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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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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선비문화수련원 6만 번째 수료생 배출
(사)영남선비문화수련원(원장 서상보)은 최근 대구 구암서원에서 6만 번째 수료생 배출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2017년부터 '인성교육 서원에서 길을 찾다'라는 슬로건으로 청소년들의 인성예절교육에 주력한 결과 2022년 5월 6만 명의 수료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3] 中 푸젠성 우이산(武夷山), 바위 절벽과 어우러진 구곡계 협곡…조선 선비의 이상 '구곡문화' 탄생지
중국 푸젠(福建)성에 있는 우이산(武夷山)은 중국 동남지역 최고 산수경관을 자랑하는 명산이다. 중국 10대 명산 중 하나인 우이산은 다양하고 거대한 암봉(巖峰)과 맑고 많은 물이 흐르는 멋진 계곡, 푸른 차밭과 아열대림, 동천(洞天) 등이 어우러진 특별한 절경을 자랑한다. 우이산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채로운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게 된 산이기도 하다.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전에는 남방의 이민족이 살았던 곳으로, 절벽에 매장하는 장례풍속(풍장)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불교와 도교의 자취가 우세했던 곳이었으나,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가 머물면서 유학 강학과 풍류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성리학의 요람이기도 한 우이산은 1999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전설에 따르면, 요임금 시대에 팽조(彭祖)가 이 산의 만정봉(慢亭峯)에 은거했다고 한다. 팽조의 큰아들 팽무(彭武)와 둘째 아들 팽이(彭夷)는 당시 홍수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을 걱정하여 아홉 구비의 물길을 냈다. 이를 구곡계(九曲溪)라고 부른다. 우이산이란 명칭도 팽무와 팽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한다. 한나라 때의 신선인 무이군(武夷君)이 여기에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우이산의 절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봉우리인 천유봉(409m) 정상에는 천유각(天遊閣)이 있다. 이곳에 팽조와 팽무·팽이 상이 모셔져 있다.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천유봉은 하나의 엄청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840개 정도의 바위 절벽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천유봉에 오르지 않고는 우이산을 보았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이산의 최고 명소이다. 이곳을 오르면서 보게 되는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구곡계 협곡은 맑고 풍부한 물과 부드러운 바위 절벽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경을 선사한다. 우이산은 처음에는 도교의 중심지였지만, 불교 또한 함께 발전해 17세기에는 불교가 도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자가 이곳에 정사를 세우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성리학의 요람으로 변하였다. 우이산에는 북송 시대부터 청나라 사이(10세기~19세기)에 지은 35개의 서원(書院) 유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우이산은 무이암차(武夷巖茶)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곳에는 황실의 차 농장이 있었다. 황실에 바칠 차를 생산했다.◆주자와 무이구곡우이산은 조선에서 더 발달한 구곡(九曲)문화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구곡은 말 그대로 산속 계곡의 아홉 구비를 뜻한다. 구곡은 선비(성리학자)들이 자신이 머물던 산수에 경영한 원림(園林)이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상이 녹아있는 정원문화였다 할 수 있다.이런 구곡문화는 주자가 우이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시작됐다. 주자는 이곳에 1183년부터 7년 동안 머물면서, 계곡의 아홉 구비에 이름을 붙이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 주자는 계곡 9.5㎞ 구간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설정하고, 구곡의 풍광과 감상을 담은 무이도가(무이구곡가)를 읊은 것이다. 무이구곡가는 이러 서시로 시작된다. '우이산 위에는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고(武夷山上有仙靈)/ 산 아래 찬 물결은 구비구비 맑도다(山下寒流曲曲淸)/ 그 가운데 기막힌 절경을 알고자 하는가(欲識個中奇絶處)/ 뱃노래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게(櫂歌閑聽兩三聲)'1곡은 승진동(升眞洞), 2곡은 옥녀봉(玉女峯), 3곡은 선조대(仙釣臺), 4곡은 금계동(金鷄洞), 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 6곡은 선장봉(仙掌峯), 7곡은 석당사(石唐寺), 8곡은 고루암(鼓樓巖), 9곡은 신촌시(新村市)이다. 선조대는 선기암(仙機岩)으로 불리기도 한다. 절벽에 매장하는 장례풍속 곳곳 남아 성리학 요람…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홍수 피해 막기 위해 아홉구비 물길840개 절벽 계단 오르면 천유봉 절경옥황상제 딸이 풍광에 취한 옥녀봉높은 암벽·암봉 사이 흐르는 맑은 물36봉 99암의 바위산마다 茶나무 서식 붉은 토양서 자란 '무이암차'로 유명 무이구곡 구간은 대부분 양쪽으로 펼쳐지는 높은 암벽과 멋진 암봉들 사이로 맑고 많은 물이 흘러 탄성을 자아내는 절경을 이룬다. 구비가 많으나 물결은 대부분 잔잔하게 흐른다. 옛날에는 1곡에서 뗏목을 타고 9곡까지 거슬러 올랐다고 하나, 지금은 9곡에서 대나무 뗏목인 죽벌(竹筏)을 타고 1곡까지 내려오면서 유람한다. 걸리는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 관광객이 많아 하루 종일 뗏목이 이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죽벌은 600~700여 명의 사공에 의해 600여 척이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죽벌은 2척을 묶어 6인승으로 운행되며, 죽벌 사공은 앞뒤로 1명씩 있다. 죽벌은 황금 시즌인 5월에는 1주일에 7천~8천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9곡을 향해 1곡인 승진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멀리 대왕봉(大王峯·527m)이 솟아있고, 철판봉(鐵板峯·404m)도 눈에 들어온다. 계곡 위쪽으로는 멀리 2곡의 상징인 옥녀봉(313m)이 멋진 자태를 자랑한다. 앞으로 펼쳐질 절경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옥녀봉은 우이산의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옥황상제의 딸 옥녀(옥녀봉)가 우이산에 내려왔다가, 그 풍광에 취한 데다 대왕(대왕봉)을 만나 천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옥황상제가 철판도인을 사자로 보내 불러오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사자는 술법을 써서 두 사람을 바위로 변하게 한 뒤, 계곡 양쪽에 떨어져 있게 했다. 그리고 서로 보지도 못하도록 그 사이에 병풍바위(철판봉)를 만들어놓았다.2곡 옥녀봉을 돌아 올라가면, 3곡 선조대를 거쳐 점입가경의 절경들이 펼쳐진다. 감탄하다 8곡에 이르면 계곡 주변이 보다 평범해지며, 9곡을 지나면 좌우에 멀리 산이 보이는 평지가 펼쳐진다. 갈수록 골이 깊고 물길도 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곡을 지나면 오히려 평평하고 평범한 계곡이 펼쳐지는 특이한 지형이다.9곡을 지나면 대나무 뗏목들이 늘어선 곳이 나온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뗏목을 타고 1곡으로 내려가면서 절경을 감상하게 된다. 수많은 뗏목이 계곡 사이로 흘러가는 모습도 색다른 볼거리다. ◆무이암차우이산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인 무이암차 또한 유명하다. 우이산의 특별한 풍광은 단하지형(丹霞地形)이라는 독특한 지형 덕분이다. 단하지형은 융기와 같은 내적 요인과 풍화 침식과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붉은색 퇴적층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이러한 경관 속에 아열대 활엽상록수림이 발달하고 많은 종의 식물과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우이산의 지형은 구곡계를 중심으로 36봉(峰)에 99암(巖)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바위산을 토양으로 삼아 곳곳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래서 우이산에 대해 '바위마다 차요 차가 없으면 바위도 없다(巖巖有茶 無巖不茶)'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런 우이산에서 나는 차를 무이암차라 한다.우이산은 사시사철 따뜻한 기온과 높은 습도를 유지하여 차 재배에 적당하다. 골짜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높은 습도를 유지하고 일조량은 적은 덕분에 찻잎이 부드럽다. 또한 붉은색 사암의 토양은 차나무가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땅을 제공한다. 그래서 우수한 품질의 차가 생산된다. 무이암차의 특징은 '암골화향(巖骨花香)' '암운(巖韻)'으로 표현된다. 은은하면서도 무게 있는 향기가 오랫동안 혀끝에서 지속되고, 마신 뒤에도 온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크다고 한다. 독특한 향기와 맛이 있는 무이암차로 육계, 수선, 철라한, 대홍포 등의 품종이 있다. 그 가운데서 대홍포를 최고로 친다. 대홍포(大紅袍)는 향이 특히 그윽하고 특별하며, 맛이 순수하고 맑아 '암차지왕(巖茶之王)'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현재 우이산 절벽에 남아있는 원래 대홍포 차나무는 6그루에 불과하다고 한다.대홍포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우이산을 지나가다 병이 생겨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근처 사찰의 승려가 원숭이를 시켜 절벽에 있는 차를 따서 먹이자 병이 완치되어 무사히 과거를 보게 되었다. 이 선비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을 뿐 아니라 왕의 부마로 책봉되어 공주와 혼인하게 되었다. 부마가 된 그는 은혜를 갚고자 승려를 찾아가 절을 새롭게 단장해 주었다.그런데 어느 날 왕비에게 병이 생겨 천하의 명의를 불러 치료하였으나 완쾌되지 않았다. 이에 부마가 승려에게 차를 부탁하여 왕비에게 먹이자 질병이 완쾌 되었다. 왕은 너무 고마워 자신의 옷인 홍포를 벗어 나무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나 한 나라에 왕은 둘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왕의 옷을 입은 차나무는 점점 말라 죽어 갔다. 이 사실을 안 부마가 왕이 내린 홍포를 걷어내자 차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우이산 천유봉. 바위 절벽이 신선의 손바닥 모양이라 하여 선장암으로도 부른다.죽벌을 탄 관광객들이 가운데 우뚝 솟은 옥녀봉 주변 풍경을 즐기며 유람하고 있다.천유봉에서 바라본 우이산 풍광.수렴동 근처의 차밭 풍경. 우이산 곳곳에 차밭이 펼쳐져 있다.
