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동 추 거문고 이야기] <12〉 강세황과 거문고
강세황(1713~1791)은 70대의 나이에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 많은 현지인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려 할 정도로 유명했던 화가였지만, 과거시험 장원급제(66세 때) 후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 관료이기도 했다. 문인 출신이지만 글씨와 서화에 능해 한국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유행시켰고, 조선에 서양식 화법을 들여오기도 했다. 또한 화가인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니, 조선의 그림을 바꾼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처남 류경종, 친구 허필과 절친했다. 또한 성호 이익, 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교유했다. 8세에 시를 짓고 13~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 처가인 진주류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18세기 화가 야유회 모습 담은 '균와아집도' 시원한 폭포·소나무 한쌍 끼고 둘러앉아 산야에서 그림 그리고 바둑 두며 '흥취 만끽' 애제자 '김홍도'와의 친분도 여실히 드러나 부친의 일로 집안이 몰락한 강세황은 안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초야에 묻혀 거문고를 즐기면서 문인이자 화가·평론가로서 당대 예술계의 총수로 자리 잡아갔다. 벼슬길이 막혀버린 후 가난을 견디지 못해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간 강세황이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거문고와 벗하며 학문과 그림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류씨 덕분이었다. 빈곤한 살림살이에도 처남 류경종의 도움으로 여러 문인과 교류를 하며 높은 안목과 학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는 환갑이 넘어서야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6세에는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 합격했다. 영릉참봉(英陵參奉), 병조참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쳤다.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베이징을 다녀왔다.◆강세황과 '균와아집도'이런 강세황이 안산에 살던 시절,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강세황이 거문고를 얼마나 즐겼는지, 당대 예술인들의 풍류 모임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대 대표적 화가들이 중심이 된 구성원들이 야외에서 풍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이다.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화가들인 표암 강세황, 현재 심사정(1707~1769), 호생관 최북(1712~?), 단원 김홍도(1745~?), 연객 허필(1709~1768), 김덕형(1750~?) 등 8명이 주인공이다.모임 장소인 균와(筠窩)라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안산 인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모임 시기는 1763년 4월10일. 음력이니 모인 날은 화창한 늦은 봄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모임을 갖고, 모임을 기념하는 이 그림을 합작으로 남겼다. 발문에 이러한 내용으로 남겼는데, 발문을 쓴 이는 강세황과 친했던 문인 서화가였던 연객(煙客) 허필이다. 허필은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고, 산수화와 인문화에 능했다.먼저 균와아집도 상단 오른편에 써놓은 발문의 내용을 보자.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강세황)이고,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심사정)이다. 치건(유생이 평상시에 쓰던 두건)을 쓰고 바둑 두는 사람은 호생관(최북)이고, 호생관을 마주하고 바둑을 두는 사람으로 추계(미상)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 두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연객(허필)이다.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미상)이다.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또한 홍도(김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현재이다. 표암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호생관은 색을 입혔다. 모임의 장소는 곧 균와이다. 계미 1763년 4월10일 연객 허필이 적다.' 이 그림을 보면 크게 두 장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강세황이 거문고를 타고 김홍도가 퉁소를 불고 있는 음악 풍류 장면이다. 이를 균와는 안석에 기대어 듣고 있고, 심사정은 담배를 피며 감상하고 있다. 어린 김덕형은 강세황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강세황의 모습 중 거문고 부분은 대부분 훼손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거문고 괘가 있는 부분을 오른손으로 타고 있는 모습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최북과 추계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허필은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다. 이 모임 주인공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균와인데, 이 인물은 균와(筠窩) 신광익(1746~?)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심사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다. 얼굴과 상체 부분이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남아있는 모습의 분위기로 보아 최고 연장자이거나 균와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인다. 심사정은 이 그림의 근경과 산수배경을 그렸다. 절벽과 작은 폭포 앞에 두 그루 소나무가 춤을 추듯 짝을 이루고 있고, 화명 아래에는 바위들이 적절하게 막아서고 있다. 문인화의 대가다운 진솔한 화풍은 이 모임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강세황이 거문고 연주자로 등장한양의 근교인 안산을 주 근거지로 활동하던 당대의 대표적 예술가(화가) 지식인의 야외 풍류모임이 어땠을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들은 가끔 야외 풍류 모임을 가졌을 것이고, 그런 모임 중 대표적 모임을 이날로 생각하고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이런 모임에 강세황이 거문고 연주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 등 여러 가지 예술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거문고 연주자로 묘사되고 있음은 그가 얼마나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났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같이 등장하는 김홍도는 강세황의 애제자인데, 그 역시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 악기들도 잘 다뤘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와 대금,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다'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김홍도의 퉁소 소리는 맑고 가락이 높아 멀리서 이것을 들으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한편 강세황은 허필과 '연옹(허필)이 나(강세황)를 아는 것이 내 스스로 나를 아는 것보다 낫다'라거나 '표암의 서화첩에 연객의 평이 없으면 점잖은 선비가 갓을 쓰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할 만큼 서로 절친했고, 서로의 예술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강세황을 비롯한 당대의 대표적 화가들이 야외(균와)에서 가진 봄날 모임을 그린 균와아집도. 강세황은 거문고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픽=장수현기자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2024.06.21
[위클리 키워드] 한국인이 좋아하는 기업인 1위 '정주영'
한국인이 좋아하는 기업인 1위는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로 조사됐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12일 발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50가지(사람 1편)'에 따르면,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가 기업인 분야에서 22%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1%,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15%의 득표율을 보였다. 대구경북에서는 이건희 전 회장이 24%로 가장 높았다. 그 뒤로는 정주영 설립자가 23%, 이재용 회장이 20%를 차지했다. 성별로 보면 남성은 정주영 설립자(25%), 여성은 이재용 회장(24%)을 가장 선호했다. 연령별로는 정주영 설립자는 고연령일수록(10대 5%·60대 이상 36%), 이재용 회장은 저연령일수록(10대 41%·60대 이상 8%) 선호도가 높았다. 이번 조사는 3월22일부터 4월5일까지 전국(제주 제외) 만 13세 이상 1천77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원 인터뷰(CAPI) 방식을 통해 진행됐다.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3%포인트였다. 조현희기자clip20240617170550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더위 식힐 대구명소 (2) 능소화 폭포 쏟아지고 수국 푸른 물결 가득…대구 곳곳 '초록바람' 넘실
