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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추 거문고 이야기]〈8〉줄 없는 거문고(하) 정신은 찾지 않고 껍데기만 좇을 뿐…고요함 속 찾은 깨달음의 경지
"옛말에 이르기를 거문고는 악(樂)의 으뜸이라, 군자가 항상 사용하여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군자가 아니지만 거문고 하나를 지니고 줄도 갖추지 않고서 어루만지며 즐겼더니,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다시 줄을 갖추어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길게 혹은 짧게 타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옛날 진나라 도연명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두고 그것으로 뜻을 밝힐 뿐이었는데, 나는 이 구구한 거문고를 가지고 그 소리를 들으려 하니 어찌 옛 사람을 본받겠는가?" 시·거문고·술을 너무나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던 이규보(1168~1241)가 남긴 내용이다. 그 역시 도연명의 무현금의 세계를 동경했음을 알 수 있다. 줄 없는 거문고 '무현금'의 세계는 이처럼 한국의 선비들에게도 깊이 스며들었다.소리가 없음에 느끼는 오묘함 체득귀한 줄이나 채 가져도 부질 없는 것귀로 듣는게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선비들에 깊이 스며든 무현금 세계◆조선의 선비와 무현금이규보는 도연명의 무현금 세계를 찬미하는 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다음은 도연명의 시에 대해 읊은 작품 '독도잠시(讀陶潛詩)'이다. 도잠(陶潛)은 도연명의 본명이다. 연명(淵明)은 도잠의 아호이다. '내가 사랑하는 도연명은(吾愛陶淵明)/ 그 말이 너무도 평담하다(吐語淡而粹)/ 항상 줄 없는 거문고 어루만졌다지(常撫無絃琴)/ 그러기에 시도 모두 그렇구나(其詩一如此)/ 지극한 음률은 소리가 없는 법이니(至音本無聲)/ 무슨 줄이 필요하겠는가(何勞絃上指)/ 지극한 말은 문체가 없는 법인데(至言本無文)/ 어찌 꾸밈을 일삼으랴(安事彫鑿費)/ 자연에서 나온 그 평화로운 말들(平和出天然)/ 음미할수록 진미를 느끼네(久嚼知醇味)/ 인끈 풀고 전원에 돌아와(解印歸田園)/ 세 갈래 좁은 길 소요하면서(逍遙三徑裏)/ 술 없으면 친구 찾아가(無酒亦從人)/ 날마다 취해 쓰러졌지(頹然日日醉)/ 한 평상에 희황이 누웠으니(一榻臥羲皇)/ 맑은 바람 솔솔 불어온다(淸風颯然至)/ 순수한 태고 시절 백성이요(熙熙太古民)/ 고상하고 뛰어난 선비로세( 卓行士)/ 그 시 읽고 그 사람 상상하며(讀詩想見人)/ 천년토록 높은 의리 숭앙하리(千載仰高義)'.이규보의 또 다른 시 '소금(素琴)'이다. '천뢰(우주)는 처음부터 소리 없는데/ 흩어져 만규(萬竅)의 소리를 내는구나/ 오동은 본래 고요한 것이나/ 다른 힘을 빌려서 소리가 나네/ 내가 줄 없는 거문고로/ 유수(流水)곡 한 곡을 타네/ 지음(知音)이 듣기를 원하지도 않고/ 속물이 듣는 것도 꺼리지 않네/ 다만 내 마음을 쏟아/ 애오라지 한두 줄 퉁겨 보네/ 곡조가 끝나면 또 고요하게 침묵하니/ 아득히 옛사람의 뜻과 합치되네'화담(花潭) 서경덕(1489~1456)은 '무현금명(無絃琴銘)'을 남겼다. 무현금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琴而無絃)/ 본체는 놓아두고 작용을 뺀 것이다(存體去用)/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非誠去用)/ 고요함에 움직임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靜基含動)/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聽之聲上)/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不若聽之於無聲)/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樂之刑上)/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不若樂之於無刑)/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樂之於無刑)/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乃得其)/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聽之於無聲)/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乃得其妙)/ 밖으로는 있음에서 체득하지만(外得於有)/ 안으로는 없음에서 깨닫게 된다(外得於無)/ 그 가운데에서 흥취 얻음을 생각하면(顧得趣平其中)/ 어찌 줄에 얽매이겠는가(爰有事於絃上工夫)/그 줄은 쓰지 않고(不用其絃)/ 그 줄의 줄 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用其絃絃律外官商)/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吾得其天)/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樂之以音)/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樂其音)/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音非聽之以耳)/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聽之以心)/ 저 종자기가(彼哉子期)/ 어찌 나의 거문고 소리를 귀로 들으리(曷耳吾琴)'종자기(鍾子期·BC 387~299)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의 사람이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종자기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종자기가 죽은 후에 백아는 지음(知音)을 잃었다고 탄식하며 거문고를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조선 전기 문신인 이영서(?