[동추 금요단상] 연주회장에서…5월의 신록과 음악의 향연
찬란한 신록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금요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프랑스 메츠국립오케스트라 공연이 펼쳐졌다. 비 갠 후 펼쳐지는 신록의 풍광이 떠오르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관현악 선율의 향연'을 누릴 수 있었다.이날 공연은 2019년 12월 이후 2년3개월 만에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리는 세계 정상급 해외 오케스트라 무대였다. 거리두기 없는 객석을 가득 채운, 오랜 갈증을 느껴온 대구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고의 무대였다. 한국 순회공연 중 첫 무대이기도 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도 각별했을 것이다. 특히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자로 나선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지난해 3월 대구 첫 독주회 무대에서 대구에 대해 각별한 호감을 표현한 적 있는데, 관객들과 그런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두 곡을 앙코르곡까지 연주하며 감동의 순간을 선사했다.보기 드문 감동의 무대는 이렇게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도 감응해 도와준다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지난해 8월31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손열음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그랜드홀로 들어가는데, 입구 문 앞에 티켓 한 장을 구한다는 내용이 적힌 A4 용지를 펼쳐 들고 서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스쳐지나 로비 안으로 들어가 티켓을 받았다. 티켓 두 장을 받았는데, 오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못 오게 되어 한 장이 남게 되었다. 입구에 서 있던 여자가 생각났다. 바로 뛰어나가 그 자리에 가보니,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티켓을 주었다. 돌아와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잠시 후 그 사람이 들어왔다.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사연을 물어보았다. 얼마 전부터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는 리사이틀 티켓이 매진된 것을 알았지만, 대구에서 하는 이 공연에 꼭 오고 싶어 혹시 당일 취소하는 티켓이 생길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무작정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생각의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고, 앞서 주문해놓은 그 사람만 다행히 취소된 한 장의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도 자신은 혹시나 싶어 그렇게 계속 기다렸다고 했다. 정말 간절하게 기다렸는데 연주회를 보게 돼 너무 감사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난 2월25일에는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60초 만에 객석이 매진돼 합창석까지 추가 오픈한, 관객들의 기대가 보기 드물게 컸던 연주회였다. 짐머만은 연주회장의 분위기와 관련, 자신의 피아노를 가져다니며 연주하는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다.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휴대폰 전원을 끄는 것은 물론 연주회 안내책자, 핸드백, 휴대폰 등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품을 바닥에 내려놓을 것을 거듭 주문했다. 이렇게까지 정숙 분위기를 요청한 경우는 없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짐머만의 피아노 독주가 시작되었다. 연주도 좋고 집중도 높아 더욱 잘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참 후 안내책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더 크게 들리기는 했지만,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짐머만의 연주회에 대한 엄격한 잣대 덕분에 보다 더 심취하며 감동 받는 연주를 즐길 수 있었다.그가 이렇게 까다로운 것은 보다 완성도 높은 연주를 하고 들려주기 위해서다. 그는 피아노 자체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도 높다. 또한 최신 음향기술, 컴퓨터 공학, 심리학 등에 대한 관심도 높다고 한다.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좋아하는 연주자의 연주회를 감상하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하는 관객과 자신의 연주를 사랑하는 관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의 마음이 어우러져 서로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자리,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되는 순간이 탄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연주회뿐 이겠는가. 우리 삶의 모든 일에 이렇게 서로를 위해 정성을 다할 수 있다면 사람 사는 세상도 더 좋아질 것이다. 하늘도 감동할 것이니.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내부.지난달 29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프랑스 메츠국립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대구콘서트하우스 제공〉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8] 승려 서예가 탄연 "연꽃이 못에서 나온 듯"…12세기 고려 절정의 귀족적 세련미 녹여낸 서풍
탄연(坦然·1070~1159)은 고려의 승려 서예가다. '신품사현(神品四賢)'에 오를 정도의 탁월한 서예가로 당대는 물론, 후대의 서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승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법계를 거쳐 승려의 최고 지위인 왕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왕희지체를 주로 따랐고 안진경의 서체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서체를 형성했다.고려 시대 문인이자 문신인 이규보(1168~1241)는 당시까지의 서예가 중 김생·유신·탄연·최우를 '신품사현'으로 꼽고, 탄연의 글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의 '동국제현서결평론서(東國諸賢書訣評論序)'에 나오는 글이다.'왕사 탄연의 글씨는 행서에 더욱 뛰어났다. 매번 들춰볼 적마다 정채가 찬란히 피어 마치 연꽃이 못에서 나온 듯하고, 가운데에 뼈와 가시를 머금고 고운 살로 가린 듯하다'라고 평한 뒤, 그의 솜씨는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환하기가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듯하고(皎如明月之撥雲)/ 빛나기는 연꽃이 못에서 피는 듯하다(粲若芙蓉之出池)/ 아리따운 여인마냥 약하다 하지마라(非謂脆弱兮如美婦人)/ 겉은 연미한 듯하나 속에는 단단한 힘줄 있네(外若姸媚兮中以筋持)/ 한 점 한 획 제자리에 있으니(一點一劃妥帖得宜)/ 사람 솜씨 아니라 신이 베푼 것이라네(非意所造神者乃施).'밀양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9세에 이미 문장에 능하고 시를 잘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세인 1085년 고려시대 과거시험인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해 이름이 알려졌고, 숙종은 그의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초빙해 세자(예종)의 곁에서 글과 행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먼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1088년 19세 때 궁중에서 몰래 나와 성거산(聖居山) 안적사로 출가했다. 이후 승려로 살면서 1104년에는 승과에 합격, 왕명에 따라 충청도 의림사 주지가 되었다. 여러 승려 직위를 거친 후 1145년에는 왕사에 책봉되었다. 그의 서풍은 12세기 고려 절정의 귀족적 세련미를 녹여낸 것으로, 400년 동안 풍미한 서풍을 대체하면서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주도했다.탄연의 글씨 중 대표작은 1130년에 세워진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碑)'다. 이 문수원중수기비는 고려시대의 진락공 이자현이 문수원(춘천 청평산)을 중수하여 불교를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쳤는데, 그가 별세한 뒤 나라에서 그 삶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앞면은 김부식의 아우 김부철이 글을 짓고, 육순의 탄연이 특유의 행서로 글씨를 썼다. 서체는 왕희지체에 너무도 가까워서 왕희지의 집자비가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뒷면에 혜소가 지은 '제진락공문(祭眞樂公文)'이 있는데, 역시 탄연의 해서 글씨다.이 금석문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조각으로 깨져 그 일부만 동국대박물관에 수습되어 있다.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1148)도 굳센 필획과 유려한 필치가 무리 없이 어우러져 신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이미 왕희지체의 틀을 벗어난 '탄연체'로 평가받는다. 안진경도 탄연의 서풍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데, '운문사원응국사비'는 왕희지를 종주로 삼고 안진경을 본받아 왕희지체의 청경(淸勁)한 품격에 안진경체의 중량이 첨가된 서풍을 드러낸 것이다.문수원중수기와 원응국사비의 서풍은 신라 이후 수용한 왕희지의 행서 서풍을 탄연의 미감으로 녹여내 정립한 것이다. 부드럽고 우아함이 뛰어난 왕희지 서풍에 비해 예리함과 굳셈까지 어우러져 이후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이른바 '탄연체'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탄연의 원응국사비 탁본.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유배지에서 돌아보니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며 산 사람일수록 욕심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다"
