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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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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연꽃(1) 천년 전 모습과 그대로… 연밭에 핀 순수의 결정체
'본래 흙먼지 기질이 아니라서(本無塵土氣)/ 스스로 구름 비치는 물에서 자라네(自在水雲鄕)/ 곱고 선명하여 닦은 듯 정결하고(楚楚淨如拭)/ 높이 쭉쭉 뻗어 묘한 향기 내는구나(亭亭生妙香).'중국 원나라 때 여류시인 정윤서(鄭允瑞)의 시 '연(蓮)'이라는 작품이다. 연의 성품을 잘 담아내고 있다. 연은 흙먼지 이는 땅이 아니라, 하늘의 구름이 비치는 연못이 고향이다. 잎은 언제나 씻고 닦은 듯 깨끗하고 푸르다. 꼿꼿하게 위로 뻗은 꽃대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맑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이러한 연이 있는 연밭은 오랜 옛날부터 청춘남녀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을 나누는 최적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런 풍경을 담은 '연밥 따는 노래(採蓮曲)'가 적지 않게 전한다. 먼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채련곡(採蓮曲)'이다.'약야(若耶) 개울가에 연밥 따는 저 아가씨/ 웃으며 연꽃 너머로 얘기 나누네/ 새로 단장한 모습 햇살 받아 물속까지 밝고/ 향기로운 옷소매 공중에 나부끼네/ 언덕 위에는 누구 집 한량들인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버들 사이로 어른대네/ 자류마는 울면서 떨어진 꽃 사이를 지나다가/ 이를 보고 머뭇머뭇 공연히 애태우네.' 아가씨들은 연꽃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말 탄 젊은 한량들은 버들 그늘 사이로 아가씨들을 기웃거린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한량들이 타고 가는 말들이 애태우고 있다며 이백 특유의 낭만과 유머를 보여주고 있다.조선 시대 문신이자 시인인 신흠(申欽)은 이런 한시 '채련곡'을 남겼다.'동쪽 마을 아가씨 버선도 신지 않고/ 서리 같은 하얀 발로 시내를 건너네/ 시냇가에서 노 흔드는 이 누구 집 총각인고/ 연꽃 꺾어 주고 웃으며 얘기 나누네/ 배를 타고 어디론가 함께 갔는데/ 별포(別浦)에서 원앙 한 쌍 놀라서 날아가네'연밭에서 아가씨와 총각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요즘은 연밭을 찾은 이들이 사진 찍느라 바쁜 풍경이 펼쳐지지만, 꽃을 피운 연의 모습은 1천 년 전이나 다름없다.연꽃 가득 핀 연못을 몇 군데 둘러봤다. 함안군이 '아라홍련'을 테마로 조성해 2013년 여름에 개장한 경남 함안 연꽃테마파크도 찾아갔다. 이야기로만 접했던 '아라홍련'을 직접 한번 보고 싶었는데, 무더운 날씨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연꽃들이 가득 피어난 드넓은 연밭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관람객이 찾아 다양한 연꽃을 즐기며 더위를 잊고 있었다. 2009년 5월 함안 성산산성에서 연꽃 씨앗이 출토되었는데, 연꽃 씨앗은 분석 결과 700여 년 전 고려 시대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듬해 함안박물관이 이 씨앗을 파종해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정성을 다해 키운 끝에 7월에 꽃을 피우는 데도 성공했다. 700년 만에 꽃을 다시 피운 것이다. 함안군은 이곳 함안지역이 본래 옛 아라가야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아라홍련'이라 명명했다.고려 시대 연꽃인 '아라홍련'은 7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면서 지금의 다양한 연꽃으로 분화되기 이전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나라 고유 전통 연꽃의 특징을 확인해 주고 있다. 꽃잎은 하단은 백색, 중단은 선홍색, 끝은 홍색으로 현대의 연꽃에 비해 길이가 길고 색깔이 엷어 고려 시대의 불교 탱화에서 볼 수 있는 연꽃의 형태와 색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아라홍련의 부활을 기념해 연꽃을 주제로 한 공원을 조성한 것이 바로 함안 연꽃 테마파크다. 3년이 걸려 조성해 2013년 8월에 개장한 함안 연꽃테마파크(면적 10만9천800㎡)는 아라홍련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연꽃단지를 비롯해 전망 정자, 분수대, 데크 시설, 쉼터, 방문객센터 등을 갖추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연꽃(2)에서 계속됩니다.함안 연꽃테마파크의 홍련. 이 연꽃테마파크는 경남 함안군이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700년 전의 연꽃 씨앗의 싹을 틔운 '아라홍련'을 중심으로 조성해 2013년에 개장했다.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
'세기의 디바' '천 가지 음색으로 연기할 수 있는 오페라의 여신'으로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 (1923~1977)의 최고 아리아를 모은 LP<사진>가 새로 나왔다. '칼라스의 노르마냐, 노르마의 칼라스냐'라고 칭송받는 노래 '정결한 여신'(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툴리오 세라핀 지휘), 영화 속의 오페라 아리아 단골 삽입곡인 카탈리나의 '라 왈리' 중 '나 멀리 떠나리'(필하모니 오케스트라·툴리오 세라핀 지휘), 푸치니의 '나비 부인' 중 '어느 갠 날'(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카라얀 지휘) 등 그녀의 최고 아리아 8곡이 담겨있다. 칼라스의 전성기로 불리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레코딩이다. 무대에서 직접 만날 수도 없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음반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인 이 소프라노 가수는 한결같이 숭배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호사가들은 "그녀의 노래에서 인류의 모든 영혼이 밝혀졌다"라며 추앙한다. 이번에 출시된 칼라스 LP는 프랑수아 후드리(Francois Hudry)가 쓴 전기와 크리스티아누 크레센치(Cristiano Crescenzi)가 그린 24쪽 아트북을 함께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2022년에 리마스터링했으며, 양장본로 구성된 1천 장 한정판 컬렉터 에디션.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사후45주기 기념 음반이다.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7] 中 푸젠성 샤먼, 中·대만 긴장의 땅에서 서화가 정섭의 작품과 만나며…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푸젠성은 대만 해협과 접하고 있는데, 무이산(武夷山)과 샤먼(廈門)이 대표적 관광지다. 무이산은 독특하고 수려한 지형과 무이암차로 유명하고, 샤먼시는 푸젠성의 대표적인 해안 도시로, 대만과 가장 인접해 있다. 샤먼은 특히 최근 중국 정부와 대만 정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샤먼에서 3.2㎞ 떨어진 거리에 대만의 진먼다오(金門島)가 있는데, 대만 국방부는 지난 6일 진먼다오 상공을 비행하는 무인기 7대를 쫓아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중국의 '대만 포위' 무력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진먼다오와 마쭈(馬祖) 열도 상공에는 중국군의 무인기가 잇따라 출몰해 왔다. 2017년 여름 무이산과 샤먼을 여행했다. 샤먼에서는 유명 관광지인 구랑위(鼓浪嶼)를 둘러봤다. 작은 섬으로 영국 조계지였던 구랑위는 19세기 열강 국가들의 영사관, 성당, 교회, 저택 등이 남아있어 동서양이 혼합된 이색적인 풍경과 뛰어난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관광지다. 2017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샤먼 여행에서는 각별히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숙박한 호텔에서의 일이다. 한가운데 중정이 축구장 정도로 넓은 큰 호텔이었지만 호텔 이름은 기억이 없는 그 호텔에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에 익은, 내가 좋아하는 중국 서화가의 대형 작품이 로비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판교 정섭(1693~1765)의 서예 작품이었다. 매우 반가웠다. 멀리 반대편 벽에도 작품이 걸려 있는데, 정섭의 작품인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난초 화분 및 대나무 가지가 화제와 함께 그려진 그의 작품이었다. 둘 다 세로로 긴, 세로가 2m 넘어 보이는 작품이었다.정섭은 시서화 모두에 뛰어난 작가여서 대나무와 난초 그림의 화제나 서예작품의 글귀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을 썼는데, 이곳에서 본 서예 작품의 글은 중국의 유명한 선사가 남긴 시였다.