~1450)가 남긴 시 '무현금(無絃琴)'이다. 여기에서도 이런 선비의 삶을 잘 읽을 수 있다. '도연명이 거문고 하나를 가졌는데(淵明自有一張琴)/ 줄을 매지 않았지만 뜻은 더욱 심오했었네(不被朱絃思轉深)/ 참된 맛을 어찌 거문고 소리로써 얻을 것인가(眞趣豈能聲上得)/ 천기란 모름지기 고요함 속에서 찾아진다네(天機須向靜中尋)/ 좋은 거문고 줄과 채는 모두 부질없는 것(鯤絃鐵撥渾閑事)/ 유수와 고산을 켰다는 악곡도 헛애만 쓴 것이네(流水高山 苦心)/ 옛 거문고 가락 속인의 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니(古調未應諧俗耳)/ 천년 세월이 흘러가도 그 곡조 아는 이 없으리(悠悠千載少知音)' '곤현(鯤絃)'은 곤어(鯤魚) 가죽으로 만든 줄로, 좋은 거문고 줄을 의미한다. 곤어는 북해에 산다는 상상의 큰 물고기이다. 그리고 '철발(鐵撥)'은 쇠로 만든 채(현을 퉁기는 도구)를 말한다. 좋은 악기나 연주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것이 관건임을 이야기하고 있다.줄이 없는 거문고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도연명은 무현금 하나를 가지고 어루만지면서 심오한 뜻을 추구했다. 참다운 맛은 거문고에서 나오는 소리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귀한 거문고 줄이나 채를 가졌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백아가 아양곡을 잘 타고 종자기가 그 가락을 잘 알아들었다는 것도 헛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연명이 줄 없는 거문고에서 들었던 그 곡조를 알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을 뜯을 줄은 모르니,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이처럼 선비들, 군자와 성인이 되고자 했던 옛 지식인들은 그들이 추구한 인격을 완성해 가는 동반자로 무현금을 가까이했던 것이다.무현금의 세계를 추구한 것은 선비들뿐만이 아니다. 선사들, 불교 수행자들은 '몰현금(沒絃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줄 없는 거문고라는 비유를 통해 탐진치(貪嗔痴)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이경윤(1545~1611)의 '월하탄금도'(부분). 이 그림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김봉규 bg4290@naver.com
2024.04.26
[사람의 서재] 우울·파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오랜 기간 많은 청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인간 실격'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우울과 절망에 빠진 젊은이의 심리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는데,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다.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7남 4녀 중 열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쓰시마 집안은 고리대금업을 통해 대부호 가문으로 성장했는데, 이런 집안의 역사는 다자이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였고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창 시절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도쿄제국대 불어불문과에 입학한 후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 1930년 연인과 투신자살을 기도했지만 홀로 살아남았다. 1935년 소설 '역행'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27세가 되던 해 "유언을 쓰는 마음으로 썼다"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했다. 그는 또다시 아쿠타가와상에 응모했고 발표에 앞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책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첨부했다. "부디 저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주십시오. 바라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깊은 경의와 비밀스러운 혈족감이 이와 같은 부탁의 말씀을 드리게 한 것 같습니다. (중략) '만년' 이 한 권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분명 괜찮은 작품일 것입니다."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는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지금까지의 도덕이나 문학에 반발해 새로운 인간성 회복을 찾아 가자고 주장하는 '무뢰파(無賴派)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인간 실격'은 '퇴폐와 파멸의 정조'를 기저에 깔고 있는 일본 무뢰파 문학의 대표작이다.이후 3년 뒤인 1948년 연인과 함께 또다시 투신자살을 기도했고 생을 마감했다. 향년 38세. 유서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에 죽습니다"라고 썼다. 조현희기자다자이 오사무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0> 이병철, 삼성물산 '반도호텔'로 이전