김광석길 옆 빌딩외벽엔 '오렌지색 꽃' 장관나무·풀밭 펼쳐진 수목원은 청량함 안겨줘'여름꽃 여왕' 만개 이현공원서 산책 즐기고야생화 핀 정원 카페선 아이스 커피 여유를■'가족·댕댕이와 수국 구경' 이현공원6월은 여름꽃의 여왕으로 불리는 수국의 계절이다. 형형색색의 꽃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싶다면 서구 이현동 '이현공원'에 가보자. 대구 서구의 대표적인 근린공원이지만 수국 명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만큼 경관도 아름답다. 현재 하늘색, 연보라색, 분홍색, 흰색 등의 꽃이 만개해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특히 올해는 다양한 세대가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공원을 이용하기도 보다 편리해졌다. 그간 데이트 명소로 자주 언급됐지만 이제 가족 단위로 방문하기에도 제격이다. 잔디광장 주변에 휴게쉼터와 벤치·휴게시설이 추가 설치되고 어린이 놀이 시설 2개소가 신규 조성됐다. 기존 숲길에 자작나무 250여 그루도 심겼다. 이현공원은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공원이라 강아지와 산책하기도 좋다.■건들바위역 정원 카페 '큐바이쿼트'걷는 게 싫다면 실내로 가보자. 도심 속 싱그러우면서도 조용한 곳이 있다. 남구 이천동 '큐바이쿼트'는 식물이 가득한 녹색빛의 '정원 카페'다. 건들바위역 앞에 위치해 지하철을 이용해 방문하기 편리하다. 자가용으로 방문할 경우 평일엔 카페 후문 주차장, 주말엔 인근에 위치한 대구 상수도 중남부사업소에 주차하면 된다.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손님을 반긴다. 실내의 3면이 모두 탁 트인 유리창이어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라탄(칼라마스라는 동양 식물의 나무줄기에서 채취한 섬유) 인테리어는 동남아 휴양지에 놀러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식물이 가득 차 있어 어떤 좌석에 앉든 녹색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으며 야생화, 야레카야자, 몬스테라 등 그 종도 다양하다. 야외 테라스 좌석도 있는데 선풍기를 배치해 밖에서도 덥지 않게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해 질 무렵 선선한 바람과 함께 노을 밑 도시철도 3호선 열차가 지나다니는 퇴근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식물과 함께 맨발산책…대구수목원달서구 대곡동에 위치한 '대구수목원'은 다양한 식물종이 서식하는 대구 시민의 휴식공간이다. 2002년 쓰레기매립장을 탈바꿈해 조성된 우리나라 제1호 공립수목원으로 78만㎡의 규모를 자랑한다. 희귀식물 130여 종을 포함한 식물 2천여 종이 있다. '선인장온실' '열대과일원' '향토식물원' 등 여러 전시원에서 이색적인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산림문화전시관, 목재문화체험장 등 문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볼거리가 많아 시간이 여유로운 날 방문하길 추천한다. 구석구석 둘러본다면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맨발족'들은 걷기 코스도 눈여겨볼 만하다. 최근 불면증 개선, 통증 감소 등의 효능으로 맨발 걷기가 중장년층에게 좋은 운동으로 각광받으면서 맨발산책로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대구수목원에도 황톳길·자갈길 등 980m의 맨발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맨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곳곳에 벤치와 평상이 설치돼 있어 중간에 피크닉을 하기도 좋다. 지난 5일 맨발산책로에서 만난 60대 시민(여·대구 달서구)은 "수목원에 오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해소되는 것 같아 자주 찾는데,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생긴 이후로 여름엔 매일 온다. 심신이 회복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김광석길 옆 포토스폿 '능소화 폭포'중구 대봉동 김광석길에는 6월이면 폭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핫플레이스가 있다. 물줄기를 쏟아내는 '진짜' 폭포는 아니고, 꽃이 폭포처럼 펴 있는 곳이다. 이른바 '대봉동 능소화 폭포'로 불린다. 한 건물의 외벽을 능소화가 뒤덮었기 때문이다. 대봉1동 행정복지센터 옆 건물(경일빌딩)이다. 1997년 건물 준공 당시 주인이 이 건물에 능소화 두 그루를 심었는데, 잘 자라 지상 4층 옥상까지 치솟게 됐다고 한다.능소화는 7~9월 피지만 대구는 보통 6월 중순 만개한다. 날이 아무리 뜨거워도 굳건히 펴 있는 능소화를 보면 '대프리카'의 더위라도 견딜 수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 오렌지색 빛이 지친 마음을 달랜다. 능소화 폭포는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쨍쨍한 날 햇볕 밑에서 이 폭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대충 찍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지난해 6월 대구 대봉동 김광석길 인근에 위치한 빌딩의 외벽을 뒤덮은 능소화가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려 시민들 눈길을 끌고 있다. 휴일인 지난 6일 오후 대구 서구 이현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꽃망울을 터뜨린 수국을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구 이천동 정원 카페 '큐바이쿼트' 야외 테라스. 조현희기자
2024.06.14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1> 5·16혁명과 기업인들
◆느닷없는 정변 소식1961년 5월16일 아침 7시. 이병철은 일본 경제인들과 골프를 치기 위해 도쿄의 오쿠라 호텔 현관에서 승용차에 올랐다. 일본인 운전기사 구와바라가 근심 어린 얼굴로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느닷없는 정변 소식이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냥 골프장으로 달렸다. 5·16 혁명정부는 혁명 공약으로 경제인 13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그 첫 번째가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은 도쿄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일단 구속은 면했다. 곧 혁명정부는 도쿄로 두 사람을 보내 이병철의 귀국을 채근했다.당시 5·16 혁명정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특별 재판소를 설치하고,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부정 축재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30만달러 이상의 은행보유 외환을 대부받거나 매수한 자, 은행 돈을 융자받아 1억환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외자구매 외환 또는 그 구매 외자의 배정을 독점함으로써 2억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자, 2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킨 자, 국영은행 주식을 부당하게 불하받은 자, 과거 5년간 1천만환 이상을 탈세한 자였다. 그 결과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사람은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을 대리한 조홍제, 삼호방직사장 정재호, 대한양회사장 이정림, 대한전선사장 설경동, 동양시멘트사장 이양구, 극동해운사장 남궁연, 대한제분사장 이한원, 동립산업사장 함창희, 한국유리사장 최태섭, 중앙산업사장 조성철, 조선견직사장 김지태, 금성방직사장 홍재선, 화신산업사장 박흥식 등 총 13명이 체포되었다.도쿄 체류 이병철 대신 조홍제 체포시종일관 "모든 것 내가 했다" 진술한달에 걸친 조사에도 혐의 못 찾아삼성 6개 계열사 추징금 59억환 부과제일제당 밤샘 생산·판매 벌금 완납이병철 귀국후 중앙정보부서 데려가박정희에 "기업인 잘 활용하시라" 건의구속 3일 만에 메트로호텔서 풀려나◆한 달에 걸친 조사부정축재위원회는 결국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기업인들의 부정축재를 조사했으나 혐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삼성물산이 첫 번째 타깃이었다. 그해 9월 부정축재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은 검찰로 넘겨져 재판이 열렸고 한국의 기업 50여 개사에 대하여 추징금 200억원이 부과됐다. 삼성그룹의 경우도 6개 계열사에 59억환의 추징금이 부과되었다. 그중 제일제당 앞으로 나온 벌금은 57억5천만환이었다. 당시 혁명재판소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재판정에 출두한 사람들은 대부분 겁을 먹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판부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사장 조홍제는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내가 했다. 모든 것은 내 책임하에 결정했다"고 진술했다.조홍제는 결국 풀려났다. 그때 조홍제는 제일제당의 이익금만 가지고는 도저히 벌금을 갚을 수 없자 제일제당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현금을 원맥 도입용 달러 구입으로 돌렸다. 당시에는 달러로만 원맥을 낙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원맥을 확보한 후 제당공장의 인원을 늘려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완전 가동에 들어갔다. 밀가루를 밤새도록 생산·판매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거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달러를 사들여 다시 원맥을 구입, 그것을 제분으로 만들어 회전속도를 최대한 높였다.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금으로 1962년 5월 초, 벌금의 제1차 분납금 17억환을 납입했고 이어 7월 말까지 전액을 완납했다. 이렇게 해서 제일제당에 부과된 벌금 57억5천만환을 모두 갚게 된다.◆이병철의 귀국5·16 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6월24일 오전 10시 이병철은 오쿠라 호텔에서 "빈곤퇴치를 위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라고 AP, UPI 등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날 밤 이병철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초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의 지프차에 동승,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는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그다음 날 아침 이병철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실에서 박정희와 대면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안 되셨습니까?" 뜻밖에 박정희 부의장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부정축재자 열세 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정축재자 열세 명은 별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이 답하자 박정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세금포탈이나 미국 원조금 착복 등 경영상의 문제가 있어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1위 기업부터 13위 기업까지 그 기업가를 잡아들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분히 인기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당시 혁명정부의 허점을 찌른 말이었다."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박정희가 되물었다. "기업인의 본분은 기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 해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기업인을 양성하려면 적어도 20~30년이 걸립니다. 