중국 당나라 때 대매(大梅) 법상(法常)이라는 스님의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꺾여진 고목이 찬 숲에 의지하여/ 몇 번이나 봄이 와도 변함이 없었네/ 나무꾼이 만나도 돌아보지 않거늘/ 먼데 사람이 무엇 하러 애써 찾겠는가// 작은 못의 연잎으로 옷 지어도 다 입지 못하고(一池荷葉衣無盡)/ 몇 그루 소나무 꽃으로도 먹고 살 만하네(數樹松花食有餘)/ 사람들 내가 있는 곳 알아버렸으니(剛被世人知住處)/ 다시 띠 집 옮겨 더 깊은 곳으로 가서 살아야겠네(又移茅屋入深居).'대매 법상(752~839)이 이 시를 짓게 된 연유가 있다.염관(鹽官) 제안(齊安) 국사의 제자 한 사람이 산에서 지팡이로 쓸 나무를 구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끝에 법상이 머물던 암자에 이르러 법상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스님께서는 이곳에서 얼마나 사셨습니까?""산이 푸르게 변하고 누렇게 변하는 것만 보았소.""산을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시오."이런 문답 후 그 스님이 절로 돌아가 겪은 일을 말하자 제안 국사는 "이전에 내가 강서에 있을 때 한 사람을 만났는데 혹시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법상 스님을 모셔 오라고 시켰다. 다시 찾아간 스님에게 그 말을 들은 법상은 위 시를 지어 완곡한 거절의 뜻을 나타냈던 것이다.호텔에서 본 작품은 정섭이 이 시의 후반부를 가져와 쓴 것이다. 이 작품 원본은 중국 양저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원본을 토대로 더 고급스럽게 만든 복제 작품인 것 같았다. 반대쪽 작품도 마찬가지로 만든 복제품인 듯했다.귀국 후, 흥미롭고 각별한 감동을 주는 그의 삶과 작품을 다시 살펴보며 여행의 여운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굴곡진 삶과 시서화 작품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겼다. ◆'양주팔괴' 서화가 정섭문인이자 서화가인 정섭(鄭燮)은 청나라 건륭 연간(1661~1722)에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활약했던 여덟 명의 대표 화가를 이르는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핵심 인물이다. 호는 판교(板橋).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던 그는 괴팍한 성격과 독특한 예술적 성과를 아우르는 의미의 '광방(狂放) 예술가'이면서, 관직에 있을 때는 보기 드문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살아있는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을 세울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던 청백리이기도 했다. 늦게 관리를 했으나 곤궁에 처한 백성을 위한 구제책을 두고 상관과 부딪히면서 결국 사직 후 고향에 돌아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 별세했다.먼저 그가 쉰일곱 살 때 남긴 '판교자서(板橋自敍)' 중 일부다."어렸을 때는 특별히 남과 다른 점이 없었으나, 장성하자 신체는 커졌지만, 용모가 볼품이 없어 모두 업신여겼다. 게다가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지나친 자부심을 지닌 채 때를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남을 꾸짖곤 했다. 그 바람에 여러 선배는 다들 눈을 흘기며 주위 사람들이 나와 내왕하지 않도록 막았다. 그러나 학문에 임할 때는 스스로 분발하여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스로 낮추어 얕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탐구하여 선인들의 오묘한 경지를 느끼면서 그 성정과 재주, 능력을 아낌없이 펼쳤다.사람마다 '판교는 독서 기억력이 뛰어나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내가 기억을 잘해서가 아니라 암송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판교는 책을 한 권 읽을 때마다 반드시 백 번 천 번 읽었다. 배 안, 말 위, 이불 속에서도 줄곧 읽었다. 식사 때는 젓가락질을 잊기도 하고, 손님이 앞에서 하는 말도 듣지 못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이 모두가 책을 암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하지 못할 책이 어디 있겠는가. 평생 경학(經學)을 좋아하지 않고, 주로 사서(史書)와 시(詩)·문(文)·사(詞)를 담은 문집을 탐독하였으며, 전기·소설류를 읽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때로 경전을 이야기할 때도 경전 속의 아름답고 기이하며 현란한 문장을 좋아했다. <중략> 서법을 즐겨 스스로 '육분반서(六分半書)'라 부른다. 틈이 날 때 난과 대나무를 그렸는데 여러 왕공·대인·공경·사대부·시인묵객·산중 노승·도사들까지 그림 한 폭, 글씨 한 자락을 얻으면 다들 진귀하게 여기며 소장했다. 그러나 판교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대어 명예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이듬해에 이를 보충한 그의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판교는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 오래된 소나무, 황폐해진 절, 넓은 모래밭, 멀리 흐르는 강, 솟구친 절벽, 쓸쓸한 묘지 사이에서 오래 노닐었지만, 그렇다고 그 어디를 가든 독서를 하지 않은 적은 없다. 정교함을 추구하고 마땅함을 요구하니, 마땅하면 거친 것도 다 정묘하게 되는 법이고, 마땅치 않으면 정묘함도 다 거칠게 되는 법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에게도 통한다."그가 어떤 인물인지 엿볼 수 있다. 대나무를 즐겨 그린 그의 서화작품에 대한 자세와 생각은 어떠할까.화제로도 여러 번 썼던 '대나무와 바위(竹石)'라는 시다.'청산을 악물고 놓아주지 않은 채(咬定靑山不放송)/ 뿌리를 쪼개진 바위틈으로 내려 세웠네(立根原在破巖中)/ 천 번 만 번 두들겨도 꼿꼿하기만 하니(千磨萬擊還堅勁)/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람이야 불든 말든(任爾東西南北風).'이 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좋아해 종종 인용하던 시이기도 하다. 그는 이 시의 앞 두 구절을 '기층으로 깊이 들어가 놓지 않으며(深入基層不放송)/ 군중 속에서 뿌리를 내렸네(立根原在群衆中)'로 바꾼 시를 소개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생각을 드러낸 적도 있다.정섭의 묵죽도 제화 중에는 이런 시도 있다.'해마다 대나무 그려 맑은 기운 사는데(年年畵竹買淸風)/ 맑은 기운 사건만 가격은 낮춰 부르네(買得淸風價便송)/ 고아함은 많길 바라고 돈은 적게 내려 드니(高雅要多錢要少)/ 대부분 주점 주인에게 주고 만다네(大都付與酒家翁).'화제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정신을 한 곳으로 몰입하여 수십 년을 각고 분투하다 보면 신도 도와줄 것이고, 귀신도 알려줄 것이고, 사람도 깨우쳐줄 것이고, 사물도 (그 이치를) 드러낼 것이다. 각고 분투는 하지 않으면서 그저 빠른 효과만 얻으려 한다면, 젊어서는 허장성세에나 빠질 것이고 노후에는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될 뿐이다.''가난한 선비(貧士)'라는 글도 소개한다.'가난한 선비 너무도 궁색한데/ 밤중에 일어나 휘장을 밀치네/ 뜰을 배회하다 서 있으려니/ 밝은 달 새벽빛을 흩뿌리네/ 좋은 옛 벗이 생각나니/ 사정 알리면 거절하지 않겠지/ 문 나설 땐 기세 자못 당당했으나/ 반쯤 길 가다가 벌써 풀이 죽는구나/ 만나 보니 차가운 말만 내뱉기에/ 하려던 말 삼킨 채 되돌아오네/ 돌아와 마누라와 마주하자니/ 풀 죽어 위신을 세울 길 없네/ 뉘 알랴, 아내는 외려 위로해주며/ 비녀 뽑고 헌 옷을 전당 잡히네/ 부엌에 가 부서진 솥에 불지피니/ 연기 자락 아침 햇살에 뒤엉키네/ 쟁반 위 어제 남은 과일과 떡을/ 주린 자식들에게 고루 나누네/ 이 내 몸 부자 되길 고대하다가/ 귀밑머리 짧아지고 성글어졌네/ 행여 새로 나온 꽃가지 만나/ 조강지처 탓하지나 말게 하소서.'정섭을 상징하는 글귀이기도 한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그의 작품이 있다. '어리숙하기 어렵구나'라는 의미다. 이 네 글자 아래에 그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놓았다. '총명하기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네.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되기는 더 어렵네. 하나를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나면 바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 나중에 복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네(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非圖後來福報也).'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샤먼 구랑위의 한 해변 풍경. 작은 섬인 구랑위는 19세기 서구의 건축물과 수려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샤먼의 대표적 관광지다.정섭의 대표작 '난득호도(難得糊塗)'. '어리숙하기 어렵다'는 의미.샤먼의 한 호텔 로비에 걸려 있는 판교 정섭(1693~1765)의 서예 작품.