삼성물산은 사세 확장에 따라 종로2가 영보빌딩에서 1954년 7월1일 본사를 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반도호텔 빌딩 530호로 이전했다. 반도호텔은 노구치 시타가우라는 민간인이 1936년에 세운 호텔로 당시 최고의 규모였다. 반도호텔 이전에 1914년에 세워진 조선호텔이 국내 최초의 호화호텔이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총독부의 철도국이 설립한 호텔이었다. 어느 날 노구치 시타가우는 사람을 만나려고 조선호텔 정문에 들어섰다. 그러자 수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장을 저지했다. 옷차림이 너무 허접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입장을 하긴 했는데 기분이 나빴다. 그는 흥남 질소비료 공장을 돌아보다가 서울에 약속이 있어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급히 달려오는 중이었다.그날 밤 그는 조선호텔을 능가하는 호텔을 설립하려고 결심했다. 노구치 시타가우는 당시 일본질소 콘체른의 회장으로 아시아 최대의 압록강 수풍댐과 흥남질소 등과 그 산하에 약 26개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불화수소를 공급하지 않아 문제 됐던 신월화학공업도 그의 소유였다. 그는 3층인 조선호텔보다 두 배 이상 높은 8층의 반도호텔을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세웠다. 지하 1층~지상 8층 객실 111개에 15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는 객실이 69개밖에 없던 조선호텔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반도호텔은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최고층 건물 중 하나였다. 당시 반도호텔은 5층까지는 사무실, 6·7·8층은 호텔 객실이었다. 반도호텔 내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3대의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필자도 초등학생 시절인 1962년경 그걸 타본 적이 있다.당시 삼성물산공사는 그 호텔의 5층 30호실을 사용했다. 삼성물산 본사는 40평 크기였으며 이병철, 조홍제 부사장 등 총 19명이 근무했다. 당시 이병철과 조홍제는 가운데에 사무실을 놓고 양쪽 끝에 집무실에서 근무했다. 삼성물산의 조직은 경리부, 영업부, 부산사무소, 도쿄지점 등이었다. 삼성물산의 주요 수출품은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고 그 외에 약간의 공예품과 모직물 등이 있었다. 수출에 비해 수입 품목은 매우 다양하여 비료, 종이류, 섬유, 비철금속, 목재류, 화공약품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1957년 삼성물산의 연간 수출입실적은 1천50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연간 교역량의 약 3.81%를 차지했다. 삼성물산은 나날이 성장하여 1959년 1월15일에는 총자본금이 1억5천만환이었으며 종업원은 142명에 달했다.제당업 성공 뒤이을 후속 사업 논의면방직산업 진출 최우선 고려했으나시설영세·외국의존 높은 모직 선택조홍제 FOA 원조금 받아내 독일행제안가보다 20만달러 낮은 값에 계약이 거래가 韓·獨간 민간무역 '제1호'◆제일모직의 설립 새 사무실에서 제당업으로 성공한 이병철과 조홍제는 또 다른 사업을 찾는다. 삼성그룹의 수뇌부가 이사회를 열어 업종을 선택하는 회의가 열렸다. 1954년 초의 일이다. 처음에는 면방직 산업의 진출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공장의 설립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조홍제가 상공부 당국과 의견을 나눠보니 "면방직 공업은 이미 여러 기업가들이 공장을 건설 중에 있고 또 기존시설도 대부분 복구되어 가동 중에 있는 만큼 더 이상 면방공장의 신설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시설규모가 영세하여 많은 양을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는 모직 분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것이 당국의 의견이었다. 조홍제는 상공당국과 여러 차례에 걸쳐 협의한 끝에 면방직이 아닌 모직 공장을 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상공부 당국이 이러한 견해를 낸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1953년 말, 즉 6·25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국내에 면방직 방적기가 무려 15만7천809추가 있었고 직기 수는 3천715대였다. 6·25전쟁 직전에는 무려 9천75대였던 것이 전쟁 와중에 상당수 파손되어 3분의 1 규모로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상당 부분이 계속 복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모방직 방적기는 6천347추에 106대의 직기만 가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면방직에 비해 모방직 방적기가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모방직의 경우 당시 한국에는 마산과 밀양 등지에 소규모의 모직 시설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양복지와 같은 고급 모직물은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마카오 신사한때 '마카오 신사'라는 유행어는 영국에서 수입된 양복지로 양복을 해 입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양복에 쓰이는 모방직 제품 대부분이 외제였다. 