많은 봄꽃들이 피고 지는 요즘은 피기도 전에 지는 공직 후보자가 생기는 '인사청문회 계절'이기도 하다.정권이 바뀌어 많은 이들이 고위 공직자 후보로 결정돼 그 자격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들이 어김없이 접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의 지난 행적에 실망하고, 그들이 하는 언행에 분노하기도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청문회 과정이나 그에 앞서 갖가지 부도덕과 불법, 비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실망스러운 점은 그런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며 사과하는 경우는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뻔뻔한 태도와 언행으로 보는 이를 분노케 하는 이들도 있고, 그런 과정에서 국민의 비난 속에 결국 낙마하는 경우도 생긴다.이런 일을 접하면서 실망스러운 마음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많은 국민의 삶을 좌우할 공직을 맡기로 결심한 이들이 왜 그렇게 국민을 실망시키는 언행을 보이게 될까. 이런 일을 당하면서 철저히 반성하고 이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나머지 인생은 보다 부끄럼 없고 행복할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다음 글을 보자.'올해 내가 육십일 세이니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해보면 옛날 어릴 적에는 이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을 보면 바싹 마르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로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팔팔한 소년의 마음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서른 해 동안 세파에 부침하고 고락을 겪은 일들이 번개같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아련히 몽롱하게 꾸는 봄날의 꿈보다도 못하다. 남들 눈으로 보면 나이가 육십을 넘겼고 지위가 정승에 올랐으므로, 나이에도 벼슬에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겪어 온 일들을 점검해 보노라니, 엉성하고 거칠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구나. 평생토록 궁색하고 비천하게 지내다 생을 마친 자들과 견주어 볼 때, 낫고 못하며 좋고 나쁘고를 구분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지금처럼 섬에 갇힌 몸으로 곤경과 괴로운 처지를 당하지 않고, 100세까지 살면서 편안하고 영화로운 복록을 누린다고 쳐보자. 그렇다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저녁볕처럼 가라앉는 시간이 또 얼마나 되겠느냐. 신숙주 어른이 임종을 앞두고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처럼 그치고 마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고 전한다. 그분의 말에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잘못을 후회하는, 죽음을 앞두고 선량해지는 마음이 엿보인다.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몸에 아무 일이 없고,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온전하게 마치는 것은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복력(福力)이다. 다만 굶주림과 추위에 밀려서, 과거를 치르고 벼슬에 오르기 위해 바쁘게 다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편상 그렇게 사는 것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 그 잘못을 꾸짖기도 어렵다.그러나 이제 선친께서 남겨주신 논밭과 집이 있어서, 죽거리를 장만하고 비바람을 막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분을 편안히 지키려 들지 않고, 다른 것을 찾아서 바삐 돌아다니다가 명예를 실추하고 자신에게 재앙을 끼치는 처지에 이른다면, 이야말로 이로움과 해로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전혀 분간할 줄 모르는 짓이다.내가 지어야 할 농사를 내가 지어서 내 삶을 보살피고, 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옛 시에서 말한 '만약 70년을 산다면 140세를 산 셈이다'라는 격이니 어찌 넉넉하고 편안치 않으랴.나도 그런 삶을 살지 못 하고서 네게 깊이 바라는 연유는 방공(龐公)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주려 한 고심과 다르지 않다.'사경(士京) 유언호(1730~1796)가 환갑을 맞은 1790년,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아들에게 부친 편지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잘못을 깨닫는 내용이기도 하다.유언호는 영의정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유배와 복직을 거듭하며 굴곡진 삶을 살았다. 우의정으로 있던 그는 1789년 '조덕린(趙德隣)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되어 3년을 보냈다. 유배지에 위리안치된 채 환갑을 맞으니 각별한 감회가 일었던지, 그는 아들에게 그 심경을 담은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내용 중 '만약 70년을 산다면 140세를 산 셈이다'라는 글귀는 북송의 문학가이자 서화가인 소식(蘇軾)이 아우 소철(蘇轍)에게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하루가 이틀인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이런 식으로 조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늘 매일이 오늘인 듯 느끼게 될 것이니, 일흔 살까지 살 수 있다면 곧 140세를 산 것이 된다. 인간 세상에서 무슨 약이 이런 효과를 가지고 있겠는가'라고 했던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자신의 분야에서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며 부족한 것 없이 산 사람일수록, 욕심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고 분수를 알고 처신하기도 어렵다.살기도 오래 살았고 벼슬도 할 만큼 했으나, 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잘난 것도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내 분수 밖의 일을 탐하지 않고 분수에 맞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런 자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컸을 것이다.편지 내용에 나오는 방공 이야기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방공(龐公)은 중국 동한(東漢)시대에 녹문산에 은거했던 선비인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그는 현산(峴山)의 남쪽에 지내면서 벼슬 추천을 여러 번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중에는 녹문산에 들어가 은거하다 삶을 마쳤다.방공은 부인과 함께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부부가 언제나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중하며 지냈고,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높았다. 제갈량도 그를 매우 존경하며 스승으로 대했다. 그를 방문하면 반드시 침상 아래서 절을 했다. 형주자사 유표(142~208)도 방공을 여러 번 찾아 벼슬을 권유했지만 사양했다. 유표가 한 번은 "선생께서 힘들게 밭을 일구며 관록 받기를 마다하시는데, 후손에게 무엇을 남기시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천하를 다스리려고 권력을 휘두르며) 위험을 남기는데, 이렇게 홀로 있으니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 남기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유표가 "선생은 자신의 몸은 보전하면서 어째서 천하는 보전하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큰 기러기의 집은 빽빽한 수풀 위에 있는데 날이 저물어야 그곳에서 쉬게 되고, 큰 거북은 깊은 못 아래에 구멍을 내는데 역시 저녁이 되어야 그곳에서 잠이 듭니다. 사람의 취사선택과 행동거지도 그 사람의 둥지에 한정될 뿐입니다. 만물은 각자 쉴 곳이 있으니, 천하는 내가 보전하고 말 것이 아닙니다."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자리를 제안 받고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욕심을 자제하고 '은거'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자 힘일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안동 봉정사 영산암의 벽화 '송하문동도(松下問童圖)'(부분). 은사를 찾아온 사람(오른쪽)에게 동자가 스승이 약초 캐러 간 산을 가리키고 있다. 공직 제의를 받을 경우 분수를 알고 거절(은거)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자 힘이 아닐까 싶다.
