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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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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계묘년(癸卯年) 새해를 맞으며... "공경하면 뜻이 서고 성실하면 진실해져" 군자·현인이 되고자 새로운 다짐
임인년 호랑이해가 가고, 계묘년(癸卯年) 토끼해인 2023년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새해를 맞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저마다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고 각오를 다진다. 사람들은 다이어트, 운동, 금연, 저축 등 다양한 결심을 한다. 대부분 육체적 건강이나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마음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삶의 바탕이 되는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中 탕왕, 세숫대야에 쓴 '일신우일신'손발 씻을 때마다 마음도 깨끗이 정진사욕을 극복하지 못해 인욕에 들어도이제라도 사욕 극복하면 천리가 회복道는 큰길과 같아 보고 걸을 수 있어만사를 행하는데 부지런히 노력해야"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다. 후덕한 정치를 펼친 어진 통치자의 대명사로 꼽히는 중국 탕왕(湯王)이 세숫대야에 새겨놓은 글귀라고 한다.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관성에 빠지는 마음을 돌아보며 마음을 항상 맑게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마주하는 세숫대야에 '진실로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새겼다. 이 아홉 자를 새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을 때마다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깨끗하게 했던 것이다.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긴 글을 반명(盤銘)이라고 하는데, 그 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주변의 물건 등에 새겨 각오를 다지는 글귀를 좌우명(座右銘)이라고 불렀다.보통 사람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온갖 유혹에 수시로 흔들려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이렇게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그 유혹에 빠져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을 불행으로 이끌게 된다. 옛날 선비들은 이런 좌우명과 함께 새해를 맞을 때도 군자가 되고 현인이 되고자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글을 짓기도 했다.경북 안동의 선비였던 경당(敬堂) 장흥효(1564~1633)가 말년에 새해를 맞으며 지은 글을 소개한다. 장흥효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군자의 학문을 공부하고 실천하는데 전념한 선비다. 퇴계 이황의 대표적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았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도 공부했다.그릇의 밥이 자주 비어도 그것을 개의하지 않으며 군자의 길을 걸었던 장흥효는 당시의 명사 중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를 따르기도 하고, 자제를 보내 가르침을 받게 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그의 집 앞을 지날 때면 그를 찾아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존경하며 따랐고, 난폭한 사람들도 감화되어 복종하게 되었다.가장 오래된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의 저자이자 '여중군자'로 유명한 장계향이 그의 딸이다. 장흥효의 학문은 외손인 이휘일, 이현일 형제를 통해 뒷날 영남 퇴계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먼저 1631년 새해를 맞으며 적은 글이다.'경오년(1630년)을 보내고 신미년(1631)을 맞았으니, 악은 경오년과 함께 떠나보내고 선은 신미년과 함께 맞이하련다. 저 그윽한 산골짜기에서 벗어나 이곳 춘대(春臺)에 오르니, 요사한 안개는 걷히고 순풍이 감도는구나.분함(忿)은 누르기를 산을 꺾듯이 하고, 욕심(慾)은 막기를 골짜기를 메우듯이 하면, 분함과 욕심이 사라지게 됨을 구름이 걷히는 가운데 해를 보듯 할 것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바르지 못한 것들이 드러나지 못하게 되니, 사해팔황(四海八荒:천하)이 모두 나의 문(마음의 문)에 들 것이다.이전 날에 기욕(己慾: 사욕)을 극복하지 못해 인욕(人欲)에 빠져들었더라도, 이제부터 기욕을 극복한다면 천리(天理)가 회복될 것이다. 극복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소인이 되고 군자가 될 수 있으니, 군자가 되려 한다면 반드시 기욕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금수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그 우열이 겨루어지는 바가 아주 미미한 것에서 비롯되니, 금수 되기를 면하려 한다면 어찌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저 새들도 오히려 머물 곳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머물 곳을 알지 못해서야 될 것인가. 머물 곳을 알고 머물 곳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도는 큰길과 같아서 눈으로 볼 수 있고 발로 걸을 수도 있다. 만리(萬理: 모든 이치)를 밝게 보는 것도 한 번 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천 리를 가는 것도 한 번 걷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 한 물(物)에 격(格)하고 내일 한 물을 격하며, 오늘 한 사(事)를 행하고 내일도 한 사를 행하여, 한 물을 격하는 것으로부터 만물을 격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 가지 일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만사를 행하는 데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여야 비로소 군자가 됨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말고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다음은 그가 별세한 해인 1633년(계유년) 초하루에 지은 잠언이다.'임신년(1632년) 정월 초하루를 맞아서도 잠언을 지어 스스로 삼가 조심했고, 계유년 정월 초하루를 맞아서도 잠언을 지어 스스로 조심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말한 것을 실천하지 못했으니, 단지 스스로 잠언을 지어 삼가 조심하고 돌이켜서 나 자신에게 그 원인을 찾고자 해야 할 것인바, 오직 성실(誠)하고 공경(敬)해야 할 것이다. 공경하면 곧 뜻이 서고, 성실하면 곧 마음이 진실하여진다. 하지만 경하지 않으면 서지 못하고, 성하지 않으면 진실하여지지 못한다.천리(天理)가 그쳐 없어지면 온갖 인욕(人欲)이 일어나는데, 이(理)와 욕(欲)은 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욕이 서로 다툴 때 욕이 강하고 이가 약하면, 강한 것은 날로 자라고 약한 것은 날로 없어진다. 마치 큰 손님을 만나듯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지켜나가야 맑은 들판(마음)이 벽처럼 견고해져서 사(邪)의 해를 받지 않는다.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며 기욕과 사사로움(私)을 극복하고 제거해야, 확연히 대공(大公)해져서 하늘이 맑고 땅이 평온해진다.공자 제자인 안회와 염옹의 학문도 이같이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엉성하고 게을러 모양을 갖추지 못한 나는 세월만 부질없이 흘려보냈도다. 늙음은 세월과 더불어 더해지고 덕은 날마다 녹아 없어지니, 학문으로써 명망(名望)이 되어 사람과 사물에 수완을 펼 수 있게 해야 하리라.아! 우리 동지들이여, 옛것을 본받아 오늘을 삼가야 달(月)마다 달라지고 해마다 변화되어 안자(顔子)의 낙(樂)을 모름지기 이어가게 될 것이니, 이 노부가 말한 무익한 것은 배우지 말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이다. 힘쓰기 바란다, 동지들이여.'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주 흥덕왕릉의 둘레석에 새겨진 12지신상 중 토끼상.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6] 송설도인 조맹부…조선의 왕도 추종한 송설체…많은 선비와 관리들에게 유행
조맹부(1254~1322)는 중국 원나라 시대의 최고 서예가다. 그의 서예작품은 멋지고 빼어나기에 많은 사람이 아주 좋아했다. 원나라 시대의 서예가 대부분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서예 글씨를 배우던 자세는 대단했다. 그는 하루에 1만자를 쓰고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의 오른쪽 소매는 늘 닳아 해졌다고 한다. 그만큼 부지런히 글씨를 썼던 것이다.그는 글씨만 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림도 뛰어났고, 시도 잘 썼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에도 넓은 지식을 가진 당대의 대표적인 교양인이었다.서예에서는 당나라의 안진경 이후 송나라에서 성행했던 서풍을 배격하고, 왕희지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그림에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고, 당·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글씨는 해서·행서·초서 모두 품격이 높았다.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명나라 사람 고대(高岱)는 조맹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원나라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많으나 유독 조맹부가 가장 뛰어났다. 당나라 초의 여러 명가에서부터 양송(兩宋)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 근골은 고운 아름다움에 숨기고, 풍요로운 정신은 굳센 것을 표준으로 하며, 팔을 움직여 전화(轉化)하는 곳은 마치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날리고 탄환이 손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숙련의 지극함에 이르러 비로소 영화로움을 드러냈다."조맹부가 이런 성취를 이룬 것은 그가 항상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덕분이었다. 해진은 그가 글씨를 공부할 때 '10년 동안 누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도종의는 그가 '하루에 가히 1만자를 썼다'고 했다.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紀)' '한거부(閑居賦)' '낙신부(洛神賦)' '귀거래사(歸去來辭)'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조맹부의 글씨체를 송설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송설체가 오랫동안 유행했다. 고려 말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지은 만권당(萬卷堂)을 중심으로 양국 학자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조맹부의 송설체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특히 행촌(杏村) 이암은 송설체의 정수를 터득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다. 전아하고 유려한 귀족적 풍모를 지닌 송설체는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조선 시대에 들어서자 송설체는 점차 확산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말선초에 활약한 권근, 최흥효, 신장 등의 글씨에서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세종 연간에 이르면 송설체는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문종, 안평대군,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 많은 서예가가 나타났다. 그중 안평대군이 단연 으뜸이었다.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구해가곤 하며 중국에 전해져, 당대 제일의 글씨로 극찬을 받았다. 송설체는 강희안, 서거정, 강희맹 등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성종 연간에 이르러 송설체는 더욱 확산, 조선 제일의 서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욱이 성종은 학예진흥에 힘쓰며 송설체를 추종하여 문종과 함께 조선 초를 대표하는 어필(御筆)이 되었다. 그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이처럼 왕들이 한 서체를 추종하자 많은 선비와 관리들도 따라 쓰게 되었다. 송설체의 유행은 불경 사경이나 왕의 교지 등 고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조맹부 글씨 '한거부(閑居賦)'.