따라서 조홍제는 현대적인 대규모 공장을 세워 가동한다면 수입 대체 산업으로도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모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생산이 시작되면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조홍제는 공장 설비를 위한 자금 지원을 얻기 위해 미국 원조 당국과 접촉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러한 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외국인이 공장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공장을 가동할 능력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모직공장이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방적, 즉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든 후 염색, 가공, 직포 등의 공정을 거쳐야 하고 그것들은 각기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었으므로 한국의 기술 가지고는 어렵다는 것이다.그러나 조홍제는 이러한 공정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판단한다. 즉 '울톱 제조공정'을 제외한 최신식 일관생산시설 1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홍제는 미국의 FOA에서 대외원조자금 60만달러를 받아내게 되었다. 조홍제는 일본의 '대일본모직'과 미국의 모직공장을 둘러보았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다시 조홍제는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시에 있는 기계무역상인 C.일리스라는 회사를 찾아갔다. 조홍제는 일본에서 독일경제학과를 나왔으므로 나름대로 독일의 기계 산업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스핀바우 사와 협상조홍제는 여러 회사를 방문한 끝에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계설비가 성능 면에서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그롬베크 상무를 만나 스핀바우 사의 기계 성능에 관해 문의하였다. 그롬베크 상무는 조홍제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가장 믿을만한 회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는 서류 파일을 조홍제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모직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온도, 습도, 전력, 노동력, 교통, 용수, 수질, 종업원의 기술, 지도, 훈련내용 등 무려 48개 항목의 문제점과 대응책이 적혀 있었다. 조홍제와 스핀바우 사 간의 가격 흥정이 독일 현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스핀바우 사는 80만달러가 넘는 가격을 제시했다. 자금이 60만달러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브레멘의 호텔 방에 누워 이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날 조홍제는 스핀바우 사의 그롬베크 상무에게 "내가 준비한 달러는 60만달러뿐입니다. 우리는 달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핀바우 사 사장은 기곗값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기계 자체의 성능이 우수한 것만 계속 강조하였다. 다시 조홍제가 반론을 제기했다.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에게는 그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60만달러밖에 준비를 못해서 이것 가지고는 5천추의 모직 생산시설밖에 갖추지 못하지만 얼마 안 가서 몇 배로 증설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탈리아, 프랑스의 기계회사와도 가격을 협상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핀바우 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이 회사와 거래하고 싶습니다. 대신 기계가격은 내가 제시한 선에 맞추어 주십시오"라고 떼를 썼다.스핀바우 사 사장은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 얼마 후 아침에, 호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조 사장, 축하합니다." 결국 스핀바우와 조홍제 간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계약내용은 5천추 1식을 60만달러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스핀바우 사는 당시의 기계판매로 19만5천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의 민간무역 제1호였다. 그 얼마 후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술자들이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한국의 산업 사상 민간 기업이 이룩한 최초의 기술 도입이었다. 제일모직의 선진기술 도입과 연구개발은 최첨단 모직기술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작가·전경련 교수제일모직공장을 둘러보는 이병철. 1962년 집무실에 앉아 있는 조홍제. 이영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에 나온 반도 호텔.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3) 서운희의 앤틱 지식·정보