기업인을 잘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텐데…"라고 박정희가 말했다. "국가발전에 필요하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병철의 말이다. 긴장 속에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구속된 지 3일 만에 메트로 호텔에서 풀려났다.결국 삼성은 "정부의 요구가 무리가 있더라도 따르도록 한다. 해방 후 오늘날까지 매점매석, 귀속재산 불하, 정치권력과 결탁 등으로 졸부가 된 사람도 있고, 은행 돈으로 손쉽게 사업가가 되어 기업은 파산 직전에 있으면서도 애국적인 기업가인 척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횡재 기업가와는 달리 경제성과 경쟁력을 근간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해왔다. 지금과 같은 혼란에 쉽게 동요하여 우리가 지켜온 큰 것까지 잃게 된다면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일본방문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11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의 이케다 총리를 만났다.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정부가 가진 돈이 너무 없었다. 일본 정부의 원조를 요청했다. 이케다 총리가 어느 정도의 액수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17억달러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케다 총리는 깜짝 놀랐다. 당시 일본의 외환 보유고가 17억달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야 국회의원들이나 일본 국민에게 그렇게 큰 액수의 돈을 일본 정부가 주어야 하는지 동의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에게 일본어로 메이지유신의 지사인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름을 거론했다. "충분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메이지 유신의 초석이 된 다카스기 신사쿠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 정치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가진 자금이 너무 없습니다."다카스기 신사쿠(1839~1867)는 일본의 무사로서 에도막부 말기 조슈번에서 성장, 기병대를 창설하고, 후배인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유력한 번들을 규합,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던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꿈을 펼치지 못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 1년 전에 29세의 나이로 사망한 비운의 인물이다. 메이지 유신은 사실 다카스기 신사쿠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재계는 놀랐다. 박정희가 일본육사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일본 역사에 관해 박학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일본 정·재계는 단숨에 한국을 지원하려는 분위기로 기울었다. 이렇게 해서 훗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유무상 차관 7억달러를 받게 된다. 작가·전경련 교수5·16 혁명 직후 박정희 대통령(당시 육군소장·앞줄 왼쪽 둘째). 1961년 11월 일본 이케다 하야토(오른쪽)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삼성물산 부사장 시절 조홍제(가운데).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더위 식힐 대구명소 (1) 이런 대숲이라면 대프리카 더위도 쉬어 가지 않을까
대구에 산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주소지도 옮겼다. 이제 진짜 대구시민이 됐다. 하지만 '대프리카'의 더위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지난 10일 대구에 올여름 첫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폭염주의보는 일 최고 체감온도가 33℃ 이상인 상황이 이틀 이상 지속할 것으로 전망되면 발령된다. 6월인데 벌써 한여름 더위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후끈한 날씨에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쉽게 짜증이 나는 요즘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한다. '이렇게 더울 수가 있는 거야?'며칠 전 이런 더위를 무시하고 땡볕에 등산을 갔다.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것도 뚜벅이로 갔다. 하산 후 기진맥진해 정신을 반쯤 놓은 채 귀가하던 중 집 근처에 위치한 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들어갔다. 나무와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으니 살 것만 같았다. 정자에 누워서 책도 읽는데 '힐링' 그 자체였다. 평소엔 무심코 지나친 곳이었는데 녹색의 싱그러움이 더위를 날려주는 듯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도심 속이라도 초록이 가득한 공간이라면 가볍게 휴양을 즐길 수 있구나 싶었다. 옛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이유를 알 듯했다.초록은 노랑과 파랑의 중간색이자 모든 색의 중간 위치로 균형과 편안함·정상적 상태를 상징한다. 이런 특성에 인테리어 요소로도 많이 이용된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로움을 주는 녹색의 공간은 신경과 근육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사색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식물로 둘러싸여 있을 경우 햇빛 차단 효과뿐 아니라 주변의 열을 감소시키는 역할도 한다. 몸과 마음 모두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휴양이라 하면 보통 동남아 여행지에 가거나 먼 시골로 떠나는 일을 떠올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그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덥고 바쁘기만 할 것 같은 대구에도 식물로 가득 찬 곳들이 많기 때문이다. 잘 찾아보면 근교뿐만 아니라 도심에도 있다. 광활한 자연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시간·비용적 부담 없이 힐링이 가능하다는 매력이 있다. 여름꽃의 여왕인 수국이 만개해 우아한 장관을 펼치는 공원, 비밀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식물원 콘셉트의 카페 등 볼거리를 제대로 갖춘 곳까지 있다.인간 생활에 날씨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빽빽한 건물에, 사람으로 분주한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특히 그 영향이 크다. 도시민들의 고질병일까.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해진다. 폭염엔 짜증과 피로가 배가 된다. 이런 상황에 녹색의 싱그러움을 지닌 장소들은 그나마 만족스러운 도시 생활을 가능케 한다. 푸른 나무와 풀밭이 시원함을 안겨주고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면서 스트레스를 완화해주기 때문이다.산소가 없으면 세상이 멈추듯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산소 공급이 필요하다. 더 여유롭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쉼이 필요할 때 쉬어가자. 벌써 시작된 무더위에 심신이 지친 때라면 식물로 둘러싸인 청량한 곳에서 쉬어보는 건 어떨까. 이달 가볼 만한 대구의 힐링 공간 4곳을 소개한다.▶커버 스토리 2면에서 계속: 능소화 폭포 쏟아지고 수국 푸른 물결 가득…대구 곳곳 '초록바람' 넘실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대구 달서구 대곡동 대구수목원 대나무숲.
[사람의 서재] 행동하는 사상가 '레프 톨스토이'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리나)어떤 글이든 첫 문장은 중요하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첫 문장에서 독자를 사로잡지 못하면 그 글은 결코 잘 쓴 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까지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꾸준히 읽히는 고전을 보면 모두 첫 문장이 간단명료하면서도 강렬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도 그렇다.톨스토이는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다. 1828년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시 낭송을 즐기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다. 큰형처럼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전쟁터에 가 낮에는 전투를, 밤에는 글쓰기를 했다. 초반에는 참혹한 전쟁의 모습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글이 많았는데, 차츰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1852년 발표한 자전소설 '유년 시대'가 큰 화제가 되면서 러시아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그는 당대 불평등한 사회 제도에 비판적이었다. 약자들의 편에 선 사상가로도 열심히 활동했다. 1861년 러시아에서는 농노제가 폐지됐는데, 그는 그보다 수년 앞서 영지에서 똑같은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 백작이 쓰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문학에는 진정한 농부가 없었다"고 훗날 레닌이 극찬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농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었다.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1869년에, '안나 카레리나'를 1877년에 완성해 명성을 얻었다. 이 두 작품은 러시아 문학 사상 불후의 대작들로 불리게 되며 현재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빈곤이나 불평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40대 후반은 그의 문학적 격변기였다. 정신적 고뇌와 방황 끝에 종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참회록' '교회와 국가' 등을 발표했다. 현대의 기독교 대신 원시 그리스도교로 회귀해 간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사랑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다. 종교와 인생관, 육체와 정신, 죽음의 문제 등을 논했다.1910년 아내와의 불화로 가출을 결심했다. 기차 여행 중에 감기에 걸렸고, 이는 폐렴으로 번졌다. 작은 간이역 역장 집을 빌려 몸져눕다 가출한 지 1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러시아의 대표 작가이자 사상가 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등을 집필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리나'.