재즈 마스터스 카부 시리즈 음반 36종 출시
프랑스 만화가이자 재즈 애호가인 카부(Cabu)의 재즈거장 캐리커처 음반 '재즈 마스터스 카부 시리즈' 36종<사진>이 나왔다. 재즈 마스터스 카부 시리즈는 '재즈의 시대'라고 불리는 스윙과 비밥, 그리고 여성 재즈싱어들의 대표곡을 담은 음반들이다. 지난해 4월에 출시된 18종에 이번 18종이 더해져 36종(72CD)으로 출시됐다. 28번의 그래미상 수상자로 거의 모든 음악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종횡무진 활약한 퀸시 존스의 빅밴드 시절의 리더작, 재즈 드러머의 선구자 아트 블레키 재즈 메신저, 재즈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친 바니 케셀, 강력한 스윙과 불꽃의 기교를 지닌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 스윙에서 비밥까지 재즈 피아노의 역사 행크 존스, 흑인음악의 대명사 레이 찰스의 희귀 레코딩을 담은 음반 등 18종이 추가됐다. 20세기 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여성 재즈싱어 50인의 음반 '50 Singing Ladies'에서는 세계 3대 여성 재즈싱어로 불리는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은 물론 숨겨진 여성보컬의 보석을 만나볼 수 있다. 카부(1938~2015)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자 전문 잡지 '샤를리 에브도'의 대표 만화가이며 재즈 애호가이다. 이 잡지는 지면의 대부분을 만평에 할애하는 주간지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 신랄한 풍자로 유명하다. 카부는 이슬람에 대한 풍자 캐리커처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해 죽음을 맞았다.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혜경 경북오페라단 대표, 대통령직인수위 자문위원 위촉
김혜경 경북오페라단 대표(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장)가 최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김 대표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중 윤석열 후보 캠프의 융합예술지원본부장·문화예술지원본부공동본부장·여성지원본부 부본부장으로 활동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우리 겨레와 함께한 진달래, 한라산~백두산까지 물들이는 '민족의 꽃'…산불 난 곳에서도 잘 살아남고 군것질거리가 되기도
봄이 되면 한라산에서 백두산에 이르기 까지 한반도의 산을 연분홍·진분홍으로 물들이는 꽃이 진달래다. 신록이 산을 본격적으로 물들이기 전, 잎보다 먼저 꽃을 피워 산 곳곳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민족의 꽃이다.진달래는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고, '참꽃'이라고도 한다. 두견화라는 것은 중국 이름으로, 두견새가 울 때에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촉나라 망제가 쫓겨나 이리저리 떠돌면서 나라를 그리워하다가 죽었는데, 그 넋이 두견새가 되어 밤새 목에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이때 두견새가 토한 피가 진달래 꽃잎을 붉게 물들여서 '두견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또 진달래를 참꽃이라 한 데 비해, 철쭉은 개꽃이라고 불렀다. '개'는 개꿈, 개소리, 개떡 등의 경우와 같이 흔히 참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접두어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참꽃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고 철쭉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참꽃과 개꽃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진달래와 철쭉은 보통 사람은 구분하기 어렵다. 진달래는 꽃피는 시기가 철쭉보다 이르고, 철쭉과 달리 꽃이 지고 난 다음 잎이 돋아난다. 철쭉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피거나, 꽃과 잎이 같이 핀다. 진달래나무 가지는 매끈하고 연한 갈색이며 가늘다.진달래꽃이 만개하는 시기는 새순이 돋아나 산이 신록으로 물들기 전이다. 덕분에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데도 꽃이 피면, 잎이 나지 않은 다른 나무의 가지들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눈길을 끈다. 먼 곳에서 산을 바라봐도 분홍빛을 띤 꽃무리가 잘 보인다.진달래는 척박한 산성 토양에도 잘 자란다. 그래서 산불이 난 산에서 잘 살아남아 분홍 천지를 만들어낸다. 먹을거리가 없던 50~70년대에는 시골 사람들의 군것질거리가 되기도 했다. 흔하고 식용으로도 쓰인 민중의 꽃이었다.진달래를 이용한 요리로는 화전이 가장 유명하다. 화채나 비빔밥 재료로도 활용되었다. 꽃 자체가 크게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꽃잎을 먹는데, 약간 새콤하고 씁쓸한 맛이 난다. 화전을 부치면 그냥 전병만 부치는 것보다 훨씬 예쁘고 봄 정취가 살아난다.술로 담가 먹어도 맛이 나쁘지 않은 편인데, 이 술을 두견주라고 한다. '규합총서'에 진달래꽃으로 두견주 담그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다. 백미와 누룩, 찹쌀에 꽃술을 제거한 진달래꽃을 넣어 만들었다. 충남 당진의 면천두견주가 옛 명맥을 이어 무형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당진 지역에는 이 두견주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이 병이 들어 몸져눕게 된다. 어떤 명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매일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산신령이 병 나을 방도를 전해주는데, 진달래와 찹쌀로 빚은 술을 마시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복지겸은 두견주를 마시고 병이 나았고, 이때부터 이 지역에서는 두견주를 빚어 마셨다고 한다.김소월의 유명한 시 '진달래꽃'은 진달래를 더욱 사랑받게 만들었다.'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창원 천주산(2) 정상서 맞이한 진달래 군락지…숲 사이로 펼쳐진 꽃밭에 탄성
지난 5일 본 천주산 진달래 풍경도 좋았지만, 꽃들이 더 많이 핀 모습을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천주산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풍광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더없는 선물이 될 것 같기도 했다.근처 진동에서 자고 지난 10일 일요일 아침에 천주산으로 향했다. 전날 진동의 봄바다를 보며 숯불구이 붕장어·곰장어를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 장어는 처음이었다. 최고의 맛이었다.진동을 출발해 오전 10시쯤 천주산 아래 도착했다. 그런데 달천계곡 쪽으로는 아예 진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계속 국도를 따라 가며 차 세울 곳을 찾다가, 결국 북창원 IC로 진입하게 돼 그 입구 길가에 주차했다. 달천계곡 진입로 주변 10리 정도의 차도 양쪽에는 주차해놓은 승용차들로 가득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달천계곡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 천주산 정상 주변을 비롯해 능선 아래 몇 군데 진달래 군락지가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 능선 곳곳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진입을 통제하던 도로에 들어서 조금 가니, 왕복 2차선 도로가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이 엇갈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달천계곡 주자창에 가까워지자 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길가 주차 차량 사이로 줄을 잇고 있었다. 주차장은 오전 6시에 벌써 만차가 되었다고 했다.인파를 따라 더위와 먼지 속에 일행과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다. 5일과는 반대 코스로 올랐다. '만남의 광장'을 지나서는 진달래 꽃길과 진달래군락지가 보이는 숲길이 펼쳐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숲길을 계속 걸었다. 마침내 정상 주변 최대 진달래 군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눈에 들어왔다. 숲 사이로 불타는 듯한 진달래 꽃밭이 펼쳐졌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말을 잊게 하는 풍광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느긋하고 한가하게 즐길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 들어왔다. 잠시 둘러본 후 뒤로 물러 나왔다.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감동의 탄성을 지르며 전망대에 올라갔다.