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혜경 한동대 부총장
"믿을 사람이 없어요."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믿었다가 다치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경험은 흔하다. 더 큰 문제는 '불신'이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조심성이라 여기고, 관계에 거리를 두는 것을 성숙함으로 착각한다. '믿지 않음'이 곧 '안전함'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건 어리석고 미련한 일처럼 느껴진다.
불신은 어느새 사회의 공기처럼 퍼졌다. 직장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심지어 가족 간에도 "믿는다"는 말보다 "확실한 거야?"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은 흐려졌고, 말은 많아졌지만 책임지는 목소리는 줄었다. 약속은 가벼워지고 관계는 끊기 쉬워졌으며, 공정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손쉽게 소비되었다. 기술은 사람 사이를 더 빠르게 연결했지만, 동시에 더 빠르게 끊어지게도 했다. 천천히 쌓인 신뢰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먼저' 믿는 사람을 기다린다.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믿겠다고 작정하는 한 사람이 공동체를 살리고 관계의 물줄기를 다시 흐르게 한다. 불신이 깊은 시대일수록 신뢰는 더욱 절실한 가치다. 단절과 냉소를 넘어 사람을 믿기로 선택하는 이들이 여전히 곁에 있다는 사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를 버티게 하는 큰 희망이자 위로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7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넬슨 만델라는 복수의 기회를 잡았으나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자신을 감시했던 백인 간수를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했고, 인권 탄압에 가담한 이들에게 진실과 화해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 선택은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결단이었다. 사람에게 희망을 건 만델라의 신뢰는 남아공을 내전의 문턱에서 공존의 공동체로 되돌린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돈을 버는 것은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 한 사람, 신뢰로 세상을 바꾼 인물이 있다.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던 빈곤층 여성들에게 무담보 소액 대출을 시작했다. 가난은 능력 부족이 아니라 기회 부족이라는 믿음으로 사람 안에 숨겨진 책임감과 가능성을 신뢰했다. 1976년, 단 27달러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그라민 은행으로 성장했고 마이크로크레딧 운동을 통해 전 세계 100여 개국에 확산되었다. 모두가 떼일 돈이라 비웃었지만, 유누스는 믿었다. 가난한 여성들이 보여준 높은 상환율과 공동체적 연대감은 신뢰가 곧 자산임을 증명해냈다. 결국 그의 믿음은 2006년,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다.
만델라와 유누스는 증오와 불신이 만연한 세상에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옳은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세상을 바꾼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용기였다. 실망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손을 내미는 일, 바로 그 선택이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는 출발점이 된다. 용기 있는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단절된 사람 사이를 잇는다.
다시 사람을 믿어 보기로 하자. 세상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작지만 단단한 신뢰로 조용히 맞설 수 있다. 믿음이 쌓이면 관계가 되살아나고, 사람들 또한 살아난다. 그리고 어쩌면 "믿을 사람이 없어요"라 말하는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믿을 사람이 되어주는 것, 그게 오늘 당신의 몫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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