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영화가 선거를 만날 때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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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11 07:01  |  수정 2024-03-26 15:59  |  발행일 2024-03-11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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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경북본사 본부장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영화적 상상력은 참으로 놀랍다. 1968년 개봉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한 디스플레이 장치는 태블릿PC가 됐고, 1991년 개봉작 '딕 트레이시'에서 선보인 통화 가능한 손목시계는 스마트 워치가 됐다. 최근 암호화폐 월드코인과 관련해 논란이 된 홍채 인식은 22년 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한 기술이다. 1963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전 세계 동심을 사로잡은 '우주소년 아톰'은 인공지능, 원자력 모터를 탑재한 로봇에 관한 얘기다. 어디 이뿐이랴. 미래 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상당수 신기술이 실은 오래전 영화에서 이미 구현(?)됐다.

영화의 영향력은 미래에만 귀속되는 건 아니다. '도가니'(2011)는 2000년부터 5년간 광주 한 특수학교에서 교사와 교직원에 의해 자행된 청각장애아동 성폭력 사건을 다뤘다. 묻혀 있던 추악한 진실이 스크린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자 국민은 충격과 분노의 도가니에 빠졌다.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2007), 1997년 이태원 햄버거가게 살인사건을 다룬 '이태원 살인사건'(2009),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1987'(2017) 등 은폐되거나 진실이 불편한 '과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실화 영화는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가 됐다. 공소시효 연장, 재수사, 제도 개선 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는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도 제공한다. 이소룡 유작 '사망유희'(1978)의 마지막 결투 신은 전형적인 '수직 구도'다. 주인공 빌리(이소룡 분)는 마치 도장깨기 하듯 고수들과 차례차례 대결을 펼친다.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더 센 강자가 버티고 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장센을 만나게 된다. 반면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설국열차'(2013)는 계층(혹은 계급)이 반드시 수직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열악한 환경의 꼬리칸에 탑승한 생존자들은 빈곤 해방을 위해 앞칸으로 전진한다. 한 칸, 한 칸 점령할 때마다 더 풍요로운 환경이 펼쳐진다. 평등해야 할 수평적 사회(열차)에도 계급을 구분 짓는 '철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영화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팝콘 터지듯 짧은 시간 내 집단적 공감을 분출시키는 폭발력에 있다. 그래서일까. 총선 사상 유례없는 '영화전쟁'이 지금 장외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개봉된 '서울의 봄'(누적 관객수 1천312만명)이 불을 붙인, 전직 대통령을 소재로 한 정치영화가 올 들어 다큐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DJ를 다룬 '길위에 김대중'과 이승만을 다룬 '건국전쟁'이 각각 12만명, 113만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상영 중이다. 정치 성향이 다른 두 다큐가 맞대결하는 양상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달 하순에는 12·12사태를 다룬 '서울의 봄' 뒷얘기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1980'이 개봉된다.

영화가 '이념의 전쟁터'가 됐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지만, 선거를 앞두고 정치색 짙은 영화가 쏟아지는 데 대한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정치권의 경쟁적 '관람 인증'은 지지층 결집을 유도하고 있어 사실상 국민을 갈라치기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부에선 심리적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30% 보수 성향의 국민과 또 다른 30% 진보 성향 국민 간 간극이 영화로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달 뒤 총선에서 여야 간 승패가 갈리겠지만, 보수와 진보 간 '역사의 화해' 없이는 그 누구도 승리했다 하지 못할 것이다.

변종현 경북본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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