아직 진달래 전체가 만개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분홍빛은 더욱 짙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멋진 진달래 군락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곳 진달래 군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진달래 군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누구나 많이 불러봤을 동요인 '고향의 봄'(작곡 홍난파)이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작사한 동요인데, 이 동요 속 진달래의 무대가 바로 창원 천주산(해발 639m)이라고 한다. 산 아래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원수(1911~1981)는 천주산과 그 일대에서 피어난 봄꽃들을 보면서 '고향의 봄'이란 동시를 지어, 1926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했다.◆유명 진달래 군락지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산으로는 창원 천주산을 비롯해 여수 영취산, 거제 대금산, 밀양 종남산, 창녕 화왕산, 대구 비슬산, 강화 고려산 등이 있다. 비슬산(琵瑟山·1천83m)은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지는 대표적 진달래 명산이다. 비슬산은 정상부를 거대한 수직 암벽이 받치고 있는 듯하다. 이 모습이 신선이 내려와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비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정상부가 웅장하다.정상에서 북쪽으로는 능선이 앞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조화봉과 대견사지로 이어진다. 능선에 키가 큰 나무가 별로 없어 초원 같이 시야가 탁 트이며 장쾌하다. 이 능선에 가을이면 억새,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한다.비슬산 정상부에 진달래 군락이 펼쳐진다. 대견사에서 988봉에 이르는 산자락 30여만 평에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988봉 부근 능선 오른쪽은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진달래가 밀집해 있다. 비슬산 진달래 군락은 다른 산들의 진달래 군락지보다 고지에 있어, 진달래 명산 중 가장 늦게 핀다. 보통 4월 중·하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올해는 이제 절정을 지났지만, 지금도 막바지 절경을 선사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천주산을 찾은 사람들이 전망대에 올라 정상 주변 진달래 군락을 즐기고 있다.(2022년 4월10일)천주산 정상 아래쪽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진달래 군락 풍경.(2022년 4월5일)천주산 진달래 풍경. '만남의 광장'을 지나 정상(용지봉)으로 오르다 보이는 모습인데,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용지봉이다.(2022년 4월10일)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창원 천주산(1)...진달래 피는 산 능선마다 분홍빛 바다
올해 4월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4월 초순을 전후해 전국의 산 곳곳을 자줏빛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진달래 덕분이다. 경남 창원 천주산의 진달래 군락을 보고 온 것이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천주산 정상 북편 산비탈 수십만 평 전체가 일시에 불타고 있는 듯한 진달래꽃 천지를 잊을 수 없을 듯하다.옛날부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해 온 진달래꽃을 소개하고 싶었다. 유명 진달래 군락지를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고, 그중 창원 천주산을 선택했다.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사진들만 봐도 대단할 것 같았다.그곳 진달래 개화 소식을 계속 확인했다. 지난해는 예년보다 빠른 3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4월 초에 만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3월 말부터 계속 점검하다, 꽃이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할 것 같은 4월5일 가보기로 했다. 평일로 날을 잡았다. 진달래꽃이 만개했을 때, 그리고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5일 오전 대구에서 창원으로 향했다. 청도와 밀양을 거치는데, 차창 밖으로 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진달래가 활짝 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바위 절벽 위에 분홍 진달래가 핀 모습이 특히 예쁘고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표적인 진달래 풍경으로 남아있는 모습이기도 하다.높은 절벽 위의 진달래꽃 모습을 보니 향가 '헌화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신라 경덕왕 때 일이다.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중, 수로부인이 동해안의 천길 절벽 위에 핀 진달래꽃을 보고 누가 꺾어주기를 원했다. 일행 중 누구도 나서지 못했는데, 마침 암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헌화가를 부른 뒤 절벽 위로 올라가 진달래꽃을 꺾어 바쳤다. 헌화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천주산 달천계곡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다행히 딱 한 대 공간이 남아있었다. 주차장 주변은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산행을 시작해 조금 올라가니 진달래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 아래쪽 진달래는 벌써 활짝 핀 모습이었다. 올라갈수록 개화 정도가 덜했다. '함안경계'를 지나는, 정상으로 바로 가는 코스로 올라갔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니 연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정상(용지봉)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도 설레기 시작했다.정상 아래 진달래 전망대에 오르니, 분홍 진달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산비탈 경사가 심한 편이라 정상 쪽에서는 진달래 군락 전체를 조망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전망대마다 다른 진달래 풍경이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했다. 정상 주변은 햇볕을 많이 받아서인지 다른 곳보다 많이 핀 편이었는데, 20~30% 개화한 듯했다. 이곳 진달래 군락은 그 밀집도가 보기 드물게 높다. 2m가 넘는 진달래나무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 사람은 길이 아닌 곳에는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잡목도 하나 없다. 그런 군락 자체가 대단해, 그 정도만 피었는데도 장관이었다. 올라온 길 반대쪽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며 진달래 풍경을 감상했다. 평일이고 개화가 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부산, 안산, 대구, 구미, 대전 등 곳곳에서 찾아왔다고 했다.계속 내려가 군락지 끝자락에 마련해놓은 전망대에 올랐다. 이곳부터 정상 쪽으로 진달래 군락지가 광활하게 펼쳐지는데, 군락지의 70% 정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주산 진달래 군락지 중 최대 규모다. 이 전망대 앞쪽은 햇빛이 늦게 드는 구역이라, 개화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멀리 정상 부근에 피기 시작한 진달래, 앞쪽의 곧 터뜨릴 수많은 분홍빛 꽃봉오리, 옅은 갈색 진달래 나무줄기의 빛이 어우러진, 파스텔 톤의 오묘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풍광이었다.진달래꽃이 더 개화하면, 만개하면 어떤 분위기일까 상상해봤다. 약간의 아쉬움을 두고 산을 내려왔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창원 천주산(2)에서 계속됩니다.창원 천주산 정상 부근의 진달래 군락지 모습(2022년 4월5일·작은 사진)과 5일 후 다시 찾아간 진달래 군락지. (2022년 4월10일)
아프리카와 쿠바의 탯줄을 잇는 음악 '쿠바프리카' 음반 발매
카메룬 출신의 아프로소울(afro-soul) 음악 거장 마누 디방고 (Manu Dibango)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멤버들이 함께한 '쿠바프리카(CUBAFRICA)' 음반<사진>이 LP로 발매되었다. 쿠바프리카는 아프리카와 쿠바를 잇는 음악이다.앨범 '쿠바프리카'는 1996년 봄에 프랑스 남부 알비(Albi) 페스티벌에서 헤드 라인을 장식한 '아프리카의 거장' 마누 디방고와 '쿠바음악의 살아있는 엔진'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의 만남에서 탄생한 음반이다. 룸바에서 볼레로, 맘보에서 차차차·살사까지 흥이 넘치는 아프로쿠반 음악의 정수를 들려준다. 아프로쿠반 음악은 17세기 암흑의 시대에 노예로 팔려 온 아프라카인, 그리고 남미의 음악이 혼합하여 발전한 쿠바의 음악이다. 디망고의 소울 넘치는 색소폰, 오초아의 중후한 보컬과 남미식 기타인 쿠아트로, 그리고 캄보밴드 쿠아테토 파트리아(Cuarteto Patria)의 빈티지 사운드가 완벽하게 녹아든다. 마누 디방고는 카메룬 출신의 아프로소울 음악의 거장으로, 지금까지 50여 장의 음반을 출시한 작곡가이자 섹소폰 연주가다. 2020년에 코로나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 음반은 2021년 6월 마누 디방고를 추모하며 파리에서 '레코드 스토어 데이' 골드컬러반 LP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2]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중세도시로 떠난 시간 여행…거대하고 섬세한 대성당에 경이