2024.06.07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그 시대 그 감성, 다시 뜬다 (2) '도토리'로 미니홈피 꾸미고 '알'로 문자메시지…카톡세대는 그 감성 모르지
▶1편: '선업튀'가 쏘아올린 작은 공…Y2K 복고감성 "응답하라"◆SNS는 '싸이월드'…알 요금제 쓰던 시절, 문자 소중솔은 선재의 '싸이월드'를 찾아가 일촌 신청을 한다. 선업튀의 2008년 세계엔 카카오톡도 인스타그램도 없다. 대신 싸이월드가 있다. 싸이월드는 200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인터넷 문화를 이끈 SNS다. 인맥 구축 기능에 특화된 플랫폼으로 가장 유명한 서비스가 '미니홈피'다. 미니홈피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글이나 사진으로 공유하고 '일촌'(친구)을 맺어 미니홈피에 방명록 등을 남길 수 있다. '도토리'(유료 캐시)를 충전해 미니홈피 배경음악을 구매할 수도 있었다. 학생들은 '퍼가요' 기능을 통해 게시물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가져오며 친근의 표시를 남기기도 했다. 스타일이 좋은 10대 중 '퍼가요'를 많이 받은 이들은 '얼짱'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인플루언서'다. 학생들에게 '싸이월드 얼짱'은 연예인 못지않은 동경의 대상이었다.메신저는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이용할 수 있던 건 문자 메시지뿐이었다. 네이트온은 피처폰에서 접속할 수 있었지만 상당한 요금이 들어 휴대전화로는 잘 이용되지 않았다. 당시 청소년요금제는 '별'(SK텔레콤), '알'(KTF), '링'(LG텔레콤)이라는 독특한 요금 단위를 사용했다. 매달 사용한도 내에서 문자 메시지와 통화 데이터 등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메시지 1건을 보내는 데 10~15알(별/링), 전화 10초당 30알이 차감됐는데 KTF의 '쇼알23000' 요금제가 월 1만7천원에 2만3천알인 점을 고려하면 메시지 한 통 한 통이 상당히 소중했다. 이수미(가명·31)씨는 "그때만 해도 문자 요금이 상당히 비쌌다. 주변 친구들도 늘 '알' 부족에 시달렸다(웃음).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는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 발신번호를 바꿔 메시지를 보내던 이들도 많았다"고 했다.온라인 메신저로는 대표적으로 '버디버디' '세이클럽 타키' '네이트온'이 있었다. 버디버디와 타키는 2000년대 초반, 네이트온은 2000년대 중후반에 활발히 사용됐다. 버디버디는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메신저로 주로 이용됐으며 타키는 같은 반, 동창회 등의 '클럽'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글을 쓰고 사진을 공유하는 메신저였다. 네이트온은 싸이월드와 연동돼 채팅과 싸이월드 클럽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 이광우씨는 "중학생 때까진 타키가 대세였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싸이월드 클럽과 네이트온이 인기를 끌었다. 여러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채팅방, 1:1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쪽지, 두 기능 모두 인기였다. 현재 카카오톡처럼 프로필 옆에 짧게 적어두는 소개글이나 상태 메시지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발라드 전성기…2007년경부터 아이돌 인기솔의 MP3플레이어에는 브라운 아이즈의 '점점'(2002), 김형중의 '그랬나봐'(2003)가 담겨 있다. 곳곳에선 러브홀릭의 '러브홀릭'(2003),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2009)가 들린다. 비 오는 날 선재가 솔에게 파란색 우산을 씌워주자 윤하의 '우산'(2008)이 흘러나온다. 요즘 10대들에겐 K팝이 가장 핫한 음악 장르지만 2000년대는 발라드 전성기였다. '소몰이 창법'으로 유명한 SG워너비와 버즈, 엠씨더맥스가 활동한 시기로 이들은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K팝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건 2007년에 들어서다. 2000년대 초중반 동방신기가 팬덤이 있었으나 활동기간이 짧아 K팝 산업의 전반적 흥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데뷔해 본격적으로 다들 아이돌에 빠지기 시작했다. 박정윤(32·울산 남구)씨는 "원더걸스의 'Tell Me' 이후 다들 K팝 노래를 즐겨 듣기 시작했던 것 같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는 불씨를 지폈다. 이 밖에도 빅뱅, 2PM, 카라 등 많은 아이돌이 활약했다. 자녀들이 좋아하니 부모님들도 알게 될 정도였다"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배우 김태희가 출연한 아이리버 '딕플' 광고. 위쪽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아이리버 N10, 아이팟 셔플, 학생들이 개조한 폴더 휴대폰. 아이리버·애플 제공·영남일보 DB 〈그래픽=장수현기자〉싸이월드 미니홈피. 〈싸이월드 인스타그램 공식계정 캡처〉
[동 추 거문고 이야기] 〈11〉 강세황과 거문고
시·서·화 모두에 뛰어난 문인이자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이면서 서화 비평 활동을 겸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藝苑)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그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김홍도와 신위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산수화와 거문고로 심신을 달랜 강세황강세황은 거문고도 매우 사랑했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문인들이 거문고를 배우고 틈틈이 연주하며 '문예일치(文藝一致)'를 추구한 예가 드물진 않지만, 그가 거문고를 좋아하게 된 동기와 거문고를 즐긴 사연은 좀 특별하다. 강세황은 '산향재(山響齋)'라는 아호도 사용했다. 이는 젊은 날 자신의 서재에 '산향재(山響齋)'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됐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화가 종병(宗炳·374~443)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종병은 글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화가였다. 그는 늙고 병들면 명산을 둘러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 유람했던 곳의 산수를 모두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고 '금(琴)을 연주하여 그림 속의 모든 산에 메아리치게 하겠다(撫琴動操 欲令衆山皆響)'라고 이야기했다. 종병의 이런 생각과 실천은 '와유(臥遊·누워서 그림 보며 유람한다는 의미)'라는 예술 철학을 낳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병의 글을 읽으며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강세황은 이 이야기 중에서 '산향(山響)'을 가져와 서재 이름으로 삼았다. 강세황은 또 당송대의 문인 구양수(歐陽脩·1007~1072)가 '거문고를 배워서 즐기니 병이 내 몸에 있는 것을 모르겠다'라고 한 글에도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거문고에 뜻을 두어서 그 조용하고 담박한, 깊고 먼 소리를 얻어서 마음과 뜻을 평화롭게 하고 우울한 것을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여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고 좋아하는 산수 그림으로 목마름을 달래던 강세황은 종병과 구양수의 글에서 힘을 얻어 거문고를 익혔던 것이다. 강세황은 서재 네 벽에 모두 산수를 그려 붙이고 그 속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곤 했다. 그는 '그림 속의 여울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약한 바람이 솔 사이로 들어오는 소리, 고기잡이 어부의 노랫소리, 벼랑에 붙은 절간의 저녁 종소리, 숲 사이에서 우는 학 소리, 물속에서 울부짖는 용의 소리들이 거문고 소리와 완전히 어울려 그림이 그림인지, 거문고가 거문고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병을 잊어버리고 소원도 풀게 되어, 마음이 평화로워져서 우울증도 없어지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강세황은 25세 때(1737년) 이런 내용이 담긴 글 '산향기(山響記)'를 썼다. 한양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인 처가의 빈집으로 이사한 후 자신의 작은 서재를 '산향재'라 하고, 이곳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소일했다. 몇 해 후인 1744년, 강세황은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자 아예 처가 동네인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여 30여 년 동안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그림과 거문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안산에서 처가의 인척들뿐만 아니라 여주이씨 집안의 문인 등과 '시서화금주기(詩書畵琴酒碁)'로 교유했고, 그의 그림과 음악 취미는 더욱 경지가 높아져 갔다. 높은 식견과 안목 갖춘 사대부 화가 표암남종문인화 토착화·서양화법 수용 기여 당대 선비 가장회 모습 담은 '현정승집도' 청문당서 음악과 술에 취해 시름 털어내 ◆강세황이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강세황의 거문고는 1747년 그가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에도 나타난다. 현정승집도는 안산 현곡(玄谷)의 청문당(聽聞堂)에서 있었던 '복날 모임'을 그린 작품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초복 다음 날 청문당에 모여서 가장(家獐· 개장국)을 먹고 거문고 연주와 노래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놀았다. 11명이 참석한 이날의 복달임 구성원은 강세황과 그의 처가 인척들(유경종, 유경용, 유성), 강세황의 두 아들(강인, 강완) 등이었다. 이 그림의 거문고 옆에 앉아 오른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가 강세황이다.유경종이 '현정승집도' 그림 옆에 모임을 설명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날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복날에는 가장회(家獐會)를 하는 것이 풍속이다. 정묘년 6월 1일이 초복이었으나, 이날 마침 일이 있어 다음 날로 미루어 현곡(玄谷)의 청문당에서 모임을 열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광지(光之·강세황)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훗날의 볼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모인 사람은 대개 11명이었다. 