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앞쪽의 언어와 뒤쪽의 언어

  •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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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17 06:00  |  발행일 2025-06-16
안도현 시인

안도현 시인

중국의 동북 3성을 한 바퀴 돌았다. 연길, 장춘, 하얼빈, 심양에서 몇 차례 강연 형식으로 조선족 작가들과 학생들을 만났다. 한글로 쓰면 나하고 이름이 같은 안도현 인민정부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백두산 남쪽 등성이로 들어가는 장백현에서는 압록강 건너 코앞의 북한 혜산시를 오래 바라보았다. 혜산과 붙어 있는 삼수군은 시인 백석이 말년에 34년을 살던 곳. 삼수 방향으로 향하다가 압록강변에 도로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강 건너 북한 쪽 농촌은 모내기가 한창이었고 산비탈에는 소가 쟁기로 밭을 가는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 중국은 급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는 새롭게 확충되고 전국의 고속철도는 빠르게 도시와 도시를 잇고 있다. 그럼에도 요즈음 연변의 풍경은 여행자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쓴 각종 선전 구호가 비어 있는 벽을 온통 도배하고 있다. 중국의 꿈을 이룩하고 문명 도시를 건설하자는 선전 구호를 비롯해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강조하는 설치물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조선족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쪽이 유독 심하다.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증거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의 상점 간판 중에 한글로 된 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왼쪽이나 상단에 중국어를 먼저 쓰고 한글 상호는 하나같이 그 뒤쪽이나 하단에 배치되어 있었다. 원래 만들었던 글자를 떼어내 순서를 바꾼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른바 동북공정의 소수민족 동화정책은 연변 인민공원에 세운 조선족 시인들의 시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었다. 어느 대학에 세워진 조선족 시인의 시비는 아예 천막으로 덮어 한글을 가려 놓았다는 말도 들린다. 심지어 한국에서 출간된 책은 2년 전부터 모든 도서관과 서점에서 깡그리 사라졌다. 이 정도면 현대판 분서갱유 아닌가. 중국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우리 정부의 대중 외교 참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조선족 학생들은 중국의 대학입학시험에 응시할 때 한글로 된 시험지를 받아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소수민족 배려 차원에서 시행된 이 정책도 올해가 마지막이라 한다. 중국의 각급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조선어 과목은 대폭 줄어들었고, 연변대학의 조선어문학부는 외국어대학에 속하는 학부로 변경되었다. 우리로 치면 국어국문학과가 외국어대학 소속이 된 것이다. 이러한 강도 높은 동화정책 앞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은 크나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의 명동촌은 더욱 심각하다. '중국조선족유명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큰 빗돌 앞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1917년 명동촌에서 출생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다녔고 1945년 2월 해방 이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 현재의 중국은 1949년에 세워진 국가며 조선족이라는 행정적인 명칭은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한 이후 사용된 용어다. 윤동주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조선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생전에 그는 중국어로 된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윤동주 생가에 가득한 시비에는 중국어로 된 시를 먼저 새기고 그 아래에 마치 번역하듯이 윤동주의 시를 넣어 놓았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가? 앞으로 두근거리며 명동촌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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