얼마 전 TV 뉴스를 시청하던 중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가 언급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군 포격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의 상황과 관련한 뉴스였다. 여러 구호단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와 구호품을 르비우에 전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중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한국계 난민 구호단체 사람들이 르비우에 들어가 음식과 생필품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승합차에 고기와 소시지, 커피 등 800kg을 싣고 1천500㎞를 달려 르비우에 도착, 피란민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다.한편 뉴스를 보며 몇 년 전 스트라스부르를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트라스부르는 2015년 봄 독일 몇몇 도시를 여행하다 찾아가 잠시 둘러본 도시인데, 매우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스트라스부르는 작은 도시이지만, 오래된 역사와 각별한 사연을 품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입법기구인 유럽의회가 있는 도시인 점이 말해주듯이 현재도 유럽의 중요한 도시이면서, 과거 중세의 모습도 잘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의회를 비롯해 유럽평의회, 유럽인권재판소, 유럽학교, 유럽과학재단 등 유럽연합 관련 기관 20여 개가 있다. 유럽의회의 소재지가 이곳인 이유는 전후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상징으로 독일과 접해있는 프랑스의 이 유서 깊은 도시가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길'을 뜻하는 독일어 '스트라세(Straße)'와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Bourg)'를 더해 만든 이름인 스트라스부르. '길의 도시'라는 뜻처럼 스트라스부르는 실제 유럽 각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음식, 언어, 문화 등에서 독일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라인강과 일강 사이에 있는 북부 라인강 평야의 비옥한 이 지역은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스트라스부르는 원래 켈트족 마을이었다. 로마인 지배 때는 아르젠토라툼이라는 수비대 마을이었고, 아르젠토라툼은 기원전 12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이를 기점으로 1988년, 2천 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도 했다.17세기까지는 독일에 포함된 지역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도시였다. 17세기 프랑스가 30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리품으로 알자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면서 스트라스부르도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이 알자스 로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일 때마다 스트라스부르의 주인도 계속 바뀌었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다시 독일 땅이 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49년 만에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17세기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정책적으로 독일어 사용을 억제하고 프랑스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역민 대다수는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인 프랑스어 교육으로 프랑스어가 많이 보급되었다. 현재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다. 주민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독일어에도 능통하지만, 그 비율은 점점 적어지고 있는 추세다.그리고 이곳은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을 발명, 금속활자 성경책을 처음으로 찍어낸 것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살면서 활동하던 곳이다. 그래서 구시가지에 그의 동상이 있는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인쇄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시가지 중 오랜 역사를 품은 유적지와 옛 건축물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랑딜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됐다. 그랑딜은 일강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섬 지역이다.◆스트라스부르 대성당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구시가지에 있는 성당으로, 정식 명칭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Notre Dame)은 '성모마리아'를 뜻한다. 빅토르 위고가 극찬한 이 성당은 1176년에 건축을 시작해 1439년 완공됐다. 첨탑 부분의 높이는 142m에 달한다. 이후에도 1880년까지 증축을 거친 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00여 년의 긴 세월을 거치며 완성된 성당은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근처의 보주산맥에서 채석한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붉은 빛이 나는 이 성당은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주위에서는 한꺼번에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웅장한 규모, 섬세하고 화려한 외관 장식 및 조각들이 우선 압도하며 눈길을 끈다. 보통 고딕 양식 성당들은 첨탑 2개가 대칭 구조를 이루는데 이곳은 첨탑이 하나뿐이다. 첨탑 건축 당시 경제적인 이유로 하나밖에 못 지었다고 한다. 정교하게 조각된 입구와 하나뿐인 탑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비대칭이다. 빅토르 위고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대해 '거대하고 섬세한 경이'라는 표현을 했다.내부도 외부 못지않게 웅장하고 화려하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거대한 천문시계(天文時計:천문 관측용 정밀 시계)도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1771년 학업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 온 21세의 괴테는 이 시계를 보고는 "웅장한 모습에 내 혼이 진정되었고, 세세한 모습을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구분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했다.중세의 대표적 천문시계 중 하나인 이 시계는 이자크 하브레히트(1544~1620)가 1574년에 처음 만들었다.성당 내부 3층 높이 석조 구조물 안에 설치된 천문시계는 정오가 되면 퍼포먼스를 펼친다. 종이 울리고 인형들이 움직이며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첫 번째 무대는 한 손에는 낫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인간의 뼈를 든 죽음의 인형이 15분 간격으로 종을 친다. 종소리에 맞춰 귀엽고 통통한 소년, 청년, 군복을 입은 남자, 가운을 입은 노인이 그 앞을 지난다. 인간의 삶의 여정이 덧없고 무상함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적인 모든 것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 맨 위쪽 무대가 돌아가며 12사도 인형이 지나가고 예수의 형상이 나타나 시간을 알리던 죽음의 신을 몰아낸다. 이 성당의 원래 천문시계는 18세기 후반에 작동이 멈춰 철거되고, 현재의 것은 19세기에 만든 복제품이라고 한다.◆옛거리 '쁘띠 프랑스''작은 프랑스'라는 뜻의 쁘띠 프랑스 구역에서는 여러 개의 운하와 16~17세기에 지어진 전통 목조주택 등이 있는 잘 보존된 오래된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좁은 거리에 다양한 식당과 가게, 카페 등이 즐비하다.