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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형 음악인문학자· 대구챔버페스트 대표 |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무너지던 그때, 수많은 피란민과 예술인들이 대구로 몰려들었다. 행정과 문화의 임시 거점이 된 대구는 뜻밖에도 음악이 살아있는 도시였다. 서울음대 교수와 학생들은 능인중에 임시 거점을 마련해 수업과 연습을 이어갔고, 피아니스트와 성악가들은 북성로의 작은 찻집, 백조다방에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금호강 물처럼 클래식이 흘렀고, 피아노 위에서 쇼팽과 브람스가 연주되었다. 그 시절 한 음악가는 “총소리를 들으며 쇼팽을 치는 건 미친 일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라 말했다. 전쟁은 인간의 신체를 위협했지만,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지켜냈다.
생각해보면, 다방이라는 인간학적 공간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이자, 사유와 현실이 만나는 지점이며, 마음과 사물이 조용히 마주하는 점이지대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리한 뒤, 다시 삶의 무대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피난처이고, 누군가에게는 사색의 방이며, 조용한 연대가 가능했던 공동체의 장이 된다. 그런 백조다방과 결이 다르지만, 같은 마음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있다. 바로 대구아리랑이다.
지역의 예인 최계란이 부르고 만들었다는 이 노래는 대구 사투리로 지어진 특유의 서정성과 현실감, 그리고 이 지역의 지명과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낙동강 기나 긴 줄 모르는 임아/ 정나미 거둘랴고 가실라요/ 공산에 우는 두견 너 무삼일로/ 임 그려 썩은 간장 다녹이노…” 이 노래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노래이자, 무너지는 일상 속에서 버티기 위해 부른 노래, 그야말로 실존의 처절함이 배어있는 작은 승전가이다.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정서는, 1940년 런던의 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독일군의 공습이 매일같이 이어지던 시절,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는 내셔널 갤러리의 텅 빈 전시장 안에서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음악회를 열었다. 바흐와 베토벤이 흐르고, 시민들은 그 음악 속에서 하루를 견뎠다. 음악은 전쟁을 멈출 수 없었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보루이자 방패가 되어주었다. 백조다방과 대구아리랑. 마이라 헤스와 런던의 피아노.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 다른 언어 사이에는 하나의 마음이 있었다. “무너지지 않겠다”는 마음, 그리고 “오늘을 살아내겠다”는 단단한 결의.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불안한 시장 경제와 불협화음의 인간관계, 극으로 치닫는 사회 공동체의 이념과 이익 앞에서 다시 대구아리랑을 떠올린다. 마음의 여유와 쉼을 잃어버린 이에게 음악과 예술은 영원한 동반자이며 꿈이다. 우리를 견디게 하는 온전한 힘은, 결국 음악처럼 조용히 흐르다 어느 순간 삶의 중심을 관통하고 치솟는 하나의 선율에 있다.
임진형 음악인문학자· 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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