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거대 문어·러시아어 하는 대게…정보라 자전적 SF소설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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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02 08:17  |  수정 2024-02-02 08:18  |  발행일 2024-02-02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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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자전적 SF연작소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6종의 해양 생물이 출몰하는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시대의 모순에 저항하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게티이미지뱅크>
지구_표지
정보라 지음/ 빗홀/268쪽/1만6천800원
포항 풍경으로 비정규직 강사 해고 등
사람답게 살기 위한 투쟁·투병의 기록
경쾌한 여섯 편 소설로 묵직한 메시지

소설집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에 이어 2023년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SF연작소설이다. 해양 생물을 주제로 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다. 작가가 살고 있는 포항의 풍경과 함께 그의 가족과 이웃, 친구와 닮은 인물들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해양 생물이 출몰하는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갑자기 거대 문어가 나타나고 수산물 가게 수조 속의 대게가 러시아어로 말을 하는 등 기발한 상상력에서 탄생한 이야기가 절로 웃음 짓게 한다.

하지만 작가가 겨냥한 주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대의 모순을 거울처럼 비춰내면서 깊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과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한 시설, 작은 나라의 이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21세기 제국주의, 잔인한 해양 생태계 파괴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다양한 현안이 깊이 있게 다뤄진다. 또 이에 맞서 조금씩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용기 있는 걸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실제 거리에 나가 목소리를 내온 작가의 지난 행보가 생생하게 녹아 있다. 2020년대를 지나오며 느낀 솔직한 고민과 남편을 만나 사랑하게 된 시절의 흔적도 군데군데 드러난다. 때문에 소설집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치열한 투쟁과 투병을 이어온 기록이자,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약한 손을 마주 잡고 깊은 사랑을 나눠온 장면의 모음이다.

소설은 강사법 개정과 팬데믹 이후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는 사태를 배경으로 한 '문어'에서 시작된다. 한밤중 대학 본관에 갑자기 나타난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고 엄숙하게 외친다.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잠결에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어 먹으면서 예상 밖의 해프닝이 벌어진다. 실제로 이 소설의 초반 5~6쪽은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썼으며, 강단과 학생을 향한 작가의 짙은 그리움도 드러나 있다.

정 작가는 소설집과 함께 발간된 '무크지'에 담긴 인터뷰에서 "현재 남편이 된 옛 위원장님하고 연애할 때 그가 바다생물을 멸종시킬 기세로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외계인이 쳐들어오더라도 문어같이 생겼으면 그냥 먹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외계 문어를 먹는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연작은 이주 노동자와 해양 생태계를 근심하는 동시에 새로 만난 가족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대게'와 '상어'로 이어진다. '이길 것 같지 않아도' '도망칠 곳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는 남편과의 단단한 유대감이 이해되면서, 암 투병 중인 그를 잃을 수 없는 작가의 절박한 마음도 읽어낼 수 있다. 이어지는 '개복치'에서는 인형과 게임을 좋아하는 선우의 바닷속 탐험을 다루며 남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각자의 삶의 방식을 찾으면 된다는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소설은 우주해파리와의 접촉 이후 검은 정장 입은 사람들의 진실을 알아가는 여정이 담긴 '해파리'와 '고래' 연작으로 끝을 맺는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과 얽혀 갑자기 연행되고 억류되기를 반복하지만,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인간 종을 넘어서 여러 생명체와 연대한다. 견고한 바위 같은 어려움에 부딪혀도 저항을 이어나간다.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작가의 진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동시에 소설은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거리에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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