[동추(桐楸) 금요단상] 다사다난한 호랑이해를 보내며…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이던 지난 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은 지구촌의 안녕과 질서를 흔들어 놓으면서 수많은 지구촌 사람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희생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강도를 높여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도 세계정세를 더욱더 각박하게 만들어가고 있고, 김정은 정권의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의 무리한 코로나19 대응정책과 그로 인한 최근의 의료대란 소식 등도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실망을 더한다. 국내에서도 158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는 많은 문제를 드러내며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해결해야 할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가 쌓여있는데도 정치권은 정쟁만 일삼으며 건강한 민심과는 동떨어진, 몰염치한 언행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초래하는 근본적 이유는 관련된 사람들의 욕심과 어리석음, 독선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맑지 못한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와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을 계속 보아야 하는가. 희망보다는 고통이 먼저 떠오르는 새해가 전망된다.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고 있는 올해 호랑이해의 주인공인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모두가 놀라 자빠질 포효로 인간의 나쁜 마음과 욕심을 모두 날려 버려 주고 떠나가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하다.요즘은 동물원이 아니면 호랑이를 실제로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호랑이의 무서움을 절감할 수도 없다. 하지만 호랑이가 출몰하던 예전에는 달랐다. 호랑이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호랑이를 만나면 물려가지 않더라도 그 울음소리, 포효를 한 번만 들으면 혼비백산하게 되어 며칠 동안 헛소리를 하다가 결국 죽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만 듣고도 오금이 저리고 혼이 나가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물론 다른 동물도 호랑이의 '어흥' 소리에 혼비백산하는 데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호랑이가 내는 초저주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에 들리지 않는 초저주파는 멀리까지 전파되며, 상대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초식동물은 호랑이 울음소리에 순간적으로 근육이 진동해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선 기절하기도 한다. 2017년 인도에서 원숭이 12마리가 단체로 숨이 끊어진 일이 발생했는데, 부검 결과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부검한 수의사는 외상이 없고,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원숭이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얼마 전 경북 봉화에 있는 백두대간수목원에서 호랑이를 처음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무서운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다. 우리 모두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이 호랑이를 보고 그 포효를 떠올리며 자신의 정신 상태를 환골탈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한 마음으로 토끼해 새해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좋은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라'는 것은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여든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아는 게 다가 아니라 실천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실천이 왜 어려운가. 수시로 혼탁해지는 마음을 바로 깨끗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고개를 쳐들어도 모르는 척 무시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의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호랑이 포효 소리를 스스로 지르면서, 좋지 않은 마음과 기운이 생길 때마다 바로 싹 날려 버릴 수 있으면 점점 살 만한 세상으로 변해갈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북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의 호랑이. 올해 호랑이해의 주인공인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엄청난 포효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의 욕심과 나쁜 기운을 싹 사라지게 하고 떠나가면 좋겠다.
프랑코 앰브로세티의 꿈의 스트링 프로젝트 'NORA(노라)' LP·수퍼 오디오파일 씨디(SACD) 출시
지난 60여 년 동안 40여 장의 음반을 발매한 살아있는 재즈 전설인 트럼펫·플뤼겔호른 연주자 프랑코 앰브로세티(1941년 생)의 꿈의 스트링 프로젝트 'NORA(노라)'의 LP<사진>와 슈퍼 오디오 시디(SACD) 음반이 출시되었다. 세계적 재즈 뮤지션이며 프랑코의 절친인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베이시스트 스콧 콜리·피아니스트 우리 케인·드러머 피터 어스킨과 그래미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이자 편곡자 앨런 브로드벤트가 지휘하는 22인조 현악 오케스트라가 함께한다. 그의 아내 실리가 주연을 맡은 입센의 '인형의 집'(1997) 연극을 위해 작곡한 오프닝 'Nora's Theme'을 시작으로 조지 그런츠의 낭만적인 'Morning Song of a Spring Flower', 마일스 데이비스의 클래식 'All Blues' 등 8곡이 담겨 있다. 스트링이 강조된 재즈 표준 'Autumn Leaves'는 특히 음소거된 플뤼겔호른의 흡입과 분출이 나지막이 폭발한다. 프랑코 앰브로세티는 "20대가 되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높이 연주하고 싶어 한다. 트럼페터 크리포드 브라운처럼. 그러나 50세가 된 후 어딘가에 당신은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마일즈 데이비스가 했던 것처럼 단지 몇 개의 음표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라며 앨범을 소개했다.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3] 양저우 최치원기념관, 12세때 당나라 유학…고국서보다 실력 인정받아 사후에도 기념
양저우는 통일신라 시대 인물 최치원과 인연이 깊은 지역이어서 우리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오는 도시이기도 하다. 열두 살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간 최치원이 18세 때인 874년 과거에 급제해 관리를 지낸 곳이며,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지어 황소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친 고장이다. 최치원을 기리는 최치원기념관이 수서호 부근에 있다.최치원은 생전에 고국인 신라보다 중국에서 더 실력을 인정받았고, 사후에도 중국에서 보기 드문 대접을 받고 있다. 양저우시는 2007년 당성(唐城) 유적지 안에 최치원기념관을 개관했다. 당나라 성벽 유적인 당성 유적지는 수나라 두 번째 황제인 양제의 행궁과 당나라 회남절도사 관아가 있던 곳으로, 당나라 고성이 드물게 잘 보존된 곳으로 꼽힌다. 최치원이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수년 동안 근무한 곳이다. 이런 중요한 유적지에 외국인의 기념관을 만들어 개관한 것이다.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이다.최치원기념관에는 최치원상과 함께 최치원의 삶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를 정리해 전시하고 있다. 로비에 자리한 최치원상은 우리나라의 최치원기념사업회가 기증한 것이다. 2층 전시실에는 중국 왕조와 교류한 신라·고려·조선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최치원과 함께 장보고를 비롯한 여러 역사 인물의 행적도 전시하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수서호 근처 당성(唐城) 유적지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3] 中 양저우 수서호, 잔잔한 호수와 어우러진 수양버들·다리·정자 … 가장 살고 싶은 '물의 도시'