'집시스윙의 창시자' 장고 라인하르트 LP 출시
'집시스윙의 창시자'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1910~1953)의 LP 음반<사진>이 나왔다. 왼쪽 손가락 2개를 잃는 장애를 딛고 절대적인 연주를 보여준 장고 라인하르트는 독학으로 거장의 경지에 오른 기타 천재다. 어려서 화재사고를 당한 후 왼손 두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숨 막히는 테크닉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재즈와 집시 음악의 융합 '집시스윙'을 탄생시켰다. 놀라운 추진력과 풍부한 영감을 가진 거장의 연주는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기타리스트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장고 라인하르트의 트리오·5중주·빅 밴드로 연주하는 'Minor Swing' 'Nuages' 'Les yeux noirs' 등 그의 대표곡 13곡이 담겨있다. 알랭 거버(Alain Gerber)가 쓴 전기와 장 샤를 바티(Jean-Charles Baty)가 그린 28쪽 삽화도 함께 실려 있다. 프랑스에서 2022년에 리마스터링했다. 고급 양장본 하드케이스로 구성된 1천 장 한정판 컬렉터 에디션.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1] 행촌 이암, 필획이 굳세고 장중…동방인 중 조맹부 필법 정신 얻은 유일한 사람 칭송
이암(李巖·1297~1364)은 고려 후기 서예가. 호는 행촌(杏村). 고려 시대 서예사에 있어서 가장 큰 자취를 남긴 인물로 탄연(坦然)과 이암을 꼽는다. 탄연은 통일신라 이래 고려 전기에 유행했던 서풍과 달리 특유의 미려한 필치로서 고려적 서풍을 이룩했고, 이암은 원나라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를 신속하게 수용해 여말선초의 서예를 이끌었다. 이암은 조맹부체의 연미한 단점을 보완해 필획이 굳세고 장중한 글씨를 선보였다.이암의 대표적 필적으로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가 꼽힌다. 강원도 청평산 문수사에 세워졌던 비석으로, 이암이 31세 때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문은 1327년 3월 원나라 황후가 보낸 사신들이 와서 성징(性澄) 스님 등으로부터 진상 받은 대장경을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아울러 만 냥의 돈을 시주하면서 황태자와 황자의 생일에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불서를 열람토록 했다는 사실을 김이(金怡) 등이 충숙왕에게 아뢰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비석은 성징 스님과 원나라 사신의 주도로 그해 5월 세워졌다. 행서로 쓴 문수사장경비의 글씨는 조맹부의 신수(神髓)를 얻었다는 평을 듣는다. 비석은 오래전에 파손되어 파편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현(李齊賢)의 '익제난고(益齋亂藁)'에 그 전문이 실려 있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등에 그 탁본이 실려 있다.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렇게 적고 있다.'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조맹부 등이 그 문하에서 놀았다. 왕이 귀국할 때 서적과 서화를 만 섬이나 싣고 와 조맹부의 필적이 동방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 우리 동방 사람 가운데 조맹부 필법의 정신을 얻은 사람으로는 행촌 이암 한 사람뿐이다.'이암은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서화로는 묵죽화(墨竹畵)를 잘 그려 당시 문인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모견도' '화조구자도' '화조묘구도' 등의 작품도 유명하다.회양부사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암은 경상도 고성군 송곡촌 앞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17세 되던 1313년 8월에 문과에 합격했다.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을 시작으로 비서랑, 단양부주부, 밀직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청평산에서 5년간의 은거를 마친 후 135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홍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이암은 수문하시중의 사임을 왕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공민왕이 환도한 이듬해(1363년) 이암은 강화도로 은퇴했다. 선행리(仙杏里)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홍행촌수'라고 불렀다.한편 최근 이암의 친필 사경 작품이 있는 서첩이 공개돼 관심을 끌었다. 2018년 3월 이암의 친필 서첩 2점이 한국국학진흥원의 '고성이씨 문중 특별전'을 통해 공개된 것. 한국국학진흥원이 고성이씨 문중이 기탁한 자료 가운데 찾아낸 이 서첩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필사본이다. 1점은 화엄경 제26권 가운데 일부인 십회향품(十回向品) 제25를 직접 쓴 것이다. '행촌친필'이라는 표제가 붙은 다른 하나는 화엄경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일부를 필사했다. 십회향품을 쓴 서첩은 앞뒤 표지와 본문 4면이 남아 있고, '행촌친필' 표제가 붙은 것은 10절첩 가운데 2면만 남아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전액(篆額) 탁본.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선비들의 피서…폭염에도 체면 중시해 발만 담그는 '탁족'…정신력으로 다스리는 더위
사명대사는 우리나라 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표적 고승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 의병을 이끌고 큰 전공을 세우고, 전쟁 후(1604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이뤄내고 포로 3천500명을 데리고 오는 등 맹활약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594년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왜군 진중으로 네 차례 찾아가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는데, 이때 가토와 나눈 문답이 유명하다. 가토가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는 "우리나라엔 보배가 따로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다"라고 답했다. 가토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하자 사명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난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 상황에 보배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그대의 목만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 없이 편안할 것이니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 이후 이 이야기가 퍼지자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설보(說寶)화상'이라고 불렀다.이런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 사절로 갔을 때 있었다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도쿠가와가 대사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해 무쇠로 만든 방에 하루 머물게 하고 쇠가 벌겋게 달도록 불을 지폈는데, 다음 날 문을 열어보니 사명대사는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보통 단순한 야사로 치부하지만, 달리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 정신력의 무한한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의미의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정신력은 견디기 어려운 폭염을 이겨내는 데도 필요하다.◆탁족 이야기무더위를 이기는 옛사람의 피서법 중 하나로 탁족(濯足)이 있다. 선비들이 특히 애용했던 피서법인 탁족은 의미 그대로 발만 물에 담가 씻는 것이다. 손과 마찬가지로 발은 온도에 민감한 부분이고, 특히 발바닥은 온몸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발만 물에 담가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체면을 중시해 함부로 옷을 벗고 물을 즐기지 못했던 선비들은 이런 탁족을 즐기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선비가 계곡이나 시냇가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는 탁족을 즐겼던 데는 단순히 육체적 더위를 잊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 말고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옛날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탁족'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바로 굴원(屈原·기원전 343~기원전 278)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이다. 