방안에 앉은 사람이 덕조(德祖·유경종),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유수(有受), 가운데 앉은 사람이 광지, 옆에 앉아 부채를 부치는 사람이 공명(公明), 마루 북쪽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 순호(醇乎), 갓을 벗은 채 머리를 드러내고 대국하는 사람이 박성망, 그 옆에 앉아있는 자가 강우(姜佑), 맨발인 사람이 중목(仲牧)이다. 동자(童子) 두 사람 중 책을 읽고 있는 자가 경집(慶集), 부채를 부치고 있는 자가 산악(山岳)이다. 대청마루 아래에 시립하고 있는 자는 집안의 일꾼 귀남이다. 이때 장맛비가 막 걷히고 초여름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는 가운데,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피곤함을 잊으니 그 흥취가 족히 즐길 만했다. 그림이 완성되므로 덕조가 기문을 짓고, 모든 이들이 각기 시를 지어 이 아래 붙인다.'강세황도 이때 시 한 수를 지어 붙였다. '탁 트인 산 위 누각엔 술잔이 널려 있고/ 졸졸 흐르는 시내가 난간까지 닿았네/ 거문고 가락 솔바람 따라 멀리 흩날리고/ 맑은 날 우박 치듯 바둑돌 소리 차갑구나/ 내키는 대로 시를 읊조리며 다투어 화답을 재촉하고/ 세세히 옮긴 그림 서로 다퉈 돌려 보네/ 촛불 잡고 흠뻑 취하기를 사양하지 마시게/ 흐르는 세월 쏜살같다 애석해 하랴'. 이런 생활 속에서 강세황은 거문고로 마음을 달래며 보냈다. 그에게 거문고는 각별한 동반자였던 것이다. 이듬해인 1748년에 강세황이 그린 두루마리 작품 '지상편도((池上篇圖)'에도 거문고가 등장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속에서 늙어가겠다'는 심정을 노래한 '지상편(池上篇)'이라는 시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서책과 거문고가 놓인 방에 선비 한사람이 앉아있는 작품이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강세황이 1747년에 그린 '현정승집도'. 그림 중 거문고 왼쪽 가운데 앉은 이가 강세황이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그 시대 그 감성, 다시 뜬다 (1) '선업튀'가 쏘아올린 작은 공…Y2K 복고감성 "응답하라"
최근 방영한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이하 '선업튀')의 인기가 뜨겁다. 시청률은 4~5%대지만 높은 화제성을 보이고 있다. 선업튀는 톱스타 류선재(변우석)와 그의 팬 임솔(김혜윤)의 타임슬립 로맨스물인데, 회귀한 시간은 2008년으로 이들에겐 고등학생 때다. 아날로그가 살아 있던 2000년대만의 분위기로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복고 감성의 노래, 패션, 전자기기, SNS 등이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 온라인상에서는 드라마를 보고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이에 30대 직장인들을 만나 200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문화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피처폰 시대…휴대전화 외관 꾸미는 '튜닝' 유행극에서 솔은 폴더폰을 사용하며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전화와 문자, 음악 감상, 사전 이용, 영상 시청 등이 모두 가능하지만 당시엔 한국에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으로 피처폰을 사용했다. 모바일 운영체제가 탑재되지 않아 주로 통화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데 그쳤다. 이에 용도에 따라 별도의 전자기기를 이용해야 했다. 피처폰으로도 음악 감상이 가능하긴 했으나 메모리 용량이 크지 않아 MP3 플레이어를 쓰는 것이 편했다. 휴대전화는 폴더폰·슬라이드폰이 대중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10대 사이 인기를 끈 건 삼성전자의 매직홀폰·고아라폰·노리F, LG전자의 아이스크림 등이었다. MP3는 아이리버 N10과 아이팟 셔플, 전자사전은 아이리버 딕플로 주로 디자인이 아기자기하거나 유명 연예인이 광고하는 상품이었다.이광우(33·대구 동구)씨는 "중학생 땐 전자기기 자체가 드물었지만 고등학생 때로 접어들면서 피처폰 정도는 모두가 갖고 있었고 MP3 플레이어나 전자사전, PMP 등도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자사전은 아이리버 딕플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 한영사전을 필수로 구비해 사물함에 넣어두고 매번 꺼내야 했던 우리에게 전자사전은 엄청난 존재로 다가왔다. 오로지 사전 기능만 있던 기존 전자사전과 달리 딕플은 MP3 플레이어의 기능도 있었다. 당대 최고 스타인 '서울대 출신 김태희'가 모델이었기에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회상했다.최근 젊은 세대에서 '폰꾸'(휴대폰 배경화면 꾸미기)가 유행하듯 이들 사이에서도 휴대폰 꾸미기가 하나의 문화였다. 요즘 스마트폰처럼 커다란 화면이 전면에 나오는 것이 아닌 덮는 형식의 폴더폰이었기에 내부 배경화면보다는 외관을 꾸미는 일이 더 흔했다. 휴대전화를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개조'한다고 하여 '튜닝'이라 불렀다. 김명수(가명·30)씨는 "스티커, 큐빅 등을 붙이기도 했으며 전화를 걸 때 번호를 입력하는 숫자 키패드 안에 색종이를 넣는 경우도 많았다. 키패드에 불이 들어오면 넣은 종이 색으로 영롱한 불빛이 나왔다"고 설명했다.◆헤어 스타일 울프커트·초코송이…패션은 '얼짱' 반윤희 스타일선업튀 등장인물 헤어스타일도 주목할 만하다. 김태성(송건희)은 옆머리를 짧게 치고 윗머리와 뒷머리를 길러 목덜미에 길쭉하게 남긴 '울프커트'〈아래〉, 이현주(서혜원)는 빽빽한 앞머리에 옆머리를 띄운 단발머리 '초코송이 헤어'〈위〉를 하고 있다. 지금은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타일이지만 당시 학교 졸업사진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다.현재 '빈티지'라 불리는 패션은 이때 유행한 것이다. 특히 영향을 미친 건 10대 우상이었던 '싸이월드 얼짱' 반윤희 스타일이다. 독특하지만 힙한 스타일로 당시 패션을 선도했다. 밝고 채도가 강한 색을 많이 입었으며 칼라셔츠, 카고바지 등 펑퍼짐한 옷도 인기였다. 신발은 캔버스화, 시계는 지샥, 가방은 이스트백, 키플링이 사랑받았다. 2000년대 후반엔 외투로 지금도 꾸준히 입는 노스페이스 패딩·바람막이, 아디다스 저지가 유행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2편: '도토리'로 미니홈피 꾸미고 '알'로 문자메시지…카톡세대는 그 감성 모르지걸그룹 '아이브' 멤버 안유진이 재연한 2000년대 '반윤희 패션'.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최은지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번아웃' 셀프 충전법(2) 표정·호흡·말 '마인드 훈련'…뇌과학 기반한 케어
▶일반적인 건강관리법이나 교육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나."자기경영헬스케어는 의학, 뇌과학, 양자물리학을 기반으로 한다. 건강한 심신을 위한 인문과학 융합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평소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 그리고 표정과 행동 등이 감정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육체를 건강하게 활성화하는 것이 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크다. 동시에 생각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절대적이다. 따라서 원하는 생각을 하고, 원하는 감정을 느끼고, 원하는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또 원하는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고 및 육체적인 상태가 균형 있게 준비되어야 한다. 자기경영헬스케어는 뇌과학에 기반한 마인드 훈련 및 의학에 기반한 생각과 표정, 호흡과 말, 동작과 행동 등 심신통합 훈련 기술이 체계화되어 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할 수 있다, 한다, 하고 싶다, 된다, 됐다' 등의 상태로 바뀐다. 아울러 양자물리학에 기반한 인체와 우주의 양자장 사이에 작용하는 에너지를 활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도적인 삶을 실현하도록 돕는다."현대인 대표질환 '번아웃 증후군' 대두지친 심신 회복할 '셀프 충전법' 연구사고력 강화에만 초점 두는 훈련과 달리사고·인체 운영 체계화로 육체에 활력건강·행복·성장·성공 '네마리 토끼'자기경영 지도사 국제인증 자격 취득성인학습자 대상 관련 학사과정 개설 ▶자기경영헬스케어의 구체적인 방법은."자기경영헬스케어는 정신 에너지 충전을 위한 '사고 운영체계'와 육체 에너지 충전을 위한 '인체 운영체계'로 구성된다. '사고 운영체계'는 '충전사고'를 통해 삶에 대한 목적과 목표를 명확하게 확립해 삶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 이와 함께 꿈과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단계다. '인체 운영체계'는 '충전자세'→'충전표정'→'충전스피치'→'충전호흡'→'충전동작'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거쳐 육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초고속으로 충전한다. 다시 말해 인체 운영체계는 육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충전해 건강한 육체를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작용하는 인체 전자기장을 최대한 활성화시켜 건강하고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한 몸 상태를 만들어준다. 특히 인체 운영체계를 통해 몸의 에너지 충전이 활성화되면, 감성뇌의 편도체가 안정화 되면서 이성뇌의 전전두엽 기능이 활성화된다. 이로 인해 미래기억에 대한 집중력이 향상되면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만 가능한 표정과 호흡,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습관화된다. 또 점차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부정적 사고와 감정이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변화된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꿈과 목표가 이미 현실로 실현되어 있는 미래기억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고 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향상된다."▶대구한의대에 전공과목으로 개설되었는데…."2023년부터 성인학습자를 대상으로 자기경영헬스 전공 학사과정이 개설됐다. 현재는 1·2학년 5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학생 대부분이 전공 과정을 통해 스스로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 회복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크게 만족하고 있다. 또 스스로 자기경영헬스케어 역량을 향상시켜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동시에 전공 과정에 대한 확신과 자긍심이 대단하다. 학사과정을 졸업하면 자기경영 지도사 국제인증 자격증 및 평생교육사 국가공인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또 자기경영 헬스케어 관리 및 라이프스타일을 건강하게 설계하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복지관 및 주민센터, 각종 기관 등에서 다양한 심신통합 건강 강의 및 코칭 지도가 가능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강사 직업군으로 활동도 가능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25세 이상이면 누구나 입학이 가능하며, 입학 희망자들은 대구한의대 하이라이프경영학부로 문의를 하면 된다."