중국 저장성 항저우(杭州)시 서쪽에 있는 서호(西湖·시후)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호수다.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궁이던 베이징의 이허위안 호수도 항저우의 서호를 모델로 삼아 조성했다. 중국에 항저우의 서호를 본떠 만든 호수가 40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楊州)에도 항저우 서호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바로 수서호(瘦西湖·소시후)다. 양저우를 대표하는 명소다.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여러 차례 찾았던 곳이고, 북한의 김일성(1991년)과 김정일(2011년)이 양저우를 방문했을 때 들러 유람선을 타고 둘러본 곳이기도 하다.수서호는 항저우 서호보다 크기는 훨씬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서호 못지않다. 오정교와 이십사교 등 멋진 다리와 정자, 정원, 사찰 등이 잔잔한 호수 및 수양버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봄날 풍경과 정취가 특히 좋다.수서호는 원래 양저우성을 휘감아 도는 물길의 강이었다. 양저우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강으로, 일종의 해자이면서 운하 역할도 했다. 이런 강을 막아 만든 호수여서, 호수처럼 보이지 않고 여러 물길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마른 서호'라는 의미의 수서호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서호는 서호를 본떠 만든 것은 아니고, 그 아름다움이 서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구절 '꽃 피는 춘삼월의 양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에도 잘 나타나듯이 중국 강남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다리 위에 다섯 개의 작은 정자를 지어놓은 오정교는 수서호의 상징이다. 양저우를 대표하는 경치 '이십사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지 270년 정도 된 이 오정교는 수서호의 경치를 더욱더 멋지고 풍요롭게 한다. 오정교 위에는 건축미가 돋보이는 5개의 서로 다른 정자가 조성되어 있다.오정교는 청나라 건륭제 22년(175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륭제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6차례의 남순(南巡)을 했다. 1757년의 첫 남순은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가 친히 남중국으로 행차를 하는데, 양저우는 남순 일정 중 핵심 코스였다. 건륭제가 처음 수서호를 방문하기로 정해지자 관리와 지역 염상(소금상인)들이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수서호를 정비하고 다리도 하나 새로 만들었다. 바로 오정교다.中 최고 호수 서호와 비견되는 수서호北 김일성·김정일도 찾아 일대 유람다리 위 다섯개 정자 지어놓은 오정교수 양제가 미녀와 야경 즐긴 이십사교뱃사공 청아한 노래 소리 물결에 퍼져미식가 찾는 양저우식 볶음밥도 유명◆수양제 때 만든 이십사교역사가 오래된 이십사교는 수나라 양제 때 만들었으며, 양제는 이 다리에서 미녀 24명과 함께 야경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십사교는 아름다운 아치형의 다리다. 다리의 폭이 2.4m이고 길이는 24m이다. 다리 위·아래 양측에 24개의 섬돌이 있고, 둘레에도 24개의 난간이 있어서 건축미를 뽐내고 있다. 24는 24절기를 상징한다. 이 다리는 당나라 시절, 시성으로 불리는 두보의 시 구절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다. 그는 양저우의 판관으로 가는 친구를 전송하며 지은 시 '양주 판관 한작에게(寄揚州韓綽判官)'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청산은 어둑하고 물길 아득한 강남 땅 / 가을 다해도 풀 아직 시들지 않았겠지 / 이십사교에 달 밝은 밤(二十四橋明月夜) / 그대는 어디서 퉁소를 가르치시나'건륭제가 낚시를 한 조어대도 있다. 조어대와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건륭제가 낚시를 하게 되자, 염상은 황제가 물고기를 잡지 못할까 염려가 됐다. 그래서 어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연잎으로 위장하고 대롱으로 숨을 쉬며 황제의 낚싯바늘에 물고기를 엮었다. 용어(龍魚)였다. '황제의 관상어'라 불리는 희귀 물고기다. 크고 흰 탑인 백탑도 보인다. '관음사 백탑'이라고도 불린다. 백탑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건륭제가 수서호에 오기로 한 전날 밤에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금을 이용하여 하루 만에 백탑을 만들고, 이후에 다시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시인 이백이 '꽃 피는 춘삼월의 양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라며 양저우 풍경을 읊은 시는 그가 존경하며 좋아한 선배 시인 맹호연에게 써 준 이별의 시 '황학루에서 광릉(양주)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전송하며(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이다. 우한(武漢)의 명소인 황학루에서 양저우로 향하는 맹호연에게 이별의 시를 지었다. '나의 벗은 황학루를 작별하고(故人西辭黃鶴樓) / 꽃 피는 춘삼월의 양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 / 외로운 돛단배 멀리 그림자 남기며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 / 보이는 건 하늘에 맞닿아 흐르는 창장강뿐이네(唯見長江天際流)'맹호연은 이백보다 열두 살 위다. 이백은 소년 시절부터 맹호연의 이름을 익히 들으면서 나중에 꼭 만나고 싶어 했던 차에 그를 찾아가 황학루에서 만났다고 한다. 거기서 며칠을 함께 보낸 후에 맹호연이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이백이 그에게 지어 준 시다. 이백은 양저우를 유람했던 적이 있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양저우의 봄 풍경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백이 맹호연을 얼마나 존경하고 좋아했는지 알 만한 시가 있다. 이백의 '맹호연에게 드림(贈孟浩然)'이라는 시다.'나는 맹호연 선배님을 좋아하니(我愛孟夫子) / 그의 풍류는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있다네(風流天下聞) / 젊은 시절 벼슬길 버리더니(紅顔棄軒冕) / 노년에도 소나무와 구름 속에서 살고 있네(白首臥松雲) / 달에 취해 종종 술 마시고(醉月頻中聖) / 꽃에 반해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네(迷花不事君) / 그 높은 산을 어찌 우러러보겠는가(高山安可仰) / 다만 그 맑은 인품에 읍할 뿐이네(徒此揖淸芬)'수서호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멋은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면서 뱃사공의 노래를 듣는 일이다. 옛날 민요를 불러주는데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가락이 정취를 더해준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담백하고 청아한 소리가 호수 물결 위로 퍼져 가며 잠시 딴 세상으로 데려가는 듯했다.◆당나라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했던 양저우대운하의 건설과 함께 크게 발달한 양저우는 복잡하게 얽힌 운하들 사이의 옛 거리와 정원들이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쑤저우와 함께 중국 강남 지방의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삼국시대의 양저우는 쉬저우(徐州) 광릉(廣陵)군에 속했는데, 수나라 시대에 대운하가 양저우 옆에 건설되자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환경이 갖추어지면서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다. 강도(江都)로 불리며 남쪽의 부수도가 되었고, 수나라 양제가 수서호를 조성해 즐겨 찾았다. 당나라 시대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광저우나 하노이 등에 내려서 보낸 제품, 사천에서 보내온 비단 등이 대운하를 통해 화북지역으로 보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결하는 물류의 허브가 되었다. 그래서 환전업과 금융업도 번영하고, 큰 신라방과 페르시아·아랍 상인의 무역거점인 번방(蕃坊)이 존재하던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저우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양저우는 볶음밥만을 위해 찾는 미식가들이 있을 정도로 볶음밥이 유명하다. 수나라 시대에 '쇄금반(碎金飯)'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밥을 볶을 때 기름과 달걀노른자가 어울려 금가루처럼 보인다고 이름 붙은 볶음밥 요리였는데, 수양제가 양저우에 방문했을 때 이 쇄금반을 양저우에 전파한 것이 현재의 양저우식 볶음밥의 기원이라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멀리 오정교가 보이는 수서호 풍경.양저우 수서호의 이십사교 풍경. 수나라 양제가 미녀들과 야경을 즐기던 곳이다.