중국 전국시대 때 초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정을 떠난 굴원이 자신의 심사를 어부와의 대화 형식으로 담은 글이다.굴원은 세상을 등지고자 마음을 먹고 멱라수 주변을 방황하다가 어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굴원이 어부에게 말했다."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라고 하였소. 어떻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수(湘水)의 물결에 뛰어들어 강의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내질지언정 어떻게 희고 흰 순백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그러자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저어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면 된다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이런 이야기가 담긴 탁족은 육체적인 피서법일 뿐만 아니라, 정신 수양의 도구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산간 계곡에서 탁족을 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씻기도 했던 것이다.탁족은 그림 소재로 애용되기도 했다. 그중 이경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가 유명하다. 물이 많이 흐르는 시냇가에서 탁족을 즐기는, 한가롭고 편안한 모습이다. 가지가 드리운 고목 아래 나이 든 사람이 홀로 물가에 앉아 물에 발을 적시고 있다. 저고리 옷자락 풀어헤치고 가슴과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있다. 물이 차가운지 오른발로 왼 다리 종아리를 문대고 있다. 옆에는 동자가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병을 들고 서 있다. 술병인 듯하다. 고목은 새싹이 돋고 있고, 하얀 꽃송이들도 보인다. 여름은 아닌 모양이다.이 그림은 선비들이 꿈꾸었던 자연과의 동화, 은둔한 군자의 삶을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경윤은 시동과 큰 나무 없이 혼자 시냇가 바위에 앉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또 다른 탁족도를 함께 남기고 있다. 옷차림도 더 단정해 담담한 분위기를 더하는 그림이다.이경윤은 고사(高士)와 산수를 함께 구성한 그림을 많이 남기고 있다. '탁족'을 비롯해 달을 감상하는 '관월(觀月)', 거문고를 연주하는 '탄금(彈琴)', 폭포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관폭(觀瀑)' 등이 있다. 선비들이 '정신적 더위'를 다스리는 방법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탁족과 관련, 고려 후기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탁족부(濯足賦)'라는 글을 남겼다. 그 일부다.'나물 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얇은 오사모(烏紗帽) 젖혀 쓰고 용죽장(龍竹杖) 손에 짚고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손으로 한 움큼 물을 입에 머금고 주옥(珠玉)을 뿜어내니 불같은 더위 도망치네.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내고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내 바람 설렁설렁 여덟 자 대자리에 조그마한 영목침 베고 꿈속에 흰 갈매기와 희롱하니 좁쌀이야 익거나 말거나.'다산 정약용은 1824년 여름 '더위 식히는 여덟 가지 일(消暑八事)'을 남겼다. 그중에는 '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쪽 못에 핀 연꽃 감상(西池賞荷)'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東林聽蟬)' '달밤에 탁족 하기(月夜濯足)' 등이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촌 폭염의 수위도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견뎌내기 쉽지 않을 폭염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도 높여가야 할 것 같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조영석 '노승탁족도'이경윤 '고사탁족도'
[동추(桐楸) 금요단상] 지리산 칠불사를 떠올리며… "기후변화 위기…자연 존중 '집단행동' 나서야 할 때"
2009년 여름, 지리산 곳곳을 둘러보던 중 칠불사에도 들렀다. 칠불사 종각 아래 둑 비탈에 주변 짐승들을 위한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네모난 돌판 위에 과자와 과일 등이 놓여 있었다. 반가운 장면이라 사진을 찍어두었다.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을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인간과 자연 사이는 대립이 아닌 상생의 관계로,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 무위(無爲), 연기(緣起) 등이 다 그런 사상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호 의존적인 세계의 모습을 '인타라망'이라는 그물에 비유했다. 무궁무진한 상호 의존의 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이에 비해 서구의 대표적 자연관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연도 정복할 수 있다는 사고가 중심을 이룬다. 지금은 이런 사고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최근 지구촌 곳곳이 악의 기록적 폭염과 폭우, 산불 등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으며 고통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알프스 빙하가 60년 만의 최대 기록인 하루 5㎝씩 녹아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그린란드 빙하는 기온이 15.6℃까지 오르면서 하루 평균 60t씩 녹아 없어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지난달 18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집단행동이나 집단자살"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페터스베르크 기후회담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인류의 절반이 홍수나 가뭄, 극단적인 폭풍, 산불의 위험지역에 살고 있다"며 "그런데도 우리는 화석연료 중독을 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에 직면했는데도 다자공동체로서 협력하지 못하고 있다"며 "각국은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기보다 다른 국가를 손가락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 변화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주요 7개국(G7)과 주요 20개국(G20)의 역할을 특히 강조했지만, 얼마나 먹혀 들어갈지 의문이다. 불경에 초계(草繫) 비구와 아주(鵝珠) 비구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인도의 어느 비구(남자 승려)가 길에서 도적을 만나 옷가지와 갖고 있던 물건들을 다 빼앗겼다. 도적들은 풀줄기로 비구를 묶어 놓고는 도망가 버렸다. 발가벗긴 채로 숲속에서 풀줄기에 묶여 있던 비구는 행여나 풀줄기가 끊어져 풀들이 상할까 봐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밤의 추위와 한낮의 뜨거운 햇살은 물론, 독충이나 벌레에게 물려도 가만히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그때 마침 사냥을 나왔던 임금이 벌거숭이로 약한 풀줄기에 묶여 고통스럽게 꼼짝 않는 이상한 비구의 모습을 보고 비구를 풀어준 뒤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임금은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 비구는 이때부터 풀에 묶인 스님이라는 의미의 '초계 비구'라 불리었다. '아주 비구' 이야기는 이렇다. 한 비구가 보석을 가공하는 장인의 집에 탁발하러 갔다. 주인은 마침 임금의 부탁으로 붉은 보석을 갈고 있었는데, 스님이 오자 음식을 가지러 잠시 부엌에 들어갔다. 그때 거위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그 보석을 고기인 줄 알고 삼켜버렸다. 주인이 음식을 가지고 나와 보석 구슬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비구를 의심하며 그에게 구슬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모른다고 말하자 그를 묶고 마구 때려 피가 흘렀지만, 거위의 생명을 지켜주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보석을 삼켰던 거위가 붉은 피를 먹으려고 기웃거리다가 주인이 홧김에 마구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때서야 비구는 사실대로 말하며 죽은 거위 배 속에서 그 구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다. 이때부터 그 비구는 '아주(鵝珠) 비구'라고 불리었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은 두 비구의 절박한 자세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집단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주변 짐승을 위해 차려놓은 음식상. 지리산 칠불사.(2009년 8월)