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인 그랑딜의 서쪽 지역인 쁘띠 프랑스는 400여 년 전에 조성된 마을이다. 이곳은 일강으로 통하는 수로들이 있는데, 당시 물과 관련된 어부, 물방앗간 운영자, 제분업자, 가죽공방 장인 등이 주로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이 거리는 특히 물가를 따라 늘어선, 하얀 벽과 검은색·갈색 나무 골조가 어우러진 전통 목조주택들이 인상적이었다. 4~5층 건물이 대부분인데, 건축 연대가 표시되어 있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300년~400여 년 전의 주택들로, 독일식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1572년에 지어진 테너스 하우스가 대표적인데, 지금은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다.이 목조주택들을 살펴보니, 우리 한옥과는 구조나 장식 등이 매우 달랐다. 기본적으로 다층 건물인 데다 지붕도 다르고, 우리와 달리 벽체 뼈대를 이루는 나무 골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점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한옥이 문살에 꽃살문, 격자문 등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는데, 이 건물은 벽체 나무 골조 자체를 다양한 모양으로 많이 사용해 멋을 부리고 있었다. 나무 골조 사이를 흙으로 메운 벽을 근간으로 만들어, 해체와 조립이 용이하다. 그래서 부동산이 아닌 동산으로 분류되고, 땅 주인과 건물주가 달라 건물만 사서 다른 곳으로 옮겨 조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현재 내부 리모델링 외에는 일체의 다른 공사를 할 수 없도록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첨탑이 있는 건물 부분. 142m나 되는 높이에다 전체의 건물 규모도 너무 커서 주위에서는 전체를 담을 수가 없을 정도다.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천문시계의 맨 아래 왼쪽 부분. 쇠창살 문 안에 있다.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하나.스트라스부르 쁘띠 프랑스의 독일식 목조주택 거리 풍경. 왼쪽 건물이 1572년에 건립됐다.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7] '서선(書仙)' 소식
소식(蘇軾·1037~1101)은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송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이기도 하다. 황정견, 미불, 채양과 함께 북송 4대 서예가로 꼽힌다.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학자, 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쓰촨성 출신으로 호가 동파(東坡)다. 소식이란 이름보다는 소동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장가로 뛰어나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린다. 세 사람 모두 당나라와 송나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어간다.황정견은 소식의 글씨를 평하면서 "송대에 제일가는 서예가는 마땅히 소식"이라고 말했다. 금나라 서예가 조병문은 "그의 글씨는 안진경과 같아 생동감이 있으면서 운치가 뛰어나고, 법도에서 새로운 뜻이 나와 호방함 밖에서 묘한 이치가 깃들어 있으니 가히 서선(書仙)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소식은 초기에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를 배웠다. 특히 왕희지의 '난정서'에 주력했다. 중년에는 안진경 등의 좋은 점을 흡수한 뒤 다시 위진 시대의 졸박하고 두터운 풍격을 결합해 자신의 서체를 개척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굳세고 호방한 그의 글씨는 위진시대나 당나라 서체의 풍격과도 달라 '소체'라 불리기도 했다.소식은 자신의 글씨에 대해 스스로 "마치 부드러운 솜으로 강한 철을 싸맨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의 글씨에 대해 청나라 오덕선은 "소식의 필력은 웅장하고 호방하면서도 표일한 기운이 하늘로 뻗쳐 있기 때문에 살이 찌더라도 속되지 않다"라고 평했다.소식의 작품으로는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이 제일 유명하다.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를 짓고 직접 행서로 쓴 작품이다. 거리낌 없는 필체로 그의 품성과 기개를 잘 보여준다. 동기창은 소식의 이 작품에 대해 "내가 평생 소식의 진적 30여 권을 보았는데 이것이 단연 제일"이라고 말했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안진경의 '제질고(祭姪稿)'와 함께 '천하 3대 행서'로 꼽히기도 한다.이 시첩에 황정견이 짓고 직접 글씨를 서 붙인 발문이 또한 유명하다. 발문의 내용 중 일부다. '동파의 시는 이태백과 흡사해 마치 이태백이 이곳에 온 듯하다. 이 글씨는 안진경, 양응식, 이건중의 필의를 겸한 것 같다. 동파의 글씨를 다시 써보지만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다음에 동파가 내 글씨를 보면 아마도 부처님이 안 계신 곳에서 높은 척을 한다고 웃을 것 같다.'소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인 '신법(新法)'에 반대, 1071년 지방관으로 전출되어 항저우(杭州)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항저우에서 그는 서호(西湖)에 둑을 쌓아 침수를 막았는데, 지금도 '소제(蘇堤)'로 남아 서호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요리를 좋아했던 그가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주곤 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 요리가 지금까지 전해지며 사랑받고 있는 '동파육'이다.소동파는 천성이 자유로운 예술가였으며 또한 일반 백성들을 위하고 가까이 했다. 그 후 하이난(海南)으로 유배돼 7년 동안 귀양살이 후 귀향하다 별세했다.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소식 자신이 시를 짓고 글씨로 쓴 '황주한식시첩'(부분).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게딱지 집…"게딱지만한 집에 살아도 안빈낙도 즐길 수 있으면 누구보다 행복한 삶 누려"
게의 등딱지인 게딱지는 집이 작고 허술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크고 화려한 고대광실에 살면 더 행복할까. 게딱지만 한 집에 살면 불행할까. 소암(疎庵) 임숙영(1576~1623)의 '게딱지집 기문(蟹甲窩記)'을 소개한다.'집 가운데 게딱지집보다 더 큰 곳이 없고, 구름 위로 솟은 고대광실이 오히려 작은 법이다. 이른바 구름 위로 솟은 집이라 한 것은 부귀한 사람의 집이 아니겠는가. 높은 곳은 다락이라 하고, 밝은 곳은 거실이라 하며, 평평한 곳은 뜰이라 하고, 트인 곳은 정원이라 한다네. 그 안을 구획하여 첩을 숨겨두고, 그 한 귀퉁이를 따로 두어 빈객을 머물게 하며, 그 바깥을 덜어내어 하인들을 거처하게 하지. 이러한 곳은 깊숙한 대저택이라 하지. 이곳에는 수만명을 들일 수 있을 뿐이 아니라네.구름 위로 솟은 집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천 칸·만 칸을 차지하더라도 작은 것에 불과 즐길 바는 작지 않으니 무엇을 한탄하겠는가그런데도 거주하는 사람들은 조바심을 내고 스스로 불만스러워하면서 더욱 집을 넓혀서 크게 하고자 하지. 그렇다면 비록 서울의 땅을 다 차지하여 집터로 삼고, 농촉의 산을 다 차지해 재목을 댄다 하더라도 아마 스스로 불만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할 것일세. 그러므로 천 칸·만 칸의 큰 집이라 하더라도 이미 스스로 불만스러워한다면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큰 집을 두고도 스스로 불만스러워한다면 큰 것이 아닌 법이라네. 천 칸·만 칸의 집에 스스로 불만스러워하는 경우를 보면 부귀를 차지한 자들이 거의 다 그러하다네. 이 때문에 구름 위로 솟은 집은 높다랗게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불만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크다고 하지 않고 작다고 한 것이라네.'임숙영은 이어 게딱지만 한 집은 매우 작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살면 작지 않고 오히려 큰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대개 천하의 사물이 크거나 작거나 관계없이 사람이 만족스러워하면 비록 작더라도 또한 크게 느껴지고, 사람이 만족스럽지 못하게 생각하면 비록 크더라도 또한 작게 여겨지는 법이라네. 저 게딱지집은 집 가운데 지극히 조그마한 것이요, 구름 위로 솟은 집은 집 가운데 지극히 큰 것이지. 그러나 게딱지집이 사람에게 만족스럽고 구름 위로 솟은 집이 사람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내가 집 가운데 게딱지집보다 더 큰 곳이 없고, 구름 위로 솟은 고대광실이 오히려 작은 법이라고 말한 것일세.또 자네는 달팽이 촉각 위 왼쪽과 오른쪽에 만국(蠻國)과 촉국(觸國)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장자'에 달팽이 두 촉각에 만국과 촉국이 있어 두 나라가 전쟁을 하여 시신이 백만을 헤아렸다는 고사가 있다) 사물 중에 이보다 더 작은 것은 없지만, 그런데도 여기에 나라를 둘이나 들일 수 있었다지. 