영남선비문화수련원, 서원문화재활용사업 우수사업선정
영남비문화수련원(원장 서상보)은 문화재청이 주관하는 2022년 향교·서원 문화재활용사업으로 진행한 '서원 빗장을 열다' 사업이 우수사업에 선정되어 지난 14일 문화재청장상을 수상<사진>했다. 이번 상은 전국 서원 중 2곳만 받았다.대구의 구암서원과 백원서원을 활용하고 있는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은 2019년 대구시 교육청(강은희 교육감)과 상호협력을 맺고 시작한 '지역연계 인성교육 체험학습'으로 대구의 서원과 향교를 이용하여 청소년들에게 인성·예절 체험을 실시했다. 코로나19 시국에도 연 1만5천 명의 인성·예절 체험생을 배출해 올해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도 받았다. 서상보원장은 "영남선비문화수려련원이 인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위해 현대적으로 해석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 더 많은 청소년들이 선비정신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밥 딜런 데뷔음반 'Bob Dylan' LP 출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수 밥 딜런의 팬을 위한 한정판 에디션인 밥 딜런 데뷔 음반 'Bob Dylan' LP<사진>가 28쪽 삽화와 전기를 함께 담은 양장본으로 출시됐다. 밥 딜런은 데뷔 앨범인 'Bob Dylan'과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미국의 대중 음악계에 지진을 일으켰다. 시대를 초월한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솔직함, 유머, 현대적인 시적 이미지를 더한 밥 딜런은 1960년대 초반 아티스트가 노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재정립했다. 아날로그 LP는 밥 딜런이 전설적인 프로듀서 존 해먼드 (John Hammond)의 눈에 들어 콜롬비아 음반사와 녹음한 데뷔 음반 'Bob Dylan'과 그의 첫 싱글로 발매된 'Mixed-up Confusion'이 담겨있다. 'Talkin' New York', 'Song To Woody' 등 밥 딜런이 클럽과 카페를 전전하며 노래했던 곡들로 그의 작가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다.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는 '파란 많은 세상'(서유석), '부는 바람 속에'(조정애), '행복의 나라로'(한대수) 등 번안곡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유명하다. 이 노래로 밥 딜런은 저항 시인이자 시대를 대변하는 가수로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노래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곡 42곡을 수록한 'Bob Dylan illustration by PablO' 양장본 2CD(52쪽 삽화와 전기 수록)도 출시되었다.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대나무'(2) 바닷가 방풍 '해장죽' 화살로 쓰던 '이대' 울산 태화강 홍수 방지 '십리대숲'
대나무는 나무 종류가 아니라 풀 종류에 속한다. 식물 분류학 기준으로 보면 쌀밥을 먹게 해주는 벼와 같은 과(科)인 볏과에 속하는 풀의 일종이다. 식물 중 나무로 분류되려면 단단한 부분(목질부)이 있어야 하고 부피생장을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대나무는 단단한 부분은 있지만, 부피 생장을 하지 않는다. 위로는 자라도 옆으로는 거의 자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대나무는 나무와 풀의 경계선에 있지만, 나무에 속하지 않는다.문신이자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1587~1671)도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읊은 '오우가(五友歌)'에서 대나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은 것은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여러해살이식물인 대나무는 세계적으로 종류가 매우 많다. 120속 1천250종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종이 분포한다. 대부분의 대나무 품종은 중국과 일본에 자라는데 중국에 500여 종, 일본에 650여 종이 자생한다.대나무는 습기가 많은 열대지방에서 잘 자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과 제주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자라는 가장 흔한 대나무는 왕대다. 높이 10~30m, 굵기는 지름 10㎝ 내외로 자란다. 이 왕대를 비롯해 솜대, 맹종죽(죽순대), 해장죽, 조릿대 등이 있다. 2010년 우리나라 지역별 산림 통계에 따르면 대숲(죽림)이 전체 산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1%에 불과하다. 전국의 죽림 분포 비율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가 84%를 차지한다.나무과 아닌 풀과, 열대지방 잘 자라50~100년 만에 꽃 피운 후 말라죽어국내 가장 많은 높이 10~30m '왕대'죽순으로 모친 병 낫게 한 '맹종설순'담양 죽녹원·거제 맹종죽 명소 인기문인·서화가 詩·묵죽 소재 널리 쓰여 ◆대나무 종류맹종죽(孟宗竹)은 어린 죽순을 식용으로 먹기 때문에 죽순대라고도 부른다. 맹종죽은 키는 왕대와 비슷하지만, 훨씬 굵다. 굵기는 20㎝ 정도. 맹종죽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삼국시대 효성이 지극한 맹종(孟宗)이라는 사람의 모친이 오랜 기간 병환을 앓고 있었는데, 한겨울 어느 날 모친이 대나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했다. 맹종은 바로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가 죽순을 찾았지만, 죽순이 있을 리가 없었다. 죽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이 눈물을 흘리자 눈물이 떨어진 그곳에 눈이 녹고 대나무 순이 돋아나서, 이 죽순을 먹게 된 모친의 병환도 낫게 됐다. 효심의 눈물로 하늘을 감동시켜 죽순을 돋게 했다는 이 이야기에서 '맹종설순(孟宗雪筍)'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맹종읍죽(孟宗泣竹)'이라고도 한다.솜대는 높이 10m 내외로 자라며, 어린 순이 올라올 때 표피에 붙은 작은 흰털이 솜처럼 보인다고 해서 솜대라고 부른다. 솜대의 죽순도 식용으로 쓰인다. 오죽(烏竹)은 표피가 검은색이어서 한자 '까마귀 오(烏)' 자를 써서 오죽이라고 부른다. 특히 강릉에서 자라는 오죽이 유명하다. 오죽은 처음에는 녹색으로 자라다가 성장하면서 점차 검은색으로 변한다.그리고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조릿대가 있는데, 높이는 1~2m 이내로 자란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높은 산에서 많이 자라며 한약재로 이용한다. 화살로 쓰이던 이대는 높이 3~4m로 자라는 대나무이며, 비슷한 종류로 신이대가 있다.해장죽(海藏竹)은 주로 바닷가에서 자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며, 높이는 4~5m 정도로 자란다. 방풍을 겸한 주택가 담장용으로 많이 심었다. 보기 드문 구갑죽(龜甲竹)이라는 대나무도 있다. 대나무 줄기 모양이 독특한데, 표피가 거북등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구갑죽이라고 부른다. 구갑죽은 중국이 원산지다.대나무는 오래전부터 인간 삶의 일상에서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으로 곧게 자라는 특징 때문에 지조 있는 선비를 상징했다. 한편 인도의 북동부 지방에서는 대나무가 재앙의 상징이라고 한다. 대나무 숲이 한꺼번에 열매를 맺으면 쥐들이 엄청나게 증식하고, 그 쥐들이 민가를 덮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엄청난 대나무 숲이 50년 정도마다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이때 쥐의 개체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대나무숲 명소▷담양 죽녹원=눈다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구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눈이 내리는 풍경, 눈 덮인 세상은 어디나 보기가 좋다. 푸른 대숲에 흰 눈이 내리는 풍경은 각별하게 더 좋다. 2006년 12월 하순, 멋진 대숲에 눈이 펑펑 내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전남 담양 죽녹원에 갔을 때다. 죽녹원은 31만㎡ 규모의 대숲으로,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해 2003년 5월 개원했다. 울창한 대숲 곳곳에 2.2㎞의 다양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색의 길, 선비의 길, 철학자의 길, 성인산오름길 등 8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죽녹원에 조성된 시가문화촌에는 면앙정, 송강정 등의 정자와 죽로차제다실, 한옥체험장, 소리전수관인 우송당을 한 곳에 재현, 담양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옥카페도 있다.▷울산 태화강 십리대숲울산 태화강 십리대숲도 유명하다. 울산 태화교와 삼호교 사이 태화강 양편의 대숲으로, 길이가 4㎞(폭 20~30m)나 된다. 