영화음악의 고전 '빌리티스' LP 발매
영화보다는 영화 음악이 더 알려지고 영화음악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는 '빌리티스 (Bilitis)'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LP<사진>가 나왔다. 데이비드 해밀턴 감독의 영화 '빌리티스'는 사춘기 소녀의 성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는 프랑스 영화다. 1977년에 개봉된 빌리티스는 국내에는 선정성 논란으로 1988년에 여러 장면이 잘리면서 개봉되었다. '빌리티스'는 영화음악의 거장 프란시스 레이(Francis Lai)가 음악을 맡아 영화의 아름다운 색채 영상미, 그리고 인간의 신체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선의 묘사를 달콤하고 에로틱한 음악으로 완성, 지금껏 잊히지 않고 사랑받는 영화가 되었다. '남과 여'(1965), '러브 스토리'(1970), '엠마뉴엘 II'(1975), '빌리티스'(1977)로 이어지는 프란시스 레이의 최고 전성기 영화 음악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LP로, 1천 장 한정판.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블랙 클래식' 니나 시몬 LP·CD 발매
'소울의 대사제' '흑인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니나 시몬(1933~2003)의 전성기 노래를 모아 놓은 콜렉터 음반이 아날로그 LP<사진>로 나왔다. 니나 시몬은 세살 때부터 귀로 들은 음악을 피아노로 칠 수 있었을 정도로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첫 피아노 콘서트는 12세 때 열렸는데, 194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따라 백인 관객들이 앞에 앉고 흑인인 니나 시몬의 부모는 뒷줄에 앉아야 했다. 니나 시몬은 이때 부모님이 앞줄에 앉을 때까지 연주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니나 시몬은 어려서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커티스 음악원의 입학을 거절당했다. 이후 시몬은 인종차별에 대한 강렬한 트라우마로 자신의 음악을 '블랙 클래식'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매력이라면 단연 일반 남성 못지않은 깊은 저음과 음색이다. 우아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목소리는 유려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특히 그의 음악은 영혼을 담은 강렬한 목소리로 수많은 영화에 삽입되어 영화의 주제를 상승시켰다. 니나 시몬의 아날로그 LP로 'Wild Is The Wind' 'My Baby Just Cares For Me' 'The Other Woman' 등 니나의 전성기를 담은 명곡10곡과 함께, 그의 전기를 그린 유미코 히오키의 동화같은 일러스트도 감상할 수 있다. 2CD+아트북으로도 출시되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여름날 꽃 폭포 능소화 이야기(2)...도시 빌딩 위로 흙돌담 위로 핀 청량함…무더위 속 일상 곳곳서 특별한 풍광
능소화가 피어나기 시작하던 지난달 중순, '경산 능소화'의 밑동이 잘려 더는 그 꽃을 볼 수 없게 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경산시 자인면 자인초등 정문에서 자인시외버스정류장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오래된 목조주택(적산가옥) 벽체 아래 자라던 능소화가 그 주인공이다. 이 능소화는 50여 년 전에 집주인이 씨앗을 뿌려 심은 것이라고 한다. 벽을 타고 오른 능소화가 꽃을 피운 모습이 적산가옥과 어울려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선사해 온 곳이다. 20여 년 전부터 사진 동호인 사이에서 출사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5년쯤 전부터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어왔다.지난 1월 누군가에 의해 잘려 나간 이 능소화 절단 사건에 대한 뜨거웠던 반응은 멋진 능소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능소화 명소△대구 '대봉동 능소화 폭포'= 능소화가 한창 꽃을 피우는 6~7월이면 많은 사람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능소화 명소가 곳곳에 있다. 대구의 능소화 명소로는 '대봉동 능소화 폭포'를 꼽을 수 있다. 대구시 중구 대봉1동 행정복지센터 옆의 건물(경일빌딩) 동쪽 벽을 타고 올라 '능소화 폭포'를 만들어내는 능소화 두 그루가 유명하다. 최근 '대봉동 능소화 폭포'라는 이름을 지어 명패까지 달아놓았다. 1997년 건물 준공과 함께 주인이 심은 두 그루가 잘 자라 지금은 지상 4층 건물의 옥상까지 치솟아 있다. 능소화 나무 앞은 주차장이다. 덕분에 빌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능소화의 장관을 잘 감상할 수 있다. 도심의 빌딩 숲 골목에 이렇게 크게 자라 주황색 꽃 폭포를 펼쳐내는 이 능소화는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추억을 선사한다.이 능소화를 보며 40층 이상 되는 아파트 벽 아래 능소화를 심어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대구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능소화=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본리세거지도 많은 사람이 찾는 능소화 명소다. 이곳은 100여 년 전에 형성된 남평문씨 집성촌으로, 전통 한옥 70여 채가 멋진 흙돌담 길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로도 유명하다. 1995년 대구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마을이다.주택 안에 심은 능소화가 담장 위로 꽃을 피운 모습이 기와를 얹은 황토흙돌담과 어우러져 이곳만의 특별한 풍광을 만들어낸다. 흙돌담 사이의 정갈한 고샅길 바닥에 떨어져 내린 꽃들의 모습도 각별하다. 이곳에서는 마을 입구 연못에 핀 다양한 연꽃, 붉은 꽃이 흐드러진 배롱나무도 함께 즐길 수 있다.△진안 마이산 탑사 능소화= 특별한 능소화 명소로 전북 진안 마이산 탑사 능소화를 꼽을 수 있다. 진안 마이산(馬耳山)은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말귀 모양과 닮은 독특한 형태의 산이다. 조선 시대 태종이 남행하면서 두 암봉이 나란히 솟은 형상이 마치 말의 귀와 흡사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붙였다. 동쪽 봉우리를 숫마이봉(681.1m),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봉(687.4m)이라고 부른다.탑사 뒤 암마이봉 절벽을 타고 35m까지 오르며 자란 능소화가 수많은 꽃을 피우면 보는 이는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마이산의 기이한 지형, 사찰의 돌탑과 어우러진 능소화 절벽의 풍경은 신선이 사는 세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탑사에서 능소화를 심은 것은 1985년이라고 한다.△구례 화엄사 능소화= 구례 화엄사 능소화도 볼 만하다. 능소화가 피는 계절에 산문을 들어서서 돌계단을 조금 오르다 보면 오른쪽에 높게 솟은 능소화가 저절로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능소화는 벽을 타고 오르며 자란 것이 아니라 마당 귀퉁이에서 지지대를 타고 위로 올라가며 자란다. 홀로 높게 치솟아 있어서 하늘을 넘본다는 능소화 명칭의 의미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서울 뚝섬한강공원 능소화벽 등 = 서울 뚝섬한강공원 능소화벽도 서울 시민이 많이 찾는 명소다. 한강 변에 5m가 넘어 보이는 벽이 150m 정도 이어지는데, 거기에 주홍색 꽃이 만발하는 능소화벽이 펼쳐진다.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하다.경기도 부천 중앙공원 능소화 터널도 사람이 많이 찾는다. 이곳 능소화는 인공터널로 조성된 철제 구조물 위에 피어난다. 초여름에 접어들면 주홍색 꽃잎으로 화려하게 뒤덮여 10여 년 전부터 사진작가들에게 촬영 명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 ◆능소화 이야기능소화는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는 흡착 뿌리로 건물의 벽이나 다른 물체를 타고 오르며 자란다. 가지 끝에서 나팔처럼 벌어진 주홍색의 꽃이 초여름부터 두 달 정도 피고 진다. 꽃이 한 번에 다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덕분에 개화 기간 내내 싱싱하게 핀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능소화는 동백꽃처럼 꽃봉오리 전체가 뚝 떨어진다.능소화의 고향은 중국. 다른 물체를 감고 오르는 등나무를 닮은 데다 황금빛과 비슷한 꽃을 피워 금등화(金藤花)라 불리기도 한다.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아름다움이 각별해 양반집에서만 이 꽃을 심을 수 있게 하였기에 양반꽃으로 통했다. 