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마를 견뎌내지 못해 전소된 연수전 터. 타다남은 기둥과 잿더미 사이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지난 22일 의성에서 발화해 25일 오후부터 안동과 청송 등지로 번진 산불은 만휴정과 묵계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등 각종 문화유적과 명승지까지 위협했다.
거칠 것 없는 화마의 기세는 의성의 천년고찰 고운사(대한불교 조계종 16교구 본사) 마저 삼켜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웅전과 일주문을 비롯한 몇몇 전각은 화마를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지정문화재인 '연수전'과 '가운루'는 주춧돌과 타다남은 앙상한 기둥 몇 개만 남기고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고운사 관계자에 따르면 사찰을 담당한 이종혁 과장(경산소방서 119재난대응과)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명의 소방대원이 펼친 사투가 있었기에 전소는 면한 셈이다.
신도와 방문객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종무소 앞의 종각 모습은 참혹했다. 타다남은 기둥과 깨진 기와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땅바닥에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해 깨진 범종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에 부스러지거나 깨진 채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기와의 뒷면에는 가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축원이 담긴 흰색 글씨가 급박했던 화재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듯했다. 종각 터 뒤로 보이는 종무소와 극락전, 그리고 지정문화재인 연수전과 가운루 등이 있던 터에는 연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혹시나 남아 있을 불씨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물을 분사하는 소방대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지난밤 벌인 사투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이와 달리 안동으로 향한 산불은 지역 문화재와 명승을 비껴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안동의 '만휴정'을 비롯해 '병산서원'과 '하회마을', '묵계서원' 등은 화마 속에서 큰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가유산청과 안동시 등에 따르면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만휴정(경북도 지정 문화유산자료) 일대를 확인한 결과, 건물 일부와 인근 소나무에서 그을린 흔적을 발견했을 뿐, 건물 원형이 변형되는 등의 큰 피해는 없다고 26일 밝혔다.
산불이 북진을 시작하기 전인 25일 안동시와, 경북북부돌봄센터, 소방서 등이 합심해 기둥과 하단 등을 방염포로 감싸는 한편, 정자 주변 계곡과 폭포 등(만휴정 원림)에 물을 뿌린 것이 화마를 이겨낸 비결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포함해 묵계서원(경북도 지정 민속문화유산) 등도 이번 화마에서 원형을 유지해 관계 당국은 물론, 지역민에게 큰 위로가 됐다.
25일 오후 5시까지 고운사에서 보물급 문화재 이송을 돕던 금영섭 씨(58·안동시)는 “보물급 문화재를 품은 천년고찰이 한순간 실수로 시작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한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면서 “아직 산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만큼, 인명은 물론 남아 있는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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