일제강점기에 잦은 홍수 범람으로 인한 농경지 피해가 잇따르자 주민이 홍수 방지용으로 심은 대나무들이 오늘의 십리대숲으로 변한 것이다.태화강대공원의 중심에 있는 이 대숲은 울산 12경 중 최고로 꼽힌다. 대숲으로 들어서면 딴 세상이 펼쳐진다. 70만 그루의 대나무가 빼곡한 숲이 만들어내는 초록 터널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거제 맹종죽테마공원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에 있는 대나무테마공원이다. 10만㎡ 부지에 맹종죽을 이용한 산책로, 모험의 숲, 죽림욕장, 지압체험장, 대나무 공예체험장, 전망대를 갖추고 있다.거제 맹종죽은 1926년 하청면의 영농인 신용우가 일본 산업시찰 후 귀국할 때 맹종죽을 가져와 성동마을 자기 집 앞에 심게 된 것이 최초라고 한다. 내한성이 약한 맹종죽은 남부 일부 지역에서 재배되며, 우리나라 맹종죽의 80% 이상이 거제에서 생산되고 있다.▷담양 소쇄원 대숲우리나라의 대표적 민간 전통 원림(園林)인 담양 소쇄원의 대숲도 멋지다. 소쇄원을 찾으면 입구에서 먼저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이 뻗어있는 왕대들이 맞이한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멋진 이 대숲 길을 지나면 작은 개울과 정자, 연못, 돌담 등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소쇄원을 지나면 개울 오른쪽으로 또 다른 드넓은 대숲이 펼쳐진다.◆정판교와 대나무대나무를 좋아하고 대나무를 잘 그린 서화가로 유명한 중국의 판교(板橋) 정섭(1693~1765)은 대나무의 성품을 묘사한 글도 많이 남겼다. 정섭이 그림의 화제(畵題)로 지은 '대나무와 바위(竹石)'라는 시가 있는데, 한글로 풀이하면 이렇다.'청산을 악물고 놓아주지 않은 채/ 뿌리를 쪼개진 바위틈으로 내려 세웠네/ 천 번 만 번 두들겨도 꼿꼿하기만 하니/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람이야 불든 말든.'문인이자 서화가인 정섭은 청나라 건륭 연간(1661~1722)에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활약했던 여덟 명의 대표 화가를 이르는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핵심 인물이다.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던 그는 괴팍한 성격과 독특한 예술적 성과를 아우르는 의미의 '광방(狂放) 예술가'로 통하면서 관직에 있을 때는 보기 드문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살아있는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을 세울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던 청백리이기도 했다. 늦게 관리를 했으나 백성을 위한 구제책을 두고 상관과 부딪히면서 결국 사직 후 고향에 돌아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 별세했다.정섭의 묵죽도 화제 중에는 이런 시도 있다.'해마다 대나무 그려 맑은 기운을 사는데/ 맑은 기운 사건만 가격은 낮춰 부르네/ 고아함은 많길 바라고 돈은 적게 내려 드니/ 대부분 주점 주인에게 주고 만다네.'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시다. 다음은 1751년 59세 때 쓴 '대나무(竹)'라는 글이다.'우리 집에 두 칸짜리 초가집이 있어 남쪽에 대나무를 심었다. 여름날 새 대가 자라서 이파리가 나오고 녹음이 사람에게 드리워질 때, 거기다 작은 걸상 하나 놓으면 시원하기가 참으로 그만이다. 가을 가고 겨울 올 무렵, 병풍 살을 가져다가 양쪽 끝을 잘라 옆으로 완자 창틀을 만들고는 거기다 얇고 깨끗한 종이를 발랐다. 바람이 잘 들고 날이 따스할 때면, 추워서 굳어 있던 파리가 완자창 종이를 치면서 동동거리는 작은 북소리를 낸다. 그때 대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늘 이 어찌 천연의 그림이 아니겠는가. 무릇 내가 그리는 대나무는 결코 누구에게 사숙한 바가 없다. 대부분 저 종이창과 회벽, 햇살과 달그림자 속에서 얻었을 뿐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보게 된 대나무 꽃. 대나무에 꽃이 필 때는 이처럼 대숲의 모든 대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운다고 한다.대나무 줄기가 거북등 모양 같다고 해서 '구갑죽'으로 불리는 대나무(부산 아홉산숲).담양 소쇄원 대숲.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대나무(1) 흰 눈이 덮어도 꺾이지 않는 푸른 지조·절개
우리나라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으로도 사용하는 봉황(鳳凰)은 가장 상서롭고 신령스럽게 여기는 새다. 이 봉황은 많은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로, 영생의 생명력을 가진 최고의 상서(祥瑞)와 길상(吉祥)의 화신이다.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을 뜻한다. 봉황은 성군(聖君)의 덕치를 증명하는 징조로 옛 기록 곳곳에 등장한다.이런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봉황이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만 먹는다고 한 것은 죽실이 그 어떤 것보다 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봉황의 음식인 죽실은 실제 접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나무 꽃도 마찬가지다. 평생 대나무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나무는 50년이나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울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이처럼 보기 어려운 대나무 꽃이 무더기로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지리산 산길을 걷다가 보았다. 2009년 6월 전남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동편제마을로도 불리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의 판소리 명창 송흥록·박초월 생가에서 잠시 쉬다가 흥부골을 거쳐 황매암으로 향하던 중 산길 옆에 있는 대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소규모의 대숲이었는데, 그곳 대숲의 대나무 모두가 꽃을 피운 상태였다. 꽃 자체는 별로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 없다. 색깔이나 모양 등이 탐스럽거나 예쁘지는 않고, 향기도 없는 것 같았다. 이 꽃이 열매를 맺으면 봉황이 먹는다는 죽실이 된다.대나무 꽃은 왜 보기가 어려울까. 대나무는 꽃을 피우는 다른 초목과 달리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꽃을 피우지 않는다. 좀처럼 꽃이 피지 않는 대나무는 보통 50~60년 만에, 길게는 100년~120년 만에 꽃이 핀다고 한다. 대나무 종류에 따라 간혹 수년 만에 꽃이 피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대나무는 이처럼 꽃이 잘 피지 않지만, 꽃이 필 경우에는 대숲 전체에서 일제히 핀다. 대나무의 꽃은 대나무의 번식과는 무관한 돌연변이의 일종으로, 개화병(開花病)이라고도 한다. 일제히 꽃을 피운 후에는 모두 말라 죽는다.대나무 꽃은 번식의 한 수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대나무는 뿌리로 번식해 대개 무리를 이루는데, 많은 대나무가 한곳에서 오랫동안 번식하면 땅속의 영양분이 고갈된다. 그래서 더는 죽순으로 번식할 수 없으면 대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라는 환경이 갑자기 변하거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자손을 남기기 위해 대숲 전체가 함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남긴 후에는 대부분의 대나무가 말라 죽는다는 것이다. 씨앗이 실제로 다음 세대로 발아하는 데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야생 동물과 곤충의 소중한 먹이가 된다고 한다.대나무 열매는 죽실(竹實), 죽미(竹米), 야맥(野麥)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종류에 따라 모양이 다르고 밀알·보리알을 닮았다고 한다.대나무의 결실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도 나온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조선 태종 때 강원도 강릉의 대령산(大嶺山) 대나무가 열매를 맺어 그 모양이 보리와 같고 찰기가 있으며 그 맛은 수수와 같아서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따서 술도 빚고 식량으로 썼다'라고 적고 있다.대나무에 꽃이 피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기적으로 꽃이 핀다는 설, 영양분의 결핍이 개화의 원인이 된다는 설, 병충의 피해가 직접 개화의 원인이 된다는 설, 식물 고유의 생리작용에 의해 대나무 내의 성분이 변화해서 꽃이 핀다는 설,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원인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이런 대나무는 '나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만, 나무 종류가 아니라 풀의 일종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대나무(2)에서 계속됩니다.눈 내린 담양 죽녹원 대숲.