▶대학 외에 다른 전문기관에서도 자기경영 헬스케어 교육을 받을 수 있나."자기경영헬스케어 전문기업 ㈜헬피니스(대구시 동구 이노밸리로 130, 덕산빌딩 5F)에서도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먼저 자기경영 헬스케어 콘텐츠를 2시간 이내에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자기경영 충전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자기경영 헬스케어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 부분을 카페 형식과 결합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된 프로그램이다.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있다. 한번 다녀 가신 분들의 만족도가 높아서 첫 방문 이후부터는 지인, 가족, 동료 등에게 소개해 다양한 계층에서 주기적으로 찾고 있다. 또 '6시간 원데이 과정'도 있다. 자기경영헬스케어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원데이 과정을 통해서 육체와 정신에 필요한 에너지 충전을 보다 더 집중적으로 교육 받는 프로그램이다. 자기경영헬스 전공생 중에도 원데이 과정을 통해 빠른 효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자기경영 지도사 자격과정'은 자신을 관리하고 싶거나, 전문적인 자격과정에 도전하고 싶은 분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 1회 과정인 원데이 과정보다는 심화과정으로 단계별 교육이 이뤄진다. 자신의 업무에 활용해 능률 향상 효과를 보기도 하고, 새로운 직업군으로 자기의 역량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향후 계획은."대구한의대 하이라이프경영학부에서 운영 중인 성인학습자 대상 자기경영헬스 전공생들의 교육만족도가 높아, 내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통해 심신통합 건강 교육 전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또 자기경영헬스케어의 학문적 연구와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개발해 확산시킬 예정이다. 지역별 교육청과 협력해 청소년을 위한 자기경영헬스케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다. 어르신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해 실버 산업의 주요 모델로 선보일 계획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인간관계 갈등, 각종 스트레스, 만성피로, 무기력, 번아웃 증후군, 자살률 급증 등 사회 구조적 질환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특히 약 2경 규모의 세계 헬스케어 산업시장과 교육 산업시장을 선점하는 것도 목표로 하고 있다."인터뷰를 위해 정 교수를 만나기 전, 기자 역시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집중력은 떨어지고 극도의 육체적 피로감이 반복됐다. 정신적 탈진 상태도 지속됐다. 삶의 질은 자연스럽게 빈약해졌다. 인터뷰 중간중간 뜻하지 않게 '자기경영헬스케어'를 체험하면서 최근 들어서는 번아웃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걱정이 앞섰다. '자기경영헬스케어'를 통해 방전된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난감했다. 텍스트 중심인 기사로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기자처럼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다면 자기경영헬스케어를 실제 체험해 보길 권한다. 문의 010-2677-2049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정성훈 교수는?◇대구한의대 하이라이프 경영학부 자기경영헬스 전공 교수 ◇자기경영헬스케어협회 회장 ◇전) 광운대 겸임교수 ◇2018 세계인명사전 마르퀴즈후즈 후 등재 ◇2016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교육 부문) ◇2016 대한민국창조경영 대상 수상(한국일보 선정) ◇사회복지학 석사, 통합의학박사 수료, 의학박사 과정정성훈 대구한의대 교수가 '심신통합 충전 훈련법'인 자기경영헬스케어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정 교수는 "육체적인 활력을 통해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 자기경영헬스케어의 핵심"이라며 "입체적 사고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올수록 '자기경영헬스케어'가 주목 받을 것"고 강조한다. 〈정성훈 교수 제공〉정성훈 대구한의대 교수가 '심신통합 충전 훈련법'인 자기경영헬스케어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정 교수는 "육체적인 활력을 통해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 자기경영헬스케어의 핵심"이라며 "입체적 사고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올수록 '자기경영헬스케어'가 주목 받을 것"고 강조한다. 〈정성훈 교수 제공〉
2024.05.31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화가들 그림으로 지은 꿈의 화실…자연을 벗 삼아 화가의 길을 걷다
인왕산 자락이면 좋겠다. 시인은 운 좋게도 옥류천 가까운 곳에 헌 집을 구입했다. 그러나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집부터 설계했다. "기와와 백토 장식을 하지 않고, 기둥과 용마루를 크게 하지 않는다. 푸른 홰나무 한 그루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게 하고, 벽오동 한 그루를 사랑채에 심어 서쪽으로 달빛을 받아들이며, 포도넝쿨이 사랑채의 옆을 덮어 햇볕을 가리게 한다." 시인 이이엄 장혼(張混, 1759~1828)이 자신의 '평생지(平生志)'에 쓴 글이다. 시인다운 정취가 가득한 아름다운 집이다. 10년이 흘러, 그는 계획대로 집을 지었다. 시인에게 집이 곧 작업실이듯 화가에게도 집은 작업실을 의미한다. 옛 화가들이 꿈꾼 화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시대 회화를 들춰 본다.◆인왕산 품에 안긴 정선의 화실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52세에 인왕산 기슭의 옥류동으로 이사한 후 자신이 꿈꾸던 집을 지었다. 그리고 생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봄이 되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인왕산 중턱 필운대(弼雲臺)에 올라 봄꽃 놀이를 즐겼다. 때로는 인왕산에 올라 시를 읊는 '아회(雅會)'도 가졌다. 인왕산과 가까운 백운대 일대는 조선시대에 문인과 예술인이 추앙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일찍이 인왕산의 위세를 알아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무계정사를 짓고 무계동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왕자와 사대부들이 모여들어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다. 청풍계 골짜기에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태고정을 지어 노론 학자와 문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같이 들리는 골짜기"의 옥류동에 터를 잡자 1683년 손자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여섯 명의 아들을 위해 육청헌을 지어 살았다.김수항의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진경문화를 주도한 학자였다. 인왕산 자락에서 이웃으로 살던 정선과 진경시의 대가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선비화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1761) 등은 김창흡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며 '진경시대'를 이끌었다. 정선의 '필운대상춘도(弼雲臺賞春圖)'도 필운대가 무대다. "멀리 오른쪽에 뾰족한 관악산이 있고, 그 아래 이층 누각의 숭례문이, 왼쪽에는 남산이 있고, 필운대 아래 서촌마을이 펼쳐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반면에 '독서여가(讀書餘暇)'는 오십대 초반 백악산 아래 유란동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렸다.세월 담은 소나무 흐르는 물 가까이화려한 정원 배경 이인문 '연정수업'고동서화 곁에 두고 한가로운 한때김홍도식 화실의 단면 '포의풍류도'인왕산 옥류동에 터 잡은 겸재 정선인생 후반의 모습 수많은 작품으로화가의 운치있는 집 작품의 산실로단아한 집 풍경이 한 장의 스냅사진 같다. 지붕을 비스듬히 처리하여 슬쩍 방안을 보여준다. 뒷마당에는 향나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공간에 변화가 생겼다. 한낮의 햇살 아래 향나무가 기름진 가운데, 하늘색 꽃잎으로 장식된 서가에는 책이 쌓여 있다. 불을 밝힌 듯한 촛대와 매화를 꽂았을 법한 화병이 놓여 있다. 서가의 열린 문 안쪽에는 폭포와 노송을 배치한 산수화가 장쾌하다. 바닥에는 계절에 맞게 시원한 돗자리를 깔아 놓았다. 방과 연결된 툇마루에는 부채를 든 선비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꽃을 감상한다. 바로 정선이다.마당에는 마루 쪽으로 신발을 벗어 놓았고, 두 개의 화분이 마당 가운데 있다. 물받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방안에 두었던 것을 잠시 마당에 내다 놓은 것 같다.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시선을 끈다. 손에 든 부채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멀리 산이 있고, 강에는 배 한 척이 유람을 즐기는 그림이다. 정선은 옥류동에서 인생 후반의 삶을 그림으로 남겼다. '인곡유거(仁谷幽居)'도 그중 하나다. 서가에서 책을 읽는 정선의 모습이 보이고, 마당에는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키 낮은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몄다.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위로 포도 넝쿨이 나무를 타고 올라 운치를 자아낸다. 그가 설계한 집은 작품의 산실이 되었다.◆이인문과 김홍도가 꿈꾼 화실세대가 바뀌어도 옥류동은 여전히 문인과 화가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송석원(松石園) 천수경(千壽慶, ?~1818)이 옥류동에 송석원을 짓자 여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천수경은 중인계층의 문학 단체인 '송석원시사회(松石園詩社會)'를 결성하여 시회를 열었다. 시인 장혼을 비롯하여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4)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같은 화가들도 모임에 참석하여 서양화법을 구사한 시화(詩畵)를 그렸다. 바로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이다. 그들은 희귀한 그림과 서적으로 장식한 서재에 지인들을 초대하여 그림과 서적을 감상하며 예술을 즐겼다. 