평민은 능소화를 함부로 기르지 못했으며, 기르다가 적발되면 관아로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능소화(凌소花)라는 이름은 넘어선다는 의미의 '능(凌)'자와 하늘을 뜻하는 '소(소)'자를 쓰고 있어, '하늘을 향해 높이 오르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높은 하늘을 향해 웅비하는 기상을 지닌 꽃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꽃말도 명예다.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는 양반가 자제들에게 어울리는 꽃인 셈이다.능소화와 관련해 이런 전설이 있다.왕이 사는 궁궐에 아리따운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소화는 어느 날 임금님의 눈에 띄어 하룻밤의 성은을 입으면서 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궁궐 한 곳에 처소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임금님은 그 후 소화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여우 같은 여러 빈들이 시기와 계략으로 임금님의 발길을 차단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소화는 임금님이 찾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혹시나 임금님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나 않을까, 임금님의 발걸음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내야 했다. 소화는 그렇게 지내면서 끝내 임금님을 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여름날 결국 눈을 감게 되었다. 소화는 눈을 감으며 시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저를 처소 담장 아래에 묻어주세요. 죽어서라도 임금님을 기다리겠습니다."그렇게 담장 밑에 묻힌 소화는 이듬해 여름, 아름다운 꽃으로 환생했다. 그 꽃이 더위가 시작되는 여름날, 덩굴을 뻗어 담장 너머로 꽃을 피우는 '능소화'라고 한다.이런 능소화가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1998년 안동시 정하동 택지 개발지에서 '원이 엄마 편지'가 발굴됐다. 한글로 된 이 편지는 1586년 안동 고성이씨 가문의 이응태가 젊은 나이(31세)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가 써서 남편의 관 속에 넣은 것이다. 편지와 함께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도 발견됐다. 조선 양반가 부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412년 만에 알려진 것이다. 편지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의 사랑과 행복, 죽은 후의 일을 기약하는 애달픈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2006년에 원이 엄마 이야기를 소재로 능소화와 연결해 쓴 조두진의 소설 '능소화'가 출간됐다. '400년 전에 부친 편지'라는 부재를 단 이 소설에서 원이 엄마는 능소화를 심은 뒤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른다. '한 여름날 크고 붉은 능소화를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라는 대목도 나온다. 이 소설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2015년에는 '원이 엄마'를 소재로 한 테마공원이 안동 정하동에 조성됐다. 안동시가 편지를 발굴한 정하동 귀래정 주변에 2천100여㎡ 규모의 원이 엄마 테마공원을 조성한 것이다.공원에는 원이 엄마 편지글을 그대로 새긴 조각상과 현대어 번역본, 쌍가락지 조형물, 야외무대 등이 설치돼 있다. 주변 곳곳에는 능소화를 심어놓았다. 지금 한창 능소화가 피어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구례 화엄사의 능소화. 〈blog.naver.comguryesns〉대구시 중구 '대봉동 능소화 폭포'의 능소화 풍경. 1997년에 심었다고 한다.정원수로 심어놓은 능소화.문경 주암정 뒤 암벽에 핀 능소화.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여름날 꽃 폭포 능소화 이야기(1)
올해 여름은 초반부터 그 더위 정도가 심했다. 특히 대구와 그 인근 지역의 날씨는 '대프리카'라는 말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지난달 대구의 낮 최고기온이 33℃가 넘는 폭염 일수가 11일이나 되었다. 이는 대구지방기상청이 1973년부터 폭염 관련 기상 상황을 관측한 이래 가장 높았던 기록이라 한다. 7월 들어서는 더했다.이런 날씨에 시각적으로나마 더위를 좀 잊게 해주는 꽃들이 있다. 능소화, 연꽃, 배롱나무꽃 등이다. 고마운 존재들이다. 요즘은 이런 꽃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런 꽃을 접하며 기운을 충전하는 것도 괜찮지만, 좀 고생하더라도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그 명소를 찾아 제대로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능소화 명소도 전국 곳곳에 있다. 그중 문경 주암정(산북면 서중리)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주암정은 몇 번 가보았지만, 능소화가 피는 시기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래서 능소화 핀 주암정 풍경은 생각도 못해 봤는데,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주암정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꼭 가보고 싶은 멋진 풍광이었다. 지난 10일 기대를 하며 무더위 속에 그곳을 찾았다. 1차로 만개한 꽃들이 벌써 대부분 져버렸다. 꽃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새로 맺기 시작한 꽃봉오리들이 많이 보여 얼마 후면 또다시 장관을 이룰 듯했다. 능소화는 6월 하순부터 2개월 이상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꽃이 많지 않아 약간 아쉬웠지만, 한창 꽃이 필 때의 모습은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이곳 능소화는 30여 년 전에 정자 출입구 쪽에 심은 몇 그루가 중심이다. 배 모양 바위의 솟은 부분과 그 바위에 붙여 쌓은 담장, 담장 사이의 출입구 위를 능소화가 덮고 있다. 꽃이 한창 필 때는 보는 이를 홀리는 별천지를 선사할 것 같았다. 그 입구를 통해 정자에 오르니 왼쪽에는 바위의 솟은 부분을 덮고 있는 능소화가, 앞에는 홍련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이 펼쳐졌다. 연못은 200평 정도. 그리고 그 둑에 보라색 꽃을 피운 배롱나무와 연분홍의 독특한 꽃을 피운 자귀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자귀나무는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로 합환수(合歡樹)로도 불린다. 모두 양반들이, 선비들이 좋아하던 꽃들이다. 정자와 연못을 돌보며 가꾸어온 주인의 생각과 안목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정자 바로 뒤의 산비탈에도 근래 심은 것으로 보이는 능소화 두어 그루가 암벽을 타고 오르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자 초입에도 작은 능소화가 암벽 위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여름 주암정 주변 능소화 풍광은 더욱더 멋진 장관으로 변해 갈 것 같다.주암정(舟巖亭)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정자다. 배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정자가 선실처럼 앉아 있다. 바위가 배 모양이어서 주암이라 불리었다. 이 정자는 주암(舟巖) 채익하(蔡翊夏·1633~1675)를 기려 후손들이 1944년에 건립했다. 채익하는 이곳에서 노닐며 시도 짓고 학문을 닦았다. 자신의 호도 주암으로 삼았다.옛날에는 주암 앞으로 금천(錦川)이 흘렀다. 언젠가 큰 홍수가 나 금천의 물길이 바뀌고, 새로 제방을 쌓으면서 주암 주변은 논밭이 되었다. 연못이 생긴 것은 근래의 일이다. 주암의 10대 종손이 1977년부터 주암정 앞에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정자와 연못 주변을 가꾸며 찾아오는 이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 주암정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고, 정자에 오르는 사람들이 그 풍광을 즐기며 차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런 종손의 정성과 안목 덕분에 많은 이들이 주암정을 찾아 심신을 충전하며 추억을 만들어간다. 봄이면 뒷산에 피어난 진달래와 연못가의 벚꽃, 목련꽃, 산수유꽃 등이 정자와 어우러진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여름날 꽃 폭포 능소화 이야기(2)에서 계속됩니다.능소화와 연꽃이 핀 주암정 풍경. 바위가 배 모양이어서 '주암(舟巖)'이라 불리었다. 정자 오른쪽에 능소화가 보이는데, 꽃이 한창 필 때면 꽃송이 수가 꽃송이 지금의 50배 이상 된다. (2022년 7월10일)