'크리스마스 보이스 (CHRISTMAS VOICES)' LP 출시
20세기를 풍미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담은 '크리스마스 보이스 (CHRISTMAS VOICES)'가 LP<사진>로 출시되었다. 빙 크로스비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It's Beginning To Look A Lot Like Christmas'를 비롯해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Blue Christmas', 컨츄리 가수 윌리 넬슨의 'Frosty The Snowman', 드리프터즈의 소울풍 'White Christmas', 호세 펠리시아노가 작사하고 노래한 'Feliz Navidad',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의 'Rudolph The Red Nosed Reindeer' 등 다양한 장르의 크리스마스 캐럴 18곡이 담겨있다.이 LP는 2022년에 새롭게 리마스트링하여 180g 오디오 파일로 제작되었다. 1천 장 한정판. LP와 함께 20명의 유럽 화가들이 그린 대형 크리스마스 삽화 20쪽이 수록되어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음주 이야기...밤낮 술에 중독된다면 가정 파탄·나라 망치는 길, 절제의 미덕 일깨워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지 유혹에 잘 넘어가거나 쾌락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면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의 지혜가 담긴 글귀들을 수록한 동양고전 '채근담'에 이런 글귀가 있다.'입에 맞는 음식은 모두 창자를 짓무르게 하고 뼈를 썩게 하는 독약이니, 반쯤만 먹어야 재앙이 없을 것이며(爽口之味 皆爛腸腐骨之藥 五分便無殃)/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은 모두 몸을 망치고 덕을 잃게 하는 매개물이니 반쯤에서 멈춰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快心之事 悉敗身喪德之媒 五分便無悔)'절제의 미덕을 일깨우고 있다. '주색잡기(酒色雜技)에 패가망신 안 하는 놈 없다'라는 속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음주와 성, 도박 등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술자리가 많아지는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 주색잡기 중 음주에 대한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다산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밥과 술은 모두 곡식에서 나오는 것밥은 평생 건강하게 오래 살게 만들고 덕과 어진 이를 높여 나라를 이롭게 해 술은 곡식성질 어지럽혀 누룩 띄워 빚어술맛에 빠지면 오장육부 해치고 命 재촉헐뜯고 미워하며 덕과 어진 이를 멀리해 나라를 해롭게 하고 제집을 망치는 것'진정한 술맛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는 흉패(凶悖)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아들이 술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정약용은 이어 술로 인한 병 등을 거론하며 금주할 것을 당부한 뒤 마지막 부분에 다시 한번 '너에게 빌고 비노니,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해라'고 하면서 마치고 있다.호곡(壺谷) 남용익(1628∼1692)이 금주를 결심한 뒤 쓴, 술을 소인에 비유한 글 '주소인설(酒小人說)'도 소개한다.'주보(酒譜)에 의하면 옛날 애주가들이 술을 아주 사랑한 나머지 맑은 술을 성(聖)에, 빛이 노란 전내기 술을 현(賢)에 비유했다고 한다. 나 역시 매우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성에 또는 현에 비유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술은 성도 현도 아닌, 바로 진짜 소인(小人)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대체로 술이 입술에 닿으면 그 시원한 기운과 맑은 빛깔, 그 향기로운 맛이 마른 목을 축여 주고 답답한 가슴을 확 트이게 하여 정신을 새롭게 하고 기운을 샘솟게 해 주는데, 이것은 이를테면 은나라 고종이 어진 부열(傅說)에게 충정 어린 인도를 받는 것과도 같다. 또 술이 배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온화해지고 체력이 충만해져서 근심 걱정이 절로 사라지고 즐거운 흥취가 절로 발동되어 진득해지고 화락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온화한 봄기운에 만물이 소생하는 듯하던 안자(顔子)의 기상과도 같다. 이것이야말로 성현다운 교화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하지만 술기운이 살갗에 배고 뼛속에 스며들어 점차 중독되어 그 기운을 없애고자 하나 없앨 수 없어서 날마다 정신이 흐리멍덩하게 되면, 입술에 닿는 것은 모두 간교로 임금을 속이며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유발했던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꿀맛 같던 아첨과 같다.그리하여 듣고 보는 것이 모두가 그 술에 사역되어 밤낮없이 주악을 베풀고 잔치만 즐기는 것은 바로 남북조시대 강총(江總)이 정무를 돌보지 않고 향연만을 베풀어 진(陣)나라 후주(後主)를 망하도록 인도했던 행위와도 같다. 또한 잠자리의 방탕함은 월왕 구천(句踐)의 미인계에 빠진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가 오왕 부차를 미혹시켜 멸망하게 만든 것과도 같다.심지어 심성을 상실하여 미치광이 같은 말과 행동을 마구 해서 가정을 어지럽히고 공무를 포기하기에 이르면, 그것은 옛날 위(韋)나라와 고(顧)나라가 하걸(夏桀)의 포악을 돕고, 주(周)나라의 태사(太師) 윤씨(尹氏)와 경사(卿士) 포공(暴公)이 난정과 참소로 주나라를 쓰러지게 하고, 환관 홍공(弘恭)·석현(石顯)이 참소로써 어진 이를 배척하여 한나라를 기울게 했던 것과도 같다.이뿐만 아니라 끝내는 오장육부가 손상되고 온갖 병마가 틈을 타 발생하며 원기가 날로 깎여 명을 재촉하고 몸을 망치게 되어서는, 간신 비렴(飛廉)·악래(惡來) 부자가 은주(殷紂)를 망하게 만들고, 이사(李斯)·조고(趙高)가 진(秦)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장돈(章惇)·채경(蔡京)이 송나라를 넘어지게 했던 것과도 같다.술병이 든 사람이 때로 뉘우쳐서 혹독하게 자책하고 경계하여 여러 날 술을 안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갑자기 술맛이 생각나면 저도 모르게 군침을 흘리게 되는 것은 바로 위(魏)와 화약(和約)을 맺어 나라를 기울게 한 소인 주이(朱異)를 못 잊던 양무제(梁武帝)와도 같고, 정치를 문란하게 해 나라를 어지럽게 한 노기(盧杞)를 생각하던 당덕종(唐德宗)과도 같다.이렇게 된 뒤에는 온갖 좋은 약으로도 그 증세를 낫게 할 수 없고, 맛 좋은 팔진미라 하더라도 그 위장을 조양(調養)할 수가 없다. 죽이나 밥이 눈앞에 가까이만 와도 구역질을 참지 못하게 되지만, 만일 천천히 밥알을 한 알씩 입안에 넣고 억지로라도 한 술씩 떠먹어서 점점 밥 기운이 술기운을 이겨 술 힘이 밥심에 밀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신이 살아나고 의지가 안정되어 자연히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을 잊게 된다.이것은 이를테면 제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인의(仁義)에 관한 말씀을 들어 깨우침이 있던 것과도 같고, 노래를 좋아하는 조열후(趙烈侯)가 상국(相國) 공중련(公仲連)의 충간을 들어 노래하는 자에게 주려던 농토를 주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아! 밥과 술은 다 곡식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밥은 곡식의 성질을 온전하게 보존하여서 그 맛이 담담할 뿐 감칠맛이 없다. 그러므로 하루에 두 끼니만 먹으면 그만이고 평생 늘 먹어도 물리지 않으며, 사람을 건강히 오래 살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군자가 천성을 온전히 보전하여 그것으로 임금을 섬겨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덕을 높이고 어진 이를 높여서 나라를 이롭게 함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그러나 술은 곡식의 성질을 어지럽혀 누룩으로 띄우고 빚어 그것을 걸러 마시는데, 더러는 소주로 만들기까지 하면서 반드시 독한 것을 미주(美酒)로 여긴다. 사람마다 모두 그 맛을 좋아하여 백 잔이고 천 잔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퍼마셔 대어, 마침내 사람의 오장육부를 상하게 해서 명을 재촉하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소인이 천성을 해치고 그 잘못된 천성으로 임금을 섬기되 서로 헐뜯고 미워하며, 덕 있는 이와 어진 이를 멀리하게 해서 나라를 해롭게 하고 제집을 망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술도 적당하게 마실 줄 알아야 한다. 김후신의 '대쾌도'.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고산 황기로(하) 사선의 기다란 삐침·좌우 파동세 이루는 획…조선 중기 개성적 초서풍 전형 이뤄
