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
'역사는 불완전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확신이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변론을 지켜보다 떠오른 문장이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구절이다. 소설은 불완전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젊은 날 자신이 분노에 차서 보낸 편지글 하나가 불러온 비극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간 노인의 무지를 다룬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받았던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에 이름을 올린 수작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에 의존해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시간과 기억이라는 문제를 역사와 개인의 관점에서 성찰한다.
함께 떠오른 영화도 있다.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라쇼몽'이다. 사무라이 한 명의 죽음을 두고 관련된 여러 사람의 증언이 엇갈리는 모습을 그리는 영화다. 주제는 명확하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작금의 한국적 상황은 라쇼몽이 그리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모호해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진실의 대상은 사회적 현상 또는 관념, 가치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감정과 개인적 믿음, 여론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여 믿는다. 합리적 근거보다 감정에 의해 정보를 선택한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감정과 신념에 따른다.
실제로 우리는 논리적 근거나 과학적 증거가 있는 사실보다 감정적 동질성을 지닌 추측성 의견에 더 많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사실관계가 무시된 정보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양극화된 정치 문제로 가면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다. 탈진실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두고 대치하는 여론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기반으로 신념이 펼쳐진다. 이른바 '확증편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보자기에 담긴 100개의 구슬 중 99개가 흰색이고 1개가 검은색이라고 해도, 검은색 한 개를 근거로 전체 구슬이 검다고 주장한다. 그 검은색 구슬 하나를 집어 들고 이 보자기의 모든 구슬은 검은 것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보자기 속 구슬이라면 증명이 쉽겠지. 꺼내 펼쳐보면 되니까. 추상적인 진실,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갈수록 증명은 쉽지 않다. 현실은 구슬이 담긴 보자기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소모적이고 광적인 다툼에 대한민국이 아수라장이다. 경기 침체, 의료 공백, 관세 폭탄, 대미 관계 등 모든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놀랍고 두렵고 황당한 계엄이었으나, 이후 우리 사회는 곧 정상화될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전 국민 앞에 생중계된 '팩트'가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탄핵 심판 변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사리판으로 전락했다. 포스트 트루스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이것은 세력과 힘의 다툼이다.
최종 판단은 헌법에 의거해 이루어질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이 시점에서의 유일하고 확실한 진실이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신념이 아닌 사실로 믿고 따르면 된다. 아무리 포스트 트루스 시대라고 해도 이것은 체제가 만들어낸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이은경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