이인문은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리고자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평생 화원화가로 공직생활을 한 그는 화실을 겸비한 집을 설계하다가 먼저 그림으로 실행했다. '연정수업(蓮亭授業)'은 화려하게 꾸민 정원을 배경으로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풍경이다.그가 생각한 계획에 맞춰 중앙에 연못을 조성했다. 수련이 연못을 채우고, 우람한 괴석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연못에는 배 한 척을 정박해 두었다. 또 못 안에 정자를 지어 경관을 감상하도록 했다. 못 주위에는 소나무를 심고, 사계절 꽃이 피도록 조경해 놓았다. 그 사이로 사슴이 뛰어논다. 연못 주변에 소년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고목이 우거진 뒷마당에서 시동이 차를 끓이는 중이다. 육각형의 정자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공부를 하다가 잠시 담소를 나눈다. 이인문은 과연 이 그림 같은 꿈을 현실에서 이루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화실은 주인인 화가를 닮는 법이어서 이 그림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김홍도는 '연정수업'과 정반대로 그렸다. 자연에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비파를 연주하는 선비가 주인공인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가 그것인데, 이 그림은 '김홍도 식' 화실의 단면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포의풍류도'는 김홍도가 가장 바쁜 사십대에 자신을 반추하며 그린 작품이다. 고동서화를 곁에 두고 맨발을 드러낸 선비의 한가로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벼슬하지 않는 선비'란 뜻의 '포의풍류도'는 김홍도의 소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비파를 연주하는 사방관을 쓴 선비와 주변의 진귀한 고동서화들. 모두가 유교와 도교를 상징하는 기물들이다. 도자기에 영지버섯과 사슴뿔을 꽂아두었다. 파초의 큰 이파리가 있고, 붓과 벼루, 먹이 놓여 있다. 생황과 칼, 호리병도 옆에 두었다. 호리병에는 잘 익은 술이 들어 있으리라. 모두 그의 애장품들이다. 물론 서책과 더불어 그림 그릴 두루마리까지 있다. 그림 왼쪽에는 "흙벽에 아름다운 창을 내고 한평생 벼슬 없는 선비로, 그 속에서 시를 읊조리며 살리라"라는 화제를 적었다. 중국 명대의 문인화가 미공(眉公)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글이다. 진계유가 자연 속에서 매화를 감상하며 시를 지었듯이 김홍도도 자연인으로 살고자 한 것 같다. 현실은 그를 한가롭게 놓아주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큼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옛 화가들이 반할 나의 화실17년 전, 시인 장혼의 글에 취해 화실에 대한 로망을 가졌고, 나도 어느덧 화실을 두었다. 방 두 칸을 터서 조성한 내 화실은 무엇보다도 넓은 창으로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어 좋다.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진경이다. 때때로 구름과 바람과 비를 감상하며, 멀리 호수까지 볼 수 있다. 성향 좋은 오디오를 설치하여 양떼처럼 음악도 방목한다. 벽마다 책으로 채우고, 친구들과 나눈 작품을 걸어 두었다. 주변에 물감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그림 그릴 화판이 나를 기다린다. 옛 화가들의 화실이 부럽지 않다.이인문 '연정수업', 종이에 엷은 색, 38.1×5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정선 '독서여가', 비단에 채색, 24.0×16.8㎝, 간송미술관 소장김홍도 '포의풍류도', 종이에 엷은 색, 27.9×37.0㎝, 개인 소장김남희(화가)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번아웃 셀프 충전법' (1) "심신 에너지 스스로 충전 '자기경영'…인체 활력 스위치 ON 창조력 발현"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무기력하다. 열정 가득했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성취감도 없고 공감 능력도 떨어진다. 뿐만 아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쉽게 피로해진다. 커피를 서너 잔 마셔도 피곤함은 가시지 않는다. 심지어 삶의 방향을 잃은 듯 우울감마저 든다. 이런 증상을 겪는다면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해야 한다.번아웃 증후군은 갑자기 불이 꺼진 듯 사람의 에너지가 방전된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체는 물론 정신적 에너지가 모두 소진돼 일상에서의 모든 일에 무기력해진 상태를 말한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대표적인 사회적 질환으로, 무기력증은 물론 자기혐오에 빠지는 무서운 질병이다. 최근 들어서는 직장인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한다. 캠퍼스가 도전과 성장의 기회가 아닌 고된 생존의 전쟁터가 되면서 번아웃의 어둡고 깊은 터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대부분은 육체와 정신적 에너지가 방전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정성훈 대구한의대 자기경영헬스 전공 교수는 20여 년 동안 육체와 정신적 방전 상태에 빠진 현대인에게 스스로 충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알려왔다. 몸과 마음의 균형잡힌 에너지를 언제든지 '셀프 충전' 할 수 있는 '자기경영헬스케어'를 개발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정교수는 "컴퓨터가 운영체계(Operating System)에 의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상호 연계해 작동을 하듯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도 균형 잡힌 자기경영 운영체계(Self Management Operating System)가 갖춰질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입체적 사고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올수록 '자기경영헬스케어'가 주목 받을 것"이라고 강조한다.▶자기경영헬스케어가 무엇인가."자기경영헬스케어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신통합 충전 훈련법'이다. 소진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를 스스로 충전할 수 있도록 도와서, 건강한 삶을 추구하도록 돕는 교육콘텐츠다.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육체와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정신을 스스로 균형 있게 만들어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처럼 몸이 아프거나 질병에 걸리면 목표에 집중하고 매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몸의 회복을 무시하고 정신력만 강조하면 잠시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기 마련이다. 신경계의 생리적 특성상 운동신경이 활성화되어야만 사고 신경도 활성화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강관련 교육이나 훈련법이 사고력 강화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심신이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자기경영헬스케어는 육체적인 활력을 통해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고 감정과 정서를 조절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꿈과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왜 지금 자기경영헬스케어가 중요한가."물질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반면에 정신문화는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인간의 정서는 갈수록 메말라가고 정신은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무엇보다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 무기력, 공황장애, 치매, 뇌졸중, 번아웃 증후군 등 다양한 사회적 질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대안도 없이 약물치료에 의존하고 주어진 환경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살률 급증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지친 육체와 정신을 스스로 회복하고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소진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스스로 충전해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 등을 해결하는 자기경영헬스케어가 필요한 시대이다. 자기경영헬스케어 역량을 갖추게 되면 건강, 행복, 성장, 성공이라는 네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20여 년 동안 육체와 정신적 방전 상태에 빠진 현대인에게 스스로 충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알려 온 정성훈 대구한의대 자기경영헬스 전공 교수.
[동 추 거문고 이야기] 〈10〉탁영금(濯纓琴)
탁영금(濯纓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고의 이름이다.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이 1490년에 만들어 타던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탁영종가(종손 김상인)의 소유인 이 거문고는 대구국립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거문고 윗면 중앙에 '탁영금(濯纓琴)'이라고 새겨져 있고, 한쪽 끝부분에 학이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김일손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길이 160㎝, 너비 19㎝, 높이 10㎝.절의를 대표하는 선비로 존경을 받는 김일손은 자신이 사관으로 재직할 때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등을 사초(史草)에 실어 촉발된 무오사화(1498년)로 능지처참의 형을 당했다. 왕의 총애 속에 요직을 거친 그는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시절, 독서당에서 여러 선비와 더불어 전문가에게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다. 그가 어느 집 대문짝을 구해 만든 탁영금은 약 450년이 지난 뒤 당시 탁영종가 종손(김헌수)이 전북 완주의 어느 집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종손이 그 집을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고 설득해 거문고를 인수할 수 있게 되었다. 종손은 거문고를 가져온 후 1979년 청도의 탁영종택 사당에 고유하고, 그 전말을 담은 비석 '탁영금(濯纓琴)'을 사당 앞마당에 세웠다. 