독자적인 서풍을 이룩한 황기로의 초서는 낙동강 강변에 매학정을 짓고 자유롭게 살다 간 처사적 풍모와 함께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의 찬미 대상이 되었다. 황기로는 초서로 조선 중기 이후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많은 추종자를 낳게 되었다. 16세기에 황기로의 초서풍을 따른 대표적 서예가는 이우(李瑀)와 이산해(李山海) 등이다. 안동의 서예가로는 오운(吳澐)과 서익(徐益)이 꼽힌다. 그에 대한 역대 평가를 보면,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한다. 글씨에서 드러나는 굳센 필획과 정신의 운용 또는 거침없이 흐르는 운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옥동 이서나 원교 이광사 등의 서예가들에게는 이단이라는 등 혹평을 받기도 했다.'초성(草聖)'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황기로의 초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완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찍부터 모각(模刻)되어 세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1549년에 모각·간행된 '초서가행(草書歌行)'은 현재까지도 적지 않게 전하고 있다.'초서가행'은 돌에 새긴 석각본으로, 일찍부터 그 탁본이 널리 유포되었다. 현재까지도 다수의 이본 필첩이 전한다. 그리고 그 원석(原石)이 보존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초서가행'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초서 대가였던 회소(懷素)의 글씨를 찬미한 내용을 담은 시를 쓴 것이다. 마치 회소의 광초(狂草)를 염두에 두고 쓴 듯 분방한 운필이 돋보인다. 길게 삐쳐 올라가는 획과 좌우로 파동세를 이루는 획들이 곳곳에 보여, 황기로가 명나라 장필(張弼)의 서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엿보게 한다.그리고 대자로 쓴 서축(書軸) '초서 이군옥시(草書 李群玉詩)'는 회소 초서풍의 수용을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시인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작품이다. 가느다란 필선과 경쾌한 붓놀림 그리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원세(圓勢)의 운필은 마치 회소의 '자서첩(自敍帖)'을 방불케 한다.초서 차운시 작품인 '경차(敬次)'는 회소와 장필의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한편 특유의 독자적인 초서풍이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황기로가 당대 문장가 5인의 시가 쓰인 시축을 감상한 후 손수 차운하여 쓴 자작시를 쓴 것이다. 칠언절구 네 수가 실려 있다. 사선의 기다란 삐침, 좌우로 파동세를 이루는 획, 글자의 대소, 획의 비수(肥瘦)를 강조한 점 등 장필의 영향을 받은 획법이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까칠한 삽필(澁筆)을 많이 구사한 장필에 비해 명정(明淨)하고 윤기 있는 선질이 돋보이고, 장필 초서의 특징인 파동세와 사선의 과장된 획들이 보다 절제된 모습을 보인다. 황기로의 해서와 행서는 전하는 작품이 매우 드물다. 해서와 행서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비갈에 쓰인 글씨다. 경남 진주 소재의 '조윤손묘비명(曺潤孫墓碑銘)', 충주 국망산에 있는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경남 합천에 있는 '이영공유애비(李令公遺愛碑)'가 그것이다. 대체로 왕희지의 자형을 따르는 한편 송설체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송설체와 왕희지체가 혼합된 양상을 보이며 토착화 현상을 보였던 16세기 당시의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황기로는 장욱·회소로부터 시작된 광초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이들 서풍을 융합하여 조선의 미감에 맞는 초서풍으로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의 서예사에서 기존 초서와는 구별되는 개성적 초서풍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황기로 글씨 '초서가행'이 새겨진 원석 중 하나.
[동추(桐楸) 금요단상] 문경 돌고개 성황당에서, 공공의 안녕 기원…현대판 '성황당 정신'을 바라다
지난 9월 경북 문경 마성면에 있는 고모산성에 올랐다가 내려오다 고모산 산등성에 있는 성황당(城隍堂)을 가보았다. 고갯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단칸 기와집인 성황당의 앞과 뒤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고, 성황당 주위에는 크고 작은 돌탑들이 많이 있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서낭당으로도 불리던 성황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신성한 장소였는데, 미신이라는 이유로 수많았던 성황당은 대부분 사라지고 잊혀갔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은 이곳에서 자신과 가족을 비롯해 마을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이 횡행하지 못하게 해주기를 빌었다. 이 고모산성 돌고개(石峴) 성황당은 20여 년 전에 중수한 건물인데, 중수 당시 1796년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경상도 문경의 지정학적 위치, 영남대로를 지나는 나그네의 안녕과 마을의 풍년·평안을 비는 내용, 성황당을 지을 때 참여한 주민 30여 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다.이 성황당을 보면서 다시 '성황당 시대'의 정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는 이제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정신적 풍요의 측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후진하고 있는 측면이 적지 않은 것 같다.돈과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 성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다양한 문명 이기와 돈의 노예가 되어가면서 마음은 오히려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 모든 면에서 여유를 잃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보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사람이 늘어만 가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사회의 건강을 빌며 지키고자 하는 개개인의 마음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것도 그렇고, 참사 이후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들의 한심한 관련 언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문제만이 아니다. 지구촌이 마주하는 총체적 위기 상황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걱정이다. 지금 이대로 그냥 혼탁한 물결에 휩쓸려 가면 자본과 과학기술을 장악한 '나쁜 기운'이 인간과 자연을 지배,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세계적 지성의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그냥 흘려듣기만 해도 될 것인가. 문득 아래 시조가 떠오른다.'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언제 속였기에/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성리학 대학자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서경덕을 사모했던 기생 황진이의 시조다. 다음은 서경덕이 이 시조에 화답해 지었다고 하는 시조다.'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난/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어리다'는 '어리석다'라는 의미다. 이런 '어린 마음'이 소중하지 않을까.황진이가 서경덕에게 글을 배우러 가던 길가에도 성황당이 있었을 것이고, 황진이와 서경덕도 성황당에서 서로의 행복을 빌고, 사회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하곤 했을 것이다.순박한 마음을 되살리지 못하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편리하기 그지없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더라고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순박한 기운이 모이는 성황당이 곳곳에 다시 생겨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 사회의 변화는 결국 개개인의 변화로 시작된다. 각자 마음속에서라도 성황당을 하나씩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북 문경 마성면 고모산 고갯길 옆에 있는 성황당 풍경.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2] 中 시안 비림(碑林)…2천년 문화예술의 보고(寶庫) '비석의 숲'