엘비스 45주기 기념, 1천장 콜렉터 한정판 LP·CD 발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의 대표곡을 담은 LP<사진>와 2CD가 그의 전기를 담은 아트북과 함께 나왔다. 엘비스는 아이리시 체로키 혈통으로, 흑인들의 전유물이던 로큰롤을 전 세계로 퍼트린 '최초의 아이돌' 이자 미국음악의 상징이다. 존 레논이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엘비스의 세계적인 인기와 음반 판매량을 따라잡은 뮤지션은 역사상 비틀즈가 유일할 정도로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아날로그 LP에는 오스틴 버틀러 주연의 엘비스 프레슬리 전기영화 '엘비스'에 삽입된 'That's All Right', 'Heartbreak Hotel', 'Hound Dog', 'Jailhouse Rock',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 엘비스의 대표곡 18곡을 수록하고 있다. 2CD에는 엘비스 데뷔 시절인 1954년부터 전성기를 구가하는 1962년까지 연대기별로 빌보드 차트에 오른 48곡이 담겨있다. 엘비스의 전기를 담은 아트북은 고급 하드케이스 양장본으로, 프랑스 출신 화가 프레드 벨트란(Fred Beltran)이 시나리오와 그림을 담당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6] 中 청두 두보 초당...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 위한 근심…봄비 같은 정치 희망하는 詩를 짓다
중국 시인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걸출한 시인들이 많지만,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일 것이다. 서로 개성이 달라 대비되면서도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 시인은 모두 당나라가 특히 번성했던 시기인 성당(盛唐) 시대에 활동했다. 이백은 시의 신선이라는 의미의 '시선(詩仙)'이라 불리고, 두보는 시의 성인이라는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시성 두보(712~770)의 대표적 시 중 하나가 '춘야희우(春夜喜雨)'다.'좋은 비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가늘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시네(潤物細無聲)/ 들길은 검은 구름으로 컴컴한데(野徑雲俱黑)/ 강 위의 배만 불 밝혔네(江船火獨明)/ 이른 아침 붉게 젖은 땅을 보니(曉看紅濕處)/ 금관성에는 꽃이 활짝 피었으리(花重錦官城)'여기서 금관성은 당시 두보가 살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별칭이다. 최근 지구촌 상황을 보면 중국도, 지구촌 곳곳도 가뭄이 계속되는 봄날의 논밭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때 맞춰 조용히 듬뿍 내리는 희우, 반가운 비가 절실하다. 자국의 국민은 물론, 지구촌 모든 이들을 위하는 정치지도자들의 멋진 정치가 절실한 때인 것이다. 이 시는 두보가 49세 때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보가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청두로 옮겨 초당을 짓고 살아갈 때다. 당시 청두는 오랜 가뭄으로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때에 만물을 흠뻑 적셔주며 소생시킬 봄비가 밤새 내리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에 이 시를 지은 것이다. 봄비가 적시에 적당히 내려주기 때문에 반갑다고 했다. 필요한 때 조용히 내리는 반가운 봄비를 읊으며, 이런 봄비 같은 정치를 희망하는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詩의 성인 '詩聖' 4년간 머무르며 詩 남긴 '두보 초당' 고난의 삶에서 생애 첫 여유로운 생활 생전 1400편 중 240편 쓴 문학의 성지 청나라 시인이 두보 詩會 연 '시사당' 벼슬 업무 '대해'·사당 '공부사' 조성"감동 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쓸것" 中 최고 민중시인·불멸의 작가 명성 ◆4년 동안 머물렀던 초당이 시를 쓸 당시 두보는 쓰촨성 청두에 살고 있었다. 이 청두에 두보가 살았던 초당을 중심으로 조성한 두보 기념공원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있다. 2016년 중국의 대표적 사랑 이야기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 이야기 관련 유적을 취재하러 청두에 갔다가 이곳도 둘러봤다. 두보초당은 두보가 한동안 거주했던 초당 자리에 조성되었다. 두보 관련 건물들과 이를 둘러싼 광대한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총면적은 20만㎡에 이른다. 청두는 고난과 실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두보가 마음의 안정을 얻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유일한 곳이었다.두보는 '시성'이라는 후대의 명성에 무색하게, 당대에는 빈곤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냈다. 수도인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에서의 삶도 겨우 하급관리직을 얻는데 그쳤을 뿐 녹록지 않았다. 그러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청두로 갔다. 이곳에 가서야 주위의 도움으로 생애 처음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두보는 이곳에서 240편 이상의 시를 지었다. 봄비를 보며 잔잔한 기쁨을 노래한 명시 '춘야희우'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밤중에 소리 없이 내려 촉촉이 만물을 적시는 봄비를 묘사한 시구에서 청두에서 소박하지만 평온한 전원생활을 영위하던 두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두보는 안록산(安祿山)이 755년에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759년 겨울에 이곳 청두에 왔다. 청두 서쪽 교외에 '꽃을 씻는 시내'라는 뜻의 완화계(浣花溪)라는 시냇가의 절에 기거하다, 복공(福空)이라는 승려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완화계 주변 180여 평에 오두막을 지었다. 정원을 꾸미고 채소밭도 일구었다. 사람들은 '청두초당(成都草堂)' 또는 '완화초당(浣花草堂)'이라고 불렀다.그는 759년 겨울에서 762년 여름까지, 764년 3월에서 765년 5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 머물면서 주옥같은 2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런 청두는 중국문학의 성지(聖地)로 대접받고 있다. 두보는 생전에 1천400여 편의 시를 지었다. 두보초당은 북송의 원풍년간(元豊年間·1078~1085년) 시절, 청두 지사였던 뤼다팡(呂大防)에 의해 초당이 재건되고 두보 초상을 벽에 그리는 등 사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 후 병란 등으로 여러 차례 폐허와 중수를 거듭하다가 1811년 지금과 같은 초당이 들어섰다. 1955년 두보기념관을 개관했으며, 1985년 두보초당박물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박물관 안에는 3만여 종의 책과 2천여 건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다. 초당의 정문(正大門)에는 두보의 시인 '회금수거지(懷錦水居地)'에서 발췌한 '만리교서택 백화담북장(萬里橋西宅 百花潭北莊)'이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두보초당의 위치가 만리교의 서쪽이고 백화담의 북쪽임을 나타낸다.주요 건축물로 대해(大해), 시사당(詩史堂), 공부사(工部祠) 등이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연못과 수로를 비롯해 대나무 숲, 녹나무 숲, 매화나무 숲 등이 조성되어 있다. 곳곳에 있는 다양한 두보의 석상과 동상, 두보 시비 등도 볼거리다.'대해'의 '해'는 관공서를 말한다. 옛날 지방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두보는 벼슬길에 오른 이후 시종 중용되지는 못했지만, 벼슬을 하기는 했다. 초당을 중수할 때, 두보가 벼슬을 했으므로 마땅히 사무 보던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해'라는 이름의 건물을 지었던 것.시사당은 청나라 시대의 시인과 묵객들이 두보의 시를 추앙하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곳이다. '시사'라는 건물 이름은 두보의 시가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의미에서 두보가 '시사(詩史)'로도 불렸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중앙에 짙은 갈색의 두보 소상(塑像)이 있다. 주더(朱德), 궈모뤄(郭沫若), 천이(陳毅), 쉬베이훙(徐悲鴻), 치바이스(齊白石) 등 역대 유명 서화가의 친필 글씨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시사당 동쪽의 화경(花徑), 서쪽의 수함(水檻), 뒤편의 시문(柴門)과 흡수항헌(恰受航軒)은 두보가 거주하던 당시를 재현한 것이다.공부사는 두보를 기리는 사당이다. 두보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라는 벼슬을 지낸 적이 있어 공부사(工部祠)라는 명칭을 붙였다. 1811년에 건립됐다. 이 안에는 두보의 신위와 두보 상이 있다. 그리고 그 동서 양쪽에 육유(陸游)와 황정견(黃庭堅)의 신위와 그들의 상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두보의 충군애민(忠君愛民)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하며 두보를 특별히 존중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공부사 동쪽에 청나라 강희제의 17번째 아들 과친왕(果親王)이 쓴 '소릉초당(少陵草堂)' 석비와 비정(碑亭)이 있다. 