 선호한다. 팍팍한 살림에 냉난방비 걱정을 덜어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생동감과 함께 활기를 주고, 심리적 안정감과 풍성함을 안겨주는 매력이 있어 그렇다. 너무 춥거나 더우면 예민해지고 불편과 불만 속에 다툼이 잇따르기 마련이다. 깊게 흐르는 물이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주류이듯, 봄과 가을이 지금처럼 짧고 아쉽지 않아야 여름과 겨울도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정치가 계절을 닮아간다. 큰일이다. 중간이 없고 완충지대도 없다. 갈라치기와 가스라이팅에 세뇌된 탓에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덩치만 기형적으로 커지고 있다. 양 끝단에는 원색만 보인다. 빨간색과 파란색만 판을 치는 바람에 다양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혼합색도, 파스텔톤도 찾아보기 힘들다. 확증편향에 길든 후로 전선만 확대되는 양상이다. 가족이나 친구, 모임도 예외가 아니다. 잘잘못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능력도 해일 같은 편 가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의견 차나 다툼의 처음은 사안이었으나, 이젠 사람이나 진영으로 옮겨 붙은 지 오래다. 중도나 부동층이 다시 관심을 받고 힘을 가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이 비관적이고 안타깝기만 하다.
내성(耐性)이란 게 그렇다. 반복될수록 더 강한 것을 찾게 된다. 대통령이든,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이든 반대편에서는 그저 비아냥이나 혐오의 대상일 뿐, 아무런 귄위를 가지지 못한다. 툭하면 하야와 구속을 주장하면서 부화뇌동을 부추긴다. 여기엔 존중도, 예의도 없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일 뿐이다. 과거엔 침묵하는 다수를 의식했었고, 그 다수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선의의 경쟁이었고 관문이었다. 그나마 상식적이었던 일련의 과정을 지금은 팬덤정치가 흡수한 상황이다. 오직 열성 지지세력의 마음에 들기 위한 막말과 오버만 횡행할 뿐, 중도와 반대편을 끌어안을 정성과 배려는 순위권 밖으로 한참 밀려나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극단의 여름과 겨울은 섭리를 거스르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 내몰리면 결국 극소수만 웃게 된다. 그런 세상이 올까 봐 겁난다.장준영 논설위원

장준영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