중국 시안(西安)은 산시(陝西)성의 성도(省都)이다. 이전에는 장안(長安)이라고 불리었으며,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천년에 걸쳐 13개 왕조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다. 진시황릉(秦始皇陵), 병마용갱(兵馬俑坑) 등 유명한 고대 문화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고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이 시안에 다른 곳에는 없는 특별한 박물관이 있다. 시안의 문묘(文墓·공자묘)에 있는 비석박물관인 비림(碑林)이다. 역대 중국의 귀중한 비석을 수집하여 모아놓았다. '비석의 숲'이라는 의미의 '비림(碑林)' 명칭에 걸맞게 수많은 비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왕희지, 저수량, 구양순, 장욱, 안진경 등 역대 서예 대가의 친필 석각을 비롯해 다양한 옛 석각예술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한나라 때의 비석부터 소장돼 있으니 2천년 세월의 자취를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다. 특히 서예가나 서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성소(聖所)'라 할 만하다. 비석과 묘지(墓誌) 4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1087년 탄생한 비석박물관비림이 조성된 건 북송 철종 때 공부낭중(工部郞中)이자 시안 전운부사(轉運副使)였던 여대충(呂大忠)의 공로가 크다. 그는 당나라 말 이후 전란 탓에 방치돼 있던 '개성석경(開成石經)'과 '석대효경(石臺孝經)' 비석을 현재의 비림이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이를 계기로 역대 비석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비림의 조성 시기는 당말 오대(唐末五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장안성(長安城) 국자감 내에는 745년 당나라 현종이 서(序)와 주해(注解)를 직접 쓴 '효경'의 내용을 새긴 석대효경비 그리고 문종의 명으로 837년에 '역경' '서경' '효경' '논어' 등 12편의 중국 고전을 양면의 돌 114개에 65만여 자를 새긴 개성석경비가 있었다. 여대충은 당나라 말기(904년)에 이러한 중요 비석의 보호를 위해 비석을 문묘 내에 집중시켰으며, 북송 때인 1087년에는 개성석경 비를 보존하기 위해 석비 전문 진열건물을 건립했다. 비림이 탄생한 것이다. 1090년에는 비랑(碑廊), 비정(碑亭)을 증축했다.이후 각 왕조의 광범위한 수집을 통해 점점 규모가 확대되었고,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비림(碑林)'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비림은 고대의 비석을 가장 많이 수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역대 유명 서예가·명인의 석비 약 3천개,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의 각종 묘지(墓誌) 1천여 개를 진열하고 있다. 이 중 당나라 비석이 가장 많이 있다. 비석들은 일곱 군데의 전시실에 나눠 보여주고 있다.왕희지 등 역대 서예 대가 친필 석각 한나라~청나라 각종 墓誌 1천개 진열유교 경전 돌에 새긴 '개성석경' 보관 청나라 강희제때 '맹자' 추가 13경 완성초기 예서→해서로 변화한 서체 전시 무덤 지키는 석수·석등·수호신 인물상 당나라 현종 친필로 유명한 '석대효경' 치국 이념 삼고자 한 '효제사상' 담아 비림의 중심건물은 석대효경이 서 있는, '비림'이라 적힌 현판이 걸린 비정이다. 취푸(曲阜) 문묘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행단(杏壇)이 중심인 반면 이곳 비림은 황제가 직접 주석을 달고 글을 쓴 '석대효경'이 있는 비정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뒤편에는 유교 13개 경전을 새긴 개성석경을 보관하는 제1전시실을 비롯한 전시실이 펼쳐진다. 사당이나 강당보다는 유교 경전이 새겨진 비석을 중시했던 비림의 성격을 보여준다.제1전시실에서는 가장 중요한 석비인 개성석경을 볼 수 있다. 유교 경전을 돌에 새겨놓은 것이다. 당나라 문종 때(837년) 전해오던 여러 유교 경전을 모아 돌에 새겨, 여러 경전의 착오를 바로잡는 표준이 되게 하였다. 청나라 강희제 때 '맹자'를 추가로 새기면서 13경이 완성되었다. 비석이 처음 새겨진 연대가 당나라 문종 때여서 그 연호인 개성(開成)을 따라 개성석경이라 부른다. 북송 때 개성석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세우면서 비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제2전시실은 당나라의 유명한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나라 때 기독교 일파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비롯해 당나라를 대표하는 명필 구양순, 저수량, 왕희지, 안진경, 이양빙 등의 글씨를 새긴 비석들이 있다.제3전시실은 역대 서체들을 살펴볼 수 있는 비석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다. 한나라 비석 '희평석경' 잔석, '조전비' 등에서 초기 예서를 볼 수 있다. 서진의 '사마방비'는 예서에서 해서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4전시실에는 비석에 새겨진 그림인 석각도화(石刻圖畵)가 전시되어 있다. 주로 송·명·청 시기에 새겨진 것들이다.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인 동관에는 한나라·당나라 시대 무덤을 장식하고 있던 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유교문화가 정착한 한나라 이후의 것들이다. 서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석관(石棺)을 비롯해 무덤을 지키는 다양한 형태의 석수(石獸), 불을 밝히는 석등(石燈), 수호신 성격의 인물상 등을 만날 수 있다.◆유교 경전 최고 권위의 판본 '개성석경' '석대효경'개성석경과 석대효경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비림 탄생의 계기가 되었을까. 개성석경은 유교의 12경, 즉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를 새겨 놓은 비석이다. '맹자'를 보충해서 13경이 된 건 청나라 건륭 시대에 이르러서다.개성석경은 830년 당나라 문종이 국자감 좨주 정담(鄭覃)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만들기 시작해 837년에 완성했다. 114개의 비석으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65만252자에 이른다. 당나라 시대는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때여서 과거시험과 직결된 유교 경전의 수요가 많았다. 그런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경전을 베껴 쓰는 방식이다 보니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전의 권위와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개성석경이다. 장안성 국자감 안에 세워진 개성석경은 유교 경전의 최고 권위를 지닌 판본이 됐다. 석대효경은 당나라 현종의 친필로 유명하다. 유교의 효제(孝悌) 사상을 치국 이념으로 삼고자 했던 현종은 '효경'의 서문과 주석까지 직접 써서 석대효경에 담았다. 제1전시실 앞에 자리한 비정이 바로 석대효경이 있는 효경정(孝經亭)이다. 석대효경의 높이는 6m가 넘는다. 높이가 620㎝, 너비는 120㎝. '효경'을 새긴 이 비석은 3층으로 이뤄진 돌 밑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석대효경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윗부분에는 당 현종이 지정한 제목을 태자가 전서체로 썼다. 본문은 예서체다. '효경'은 효의 원칙과 규범을 수록하고 있다.제2전시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흥미로운 사연을 담고 있다. 당 태종 때(635년)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장안에 도착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시켜 그들을 영접하고, 3년 뒤에는 네스토리우스교 교회당인 대진사(大秦寺)가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네스토리우스교는 중국에 착실히 뿌리를 내려갔다. 781년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졌다. '대진'은 로마, '경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불일치를 주장한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종교다.이 비의 앞부분은 천지창조, 사탄에 의한 인간의 타락, 예수의 탄생, 예수에 의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서 경교가 중국에 들어와 유행하게 된 상황과 중국 황제들에 대한 칭송이 서술돼 있다. 한동안 유행했던 경교는 845년 무종이 불교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등 폐불(廢佛) 정책을 단행하면서 불교뿐만 아니라 경교 역시 큰 타격을 입고 사라지게 된다.경교와 더불어 이 경교비가 자취를 감춘 지 78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들이 경교비를 발굴하게 된다. 1623년의 일이다. 비석에 관한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와 알바로 세메도를 비롯해 서양의 많은 선교사가 비문을 탁본하고 번역해 본국으로 보냈다. 라틴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이탈리아어·영어 등으로 번역된 경교비는 유럽 각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그러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경교비에 다시 시련이 닥친다. 급기야 서양인 사이에서 비석을 유럽으로 옮겨서 보관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됐다. 덴마크인 프리츠 홀름은 실제로 경교비를 서구세계로 가져가고자 시도했다. 1907년 5월에 시안을 찾은 그는 금승사 주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인부를 고용해 경교비와 완전히 똑같은 복제본을 만든다. 홀름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시안 순무(巡撫) 조홍훈(曹鴻勛)은 경교비를 비림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해서 1907년 10월, 경교비가 최종적으로 비림에 자리 잡게 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비림(碑林)' 현판이 걸린 석대효경 비정. 청말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관리 임칙서가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비림 전시실의 고대 석관들.안진경의 '안씨가묘비'에 새겨진 글씨(부분).비림 전시실에 있는 안진경의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왼쪽)' 와 '다보탑비(多寶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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