조그마한 게딱지가 달팽이 촉각 정도는 아니요, 큰 집 하나의 크기가 두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라네. 달팽이 촉각 위에 두 나라를 들일 수 있다면 유독 게딱지 안에만 집 하나를 들일 수 없겠는가. 게딱지는 달팽이 촉각에 비한다면 그래도 큰 편이지 않은가.또 비록 게딱지집에 사는 것이 괴롭다 하더라도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치르는 것보다야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 예전에 굴원(屈原)이 강가로 쫓겨나서 집을 구하려 하였지만 결정을 할 수 없어서 최후에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고, 그 뼈를 물고기 뱃속에다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네. 이제 자네도 또한 쫓겨난 신하가 아닌가. 게딱지도 또한 물고기 뱃속과 같은 종류라네. 그런데 굴원은 목숨을 잃고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치렀고, 자네는 게딱지집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않은가.이러한데 자네가 바라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어찌 게딱지집이 작다고 말할 겨를이 있는가. 자네는 이곳에서 눕고, 이곳에서 기거하고, 이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지. 들어가서 마음대로 못할 것이 없으니 그만하면 좋은 것이라네. 자네가 머물고 있는 집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즐길 바는 작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는가.사물은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알 수 있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알 수 있는 법이라네. 조그마한 게딱지집 역시 크게 여길 때가 있다네. 자네는 어찌 예전 살던 집처럼 여기지 않는가. 예전 자네가 살던 집 또한 좁았겠지만 그래도 게딱지집에 비한다면 클 것일세. 이를 가지고 본다면 자네가 예전 살던 집처럼 여기게 될 날도 그리 머지 않을 것일세.'위 글에서 '농촉'은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사람이 만족을 모르면 농나라 땅을 평정하고 나서도 다시 촉나라 땅을 바라본다'라는 글귀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족을 모른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이 '해갑와기(蟹甲窩記)'는 임숙영이 1621년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을 당하여 경기도 광주의 용진(龍津)에 물러나 살고 있을 때 지은 글이다. 당시 그의 벗 이명준(李命俊) 역시 벼슬에서 쫓겨나 경상도 영해 땅에 유배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유배객이 되어 게딱지만 한 좁은 집에 살게 된 이명준을 위로하며 지은 것이다.아무리 큰집이라도 만족 모르면 부족할 것이고 초가삼간이라도 욕심이 없으면 대궐보다 넉넉 소암 임숙영이 좁은집서 유배생활하는 벗 위로 이명준이 영해 바닷가로 유배를 온 후 머물 집도 없는데다 풍토와 기후가 맞지 않아 오래 고생한 다음에야 거처 하나를 겨우 마련하게 되었다. 그 집이 조그마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해갑와(蟹甲窩)'라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그 기문을 지은 것이다.임숙영은 1611년 별시문과 시험장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했다. 이를 시관 심희수가 좋게 보아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임숙영의 글을 보고 크게 노하며 이름을 삭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몇 달간의 삼사(三司) 간쟁과 이항복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 후 한동안 벼슬생활을 했다.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한다. 아무리 큰 집이라도 만족을 모르면 부족하다 할 것이고, 초가삼간이라도 욕심이 없으면 고대광실보다 더 넉넉할 수 있는 것이다. 유배지의 게딱지만 한 거처에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길 수 있었다면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게티 이미지 뱅크〉게딱지만 한 집에 살아도 어떤 크고 화화로운 집에 사는 이보다 행복할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다 본 주유소 천장에 지은 제비집이다.
[동추 금요단상] 전선에 보도블록에 고통받는 도시 가로수
온갖 초목이 충만해진 봄기운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각기 타고난 성품대로, 모습대로 꽃을 피우고 신록을 펼쳐내고 있다. 덕분에 화사하고 싱그러운 봄천지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봄날 천지에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가지나 뿌리가 온전함을 유지할 수 없는, 그 '고통'이 느껴지는 살풍경의 도시 가로수들이다. 밑둥치와 뿌리 부분은 시멘트나 쇠로 만든 족쇄가 꽉 죄고 있다. 나날이 해마다 자라나지만 족쇄에 맞춰 수시로 잘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가지는 전선을 비롯한 온갖 선을 위해 크든 작든 일정 범위 밖은 무조건 잘린다. 빠르게 성장하는 나무일수록 빨리 이런 고통을 당한다. 그러니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는 온전한 생태를 유지할 수가 없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나무 모습이 아니다. 성장할수록 그 모습은 더욱 기형적으로 된다. 잎이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살풍경한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이런 가로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인간의 손에 이끌려 와 '생지옥'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가로수들이다. 그런 대표적인 가로수가 플라타너스다. 플라타너스는 빨리 잘 자라고, 30~50m까지 크게 자란다. 이런 나무인데도 가로수가 되면 5m나 10여m 이상 자랄 수가 없다.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고, 아래위가 볼썽사나운 '괴물'로 관리된다.도로의 여건이 괜찮아 잘 관리되고 있는, 볼만 한 플라타너스 가로수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지 못해 살풍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도 적지 않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모든 가지가 몽당 빗자루처럼 일정하게 잘린다. 새 가지와 잎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여름이 되면 한 번 더 가지치기를 당하기도 한다.이런 가로수는 보기가 흉할 뿐만 아니라 관리 비용도 많이 든다. 뿌리와 밑둥치는 왕성한 힘으로 차도·보도 경계석이나 보도블록을 들어 올리기 때문에 수시로 뿌리를 제거하고 경계석과 보도블록을 새로 정비해야 한다. 도로의 여건상 임계치에 거의 도달한 가로수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은행나무 가로수도 오래된 것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된다. 가로수를 이렇게 관리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인간의 편리만 생각하고 가로수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로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가로수를 도로 환경에 맞춰 무자비하게 다룰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로수가 우선이 되면 좋겠다. 가로수를 심을 때도 그 환경을 고려해 신중하게 수종을 정하고, 50년이나 100·200년 후를 생각해 심을 자리를 정해야 한다. 살풍경한 가로수는 계속 그대로 관리할 것이 아니라 제거해 버리고 수종을 교체하거나 작은 관목 위주의 화단으로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의산잡찬(義山雜簒)'에서 살풍경(殺風景)의 예로 든 것 중에 이런 것이 포함돼 있다. '꽃 아래서 옷을 말리는 일(花下쇄곤)' '이끼 위에 돗자리를 까는 일(苔上鋪席)' '시선 가린다고 수양버들 가지를 잘라버리는 일(斫却垂楊)' '소나무 숲에서 길 비키라고 소리 지르는 일(松間喝道)' '달 아래서 횃불 드는 일(月下把火)' 등이다. 이상은이 위에서 언급한 가로수를 보았다면 살풍경의 첫 사례로 꼽았을 것이다. 최근 출근길에 재개발 사업으로 아파트 건축이 진행되는 곳 일대의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제거된 현장을 보았다. 속이 시원했다. 이런 경우라도 많이 생겨 살풍경한 가로수들이 빨리 없어지면 좋겠다. 도시에는 시민들이 항상 접하게 되는 수많은 가로수가 있다. 이 가로수만 멋지게 잘 관리해도 도시의 품격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가로수를 심을 때도 그 환경을 고려해 신중하게 수종을 정하고, 50년이나 100·200년 후를 생각해 심을 자리를 정해야 한다.대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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