이후 탁영종가는 탁영금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으며, 1988년에 보물로 지정받게 되었다.거문고 윗면에는 김일손 사후에 옥강(玉岡)이라는 선비가 탁영 김일손의 거문고라는 사실을 밝히는 글을 전서로 새겨 놓았다. 뒷면에는 김일손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가의 가르침은 쉽게 다하고/ 불가의 가르침도 마침내 마르지만/ 우리 유가의 신비한 뜻은/ 아무리 써도 시들지 않네/ 이 거문고는/나의 약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북돋우고/ 나의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로다.' 김일손은 탁영금에 대한 내력을 담은 글인 '서육현배(書六絃背)'를 비롯해 거문고 관련 시와 글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청도 종택 사당에 탁영금 비석 세워김일손 詩·탁영종택 소장 경위 새겨보물로 지정, 대구국립박물관 기탁거문고 간직, 사람의 성정 다스려中에는 없는 '괘'로 오현금 만들어내면으로 옛 것 따르고 마음 단속 ◆김일손의 '육현금 뒷면에 쓰다(書六絃背)''옛사람이 흔히 거문고를 만들어 간직한 것은 거문고로 사람의 성정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순(舜)임금은 오현을 썼고, 문왕(文王)은 칠현을 썼으니 육현은 옛 법이 아니다. 진(晉)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오자 국상 왕산악이 그 거문고를 개조하여 육현으로 만들어 지금도 쓰고 있는 것이며, 신라에 전해져서 극종(克宗)이란 사람이 평조(平調)와 우조(羽調)의 가락을 작곡하여 육현에 맞추었다고 한다. 육현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육현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하겠다.계축년(1493) 겨울에 나는 신개지, 강사호, 김자헌, 이과지, 이사성과 더불어 교대로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여가에 거문고를 배웠다. 권향지도 홍문관에서 때때로 내왕하여 배우면서 말하기를 "여러 군자는 옛것을 좋아하면서 어찌하여 오현이나 혹은 칠현을 쓰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지금의 음악은 옛날 음악에 말미암은 것이다. 소강절(昭康節)이 옛날 옷인 심의(深衣)를 입지 않고, 요즘 사람은 당연히 요즘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취하였다"라고 답했다. 권향지는 또 "왕산악이 육현을 타는데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어서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고, 그 뒤에 학(鶴)자를 생력하고 현금이라고 하였다. 거문고 하나에 학 한 마리가 짝을 이루는데 이 거문고는 외짝일세"라고 말했다. 이에 내가 이렇게 말했다. "학은 먹을 것을 생각하는데 거문고는 먹지 않고, 학은 욕심이 있는데 거문고는 욕심이 없으니, 나는 욕심 없는 것을 따르겠다. 그러나 그림의 학은 욕심이 없을 것이니, 나는 장차 거문고에 학을 그려서 그 무리를 따를 것이다."그리고 용헌 거사 이종준에게 학을 그려 달라고 청하였다. 평소 거문고를 만들어 비치해 두고자 하였으나 재목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동화문(東華門) 밖에 있는 한 노파의 집에서 얻으니 바로 사립문 문설주였다. 노파에게 그 재목이 오래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노파의 말이 "대략 100년 되었는데 한쪽 지도리는 부서져 벌써 밥 짓는데 사용했다"고 하였다. 거문고를 만들어 타보니 소리는 맑은데, 월(越·거문고 밑바닥에 있는 구멍)과 빈지(賓池)에 아직도 사립문을 만들었을 때의 못 구멍이 셋이나 있으므로 우연히 옛날 초미금(焦尾琴)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월의 오른쪽에 새길 글을 이렇게 짓는다. 물건이란 외롭지 않아서 마땅히 짝을 만나게 되지만(物不孤 當遇匹), 백세의 긴 세월이 멀어지면 혹 기필하기 어렵다네(曠百世 惑難必). 아, 이 오동나무는 나를 잃지 않았도다(噫此桐 不我失). 서로가 기다린 것이 아니라면 누굴 위해서 나왔겠는가(非相待 爲誰出).'◆'오현금 뒤에 쓰다(書五絃背)' '나는 이미 육현금을 만들어 독서당에 두고 또 오현금을 만들어 집에 두었다. 그 길이는 석 자요, 너비는 여섯 치로 하였다. 요즘의 자를 써서 옛 모양을 취한 것이다. 육현에서 하나를 빼고 다섯으로 한 것은 복잡함을 덜자는 것이요, 16괘에서 넷을 빼고 12괘로 한 것은 역시 복잡을 덜어서 12율(律)을 보존하자는 것이다. 줄이 다섯인지라 세 줄은 괘 위에 있고 두 줄은 괘 곁에 있으며, 괘는 오동나무 공명통 복판에 바르게 고정되어 기울거나 바른 상태를 잃지 않는다. 괘라는 것은 방언(方言)이다. 이는 비록 옛 제도에 전부 부합한다고는 못하겠지만, 또한 옛 제도와 크게 어긋나지도 않는다. 남풍(南風, 순임금이 지었다는 남풍가)을 연주하니, 소리가 청아하여 태고 시절에 남긴 음률과 같았다. 손님이 "육현금은 독서당에 공개하고 오현금은 집안에 두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묻기에, 내가 "외양으로는 지금의 것을 따르나, 내면으로는 옛것을 따르고자 함이다"라고 대답했다.' 김일손이 오현금을 만들고 난 뒤 쓴 이 글을 보면, 그가 만든 오현금에는 중국 금(琴)에는 없는 괘가 있어 순임금의 오현금보다는 우리나라의 거문고에 더 가까운 듯하다.김일손은 '오현금명(五絃琴銘)'이라는 시도 남겼다. '재목도 좋다마는/ 만든 솜씨도 훌륭하다/ 거문고 줄 매워/ 내 서당 위로 올라와서/ 남풍가를 연주하니/ 순임금 가락이 담긴 듯하네'.거문고를 얹어 두는 시렁을 만든 후 지은 '금가명(琴架銘)'도 전한다. '거문고는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라 시렁을 만들어 높이는 것이니 소리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국립대구박물관이 수장(收藏)하고 있는 탁영금.1490년에 제작되었고, 1988년 보물로 지정됐다.청도 탁영종택 사당 앞에 서 있는 '탁영금(濯纓琴)' 비석. 1979년에 세운 이 비석의 전면에는 탁영금에 새겨진 김일손의 시가, 뒷면에는 탁영금을 탁영종택에 소장하게 된 경위 등이 새겨져 있다.
2024.05.24
[사람의 서재] 한평생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
독일어가 모국어였으나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 신앙이 없었다. 올해로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프란츠 카프카'〈사진〉 이야기다. 한평생 이방인으로 살다 간 그는 인간의 존재와 불안, 소외를 통찰하고 표현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카프카는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했다. 내향적이었던 그는 독선적이며 엄격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에게 아버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였다. 독일계 고등학교를 거쳐 카를 페르디난트대에 진학했다.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대학 졸업 후에는 법원에서 1년간 시보로 일했다. 이후 프라하에 있는 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겨 은퇴하기 전까지 일했다. 그 사이 카프카 전집의 편집자가 된 M.브로트를 알게 됐고 문학에 대한 열망이 생겨 1905년 첫 단편 '어떤 싸움의 기록'을 썼다. 그의 소설은 초기작부터 공동체에 대한 동경이 배어 있었는데,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으로 인해 고독과 외로움을 안고 지냈기 때문이다.1912년은 그에게 문학인으로서의 결실기였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변신'을 집필하기 시작해 1916년 간행했다. '실종자' '심판' 등도 썼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하고 1924년 간행했다. 1917년엔 폐결핵을 진단받아 요양을 하면서 장편소설 '성(城)' '배고픈 예술가' 등을 썼다. 출세 등의 중압감에 쫓기며 글을 쓰다 영양부족까지 겹쳐 1924년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프란츠 카프카 단편소설 '변신'. 문학동네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2030 세대가 이끄는 독서트렌드(3)…색색의 문화공간 '대구 이색 북카페' 소개
최근 젊은 세대에게 독서가 '힙한' 취미로 여겨지는 가운데 이들 사이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색적이면서도 책을 읽기 좋은 대구지역 카페 두 곳을 소개한다.Bar에서 책 읽으며 한잔 '음주독서'◆대구 중구 동문동 '실재계'교동 술집골목 근처에 위치해 있지만 내부만큼은 고즈넉하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운영하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 4층에 자리하는데, 계단 입구 벽면에 기형도 시인의 시 '오래된 서적'이 붙어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어두운 분위기가 손님을 반긴다. 자리마다 조명 스탠드를 배치해 독서에 집중하도록 꾸며졌다. 곳곳에 헌책도 진열돼 있어 읽을 수 있다. 빈티지하면서도 깔끔한 인테리어는 덤이다.저녁에는 바로 운영돼 커피와 함께 칵테일, 위스키도 판매한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 카드에는 영화·소설 제목, 관념 등으로 음료가 소개돼 있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고 만든 티 '단순한 열정', 사르트르를 떠올리며 만든 칵테일 '실존주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모티프가 된 '드라이브마이카' 등이 있다. 이를 하나씩 읽어나가며 메뉴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해 독서와 함께 간접적으로 예술을 즐기기도 충분하다.싱그러운 통창뷰에서 '독서 피크◆대구 중구 동인동 '여름다방'역시 조용히 책 읽기 좋은 카페다. 이름에 '여름'이 들어가 있지만 탁 트인 유리창으로 가로수와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사계절 모두 방문하기 좋다. 신발을 벗고 카페에 구비된 천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면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네주는데 안에는 메뉴판이 들어 있다. 고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지향한다는 문구와 함께. 핸드드립 커피를 시키면 보온병에 담겨 나온다. 벽 쪽 서랍 위에는 초등학교 일기장이 몇 개 놓여 있는데 방명록이다. 어릴 적 여름날 피크닉에 온 듯한 동심의 감성이 느껴진다.계절별 과일을 활용한 다양한 디저트가 나오니 이를 즐기기도 좋다. 혼자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인기인 카페니 웨이팅을 해야 할 수 있다. 전화 후 방문하길 추천한다. 일요일은 휴무.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대구 중구 동문동 '실재계'. 곳곳에 헌책이 진열돼 있으며 테이블마다 조명 스탠드가 구비돼 있어 독서를 즐기기 좋다.대구 중구 동인동 '여름다방' 창측 자리. 핸드드립 커피를 시키니 아기자기한 감성의 보온병에 담겨 나왔다.
실마리 안 보이는 의대 증원 갈등
의대 정원 증원 청원 5만 명 돌파…'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 운영 중단
보도의 그 후, 뉴스 후(後)
반월당·봉산·두류 지하도상가 점포 '일반경쟁입찰' 붙인다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용띠 7월 27일 ( 음 6월 22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