두보의 별명이 두소릉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옹정제의 이복 동생이기도 한 과친왕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아당(大雅堂)이라는 건물도 있다. 이곳에는 굴원(屈原),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소식(蘇軾), 육유(陸游), 왕유(王維), 이상은(李商隱) 등 존경받는 중국의 역대 시인 12명의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매년 정월에는 각계의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두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한편 이 두보초당에서 리커창(李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가 2019년 12월24일 문재인 한국 대통령 및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초청해 한·중·일 협력 20주년 기념행사를 열기도 했다. 리 총리는 이곳을 함께 둘러보며 "두보는 초가집에 살면서 백성과 나라를 마음에 품었다"면서 "그가 쓴 유명한 시 구절 '어떻게 하면 천만 칸의 넓은 집을 구하여, 널리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이 모두 웃게 할까(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는 시인의 위대한 포부와 숭고한 인간애를 표현했다"라고 말했다. 두보의 시 '초가집이 가을바람에 부서져 부른 노래(茅屋爲秋風所破歌)'에 나오는 구절이다.◆시성 두보'시선'으로 불리는 이백(702~ 762년)이 젊은 시절부터 한시와 기행으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것에 반해서, 두보는 죽어서야 그의 시와 인물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시성'으로 추앙 받았다.58세에 죽은 두보는 언제나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관운도 없어서 가난에 시달렸으며, 죽을 때도 배 안에서 허기에 굶주리다 마지막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민중 시인이지만, 재능이 있어도 운이 없었다. 올곧은 성격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아서 모처럼 잡은 기회도 놓치고 결국 고난 속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다.죽고 나서 그의 시는 특히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의 한유와 백거이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북송 시기 왕안석과 소동파에 의해 칭송됨으로써, 중국 최고의 민중 시인이자 시성으로 현재까지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두보는 "나의 시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두지 않겠다(語不驚人死不休)"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치열한 작가 정신을 가졌고 작품에 많은 공력을 들였는지 말해준다. 그의 시에는 나라를 생각하고 대중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배어 있다. 두보는 꿈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채 평생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런 마음도 절절하게 표현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두보초당 곳곳에 있는 두보 조각상들.두보초당 내 '소릉초당' 비석과 비정(碑亭).두보초당에 있는 두보 사당 '공부사(工部祠)'. 두보가 4년 정도 살았던 초당을 중심으로 조성된 두보초당은 중국 쓰촨성 청두에 있다.
'샹송샹송 2' LP음반 발매
샹송의 고전과 프렌치 팝 14곡을 담은 '샹송샹송 2' LP<사진>가 나왔다.1980년대 다방가를 휩쓸었던 장 프랑소아 모리스의 'Monaco(모나코)'를 비롯해 프랑스 컬트 에로영화의 고전 '엠마뉴엘'의 주제가 'Emmanuelle(엠마뉴엘)', 프렌치 팝의 명곡 프랑스와즈 아르디의 'Comment Te Dire Adieu?(어떻게 안녕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프랑스 갈의 'Ce Soir Je Ne Dors Pas(잠 못 이루는 밤)', TV예능프로의 단골 BGM으로 인기 있는 다니엘 비달의 'Les Champs Elysees(오 샹젤리제)' 등 특별한 프렌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프랑스 노래들이 담겨있다.'샹송샹송 1'에 이은 두 번째 샹송 시리즈 LP로 180g 오디오 파일로 발매되었다. 블루컬러 1천 장 한정판이다.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0] 무장 서예가 악비…명장의 굳센 충성심이 일어나는 기운이 붓끝에서 물씬
악비(岳飛·1103~1141)는 중국인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명장이다.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인 그는 서예가이기도 했다. 남송의 영종이 1204년에 악왕(鄂王)에 봉했기 때문에 흔히 '악왕'이라고도 부른다. '송사(宋史)'의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북송 말기에 군대에 들어간 그는 금나라의 침공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연전연승하며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군이다. 그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주전파에 속했는데, 주화파인 당시 재상 진회의 모함으로 39세에 죽임을 당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악비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영웅으로 수천 년 동안 중국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가 다른 무인들보다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학문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 또한 좋아해 '손자' '오자' 등의 병법을 두루 섭렵하고, 역사를 공부하며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는 등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1138년 어느 날, 악비가 군대를 이끌고 하남(河南)의 남양(南陽)을 지나다 비가 내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에서 머물게 되었다. 사당에서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를 읽게 되고 다음 날 아침,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를 써서 남기게 된다. 당시 상황을 악비는 이렇게 기록했다.'무오년(1138년) 가을 팔월 열나흘. 남양을 지나다가 무후사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비가 내려 사당에서 묵게 되었다. 밤이 깊어 초를 켜 들고 옛 현인들의 공명을 찬양한 글과 시가 있어 회랑을 둘러보았다. 사당 앞 비석에는 그가 쓴 전후 출사표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읽고 있으니 눈물이 빗물처럼 솟구쳐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차를 담아 온 도사가 종이를 꺼내 놓고 한 자 적어 달라고 하기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었다. 거친 구석을 생각하지 않고 가슴속 슬픔을 붓이 가는 대로 따라 적는다.'악비의 대표작으로 전하는 이 전후 출사표는 뒤에 초서로 쓴 악비의 제발(題跋)을 달아 4개의 석판에 새겨져 널리 유전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노숙한 필치가 살아 움직이면서 한 기운으로 꿰뚫고, 위아래가 어울리고 좌우가 호응을 이루면서 모든 아름다움을 다했다는 평을 듣는다. 청나라 임개(任愷)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이 작품은 굳세고 위대하며, 특히 충성심이 울연히 일어나는 기운이 붓끝에서 물씬거린다. 대저 악비의 공로는 실로 제갈량과 더불어 앞뒤에서 비춰주며 천고에 전해질 것이다. 어찌 그 문장과 글씨만 전해질 것인가. 그 문장과 글씨 또한 절대로 마멸되지 않을 것이다.'악비는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역대로 모든 사람이 그의 사람됨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서예작품도 보물처럼 여겼다. 악비의 초서는 성정이 강하고 전쟁터에서 자신의 답답함을 붓에 의탁해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 금방 내심의 격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씨는 용과 호랑이의 자태가 있고, 고매하면서 초탈하고 강건하면서 수려하며, 생기가 종횡으로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악비가 쓴 제갈량의 전 출사표 마지막 부분. 석판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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