오래된 도자기를 보면 '언제 만들어졌지?' '어느 회사 제품이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찾기 어렵다. 이런 갈증을 해결해줄 '가뭄 속 단비' 같은 책이 지난달 발간됐다. 앤티크(앤틱, Antique) 도자기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백과사전,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사진>다.저자인 서운희는 약 10년간 유럽 앤티크 도자기를 모으고 있는 수집가다. 세계 3대 도자기인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을 비롯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보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작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앤티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번 신간을 발간했다. 기존 해외 서적은 찾기도 쉽지 않고, 찾아도 도자기의 이름이 회사명으로 이름이 표기된 경우가 있어 국내 독자들이 앤티크 도자기에 관한 책을 접하거나 모르는 도자기의 이름을 알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자는 자신이 보유한 여러 소장품들을 바탕으로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백과사전식으로 구성해 설명한다.앤티크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게재할 내용이 매우 풍부해 한 권의 책으로는 그 내용을 모두 담기 모자라며 방대하다. 이에 저자는 '지식'편과 '정보'편을 나눠 두 권으로 발간했다. 두 권의 저서는 내용이 상호 연결돼 있다. 지식편은 앤티크 도자기의 스토리·팩토리(제조사)·모양·연표·명장·기념 접시 등의 내용이, 정보편은 지식편과 마찬가지로 스토리·팩토리·기념 접시에 더해 이마리 패턴·제조 번호·양식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온 가족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쉽게 풀어썼다. 큰 책에 저자가 직접 찍은 다양한 시각자료도 들어가 있어 잡지를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앤티크는 일반적으로 오래전에 만들어진, 100년 이상 된 도자기(ceramic), 포슬린(porcelain), 포터리(pottery)를 일컫는다. 이 책에선 이를 일일이 구분해 부르기엔 번거로운 면이 있어 통칭해 '앤틱'이라 부른다. 'Antique'란 단어도 외래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땐 '앤티크'라 표기하지만, 본책에선 일반적인 독자들이 통상적으로 부르는 '앤틱(엔틱)'으로 표기했다.저자는 서문에서 "박물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거리감 있는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수집 가능한 다양한 유럽 도자기를 '앤틱'이라 칭해 이 책에 나타냈다"며 "오래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2) 당대 최고 장인이 완성한 빈티지 도자기…백마크·디자인엔 문화 코드 담겨
"원래 수집에 취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앤티크 도자기를 접하게 됐는데 이건 언제 만들어졌고 이름은 뭘까, 어느 회사 제품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찾아보고 모으게 됐어요. 몇 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희 집에 방문한 사람 중에는 박물관급이라 말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웃음)." 서운희 도서출판 앤틱 대표는 '앤티크(앤틱, Antique) 도자기' 수집가다. 경북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서 대표는 금융기관 근무를 시작으로 커리어를 쌓았는데, 도자기나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앤티크 도자기를 수집하게 된 건 '앎의 즐거움'으로 시작됐다. 10여 년 전 앤티크 도자기를 우연히 접한 후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과거의 물건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금융가 일하다 수집가로 옛것서 새것 아는 재미 빠져 정보 찾고 모으다 책까지 내 명가 고유의 紋章 백마크 위조 구별하려 새기기 시작 제조사·시대별 다르게 표기 도자기 예술에 숨ㅅ은 역사 십자군 승전 700주년 접시나 청나라 영향 받은 디자인도도자기의 종주국은 중국이지만 그가 수집하는 앤티크 도자기는 주로 유럽에서 제조된 것들이다. '백마크'(Back mark)의 매력 때문이다. 오래된 도자기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문자나 숫자, 작은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백마크다. 유럽의 도자기 회사들은 도자기를 제조할 때마다 밑바닥에 상표인 백마크를 정교하게 새긴다. 17세기까지 유럽에는 토기나 도기 수준의 연질도만 있었는데, 1710년 작센 공국의 마이센(Meissen)에서 도기를 처음 생산했다. 마이센은 자기를 제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조품이나 열등한 모조품으로부터 자사 제품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깨닫고 진품을 나타내기 위해 마크 표시를 그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이후 백마크 표기는 유럽의 다른 도자기 제조사로도 이어졌다. 백마크는 제조 회사에 따라, 심지어는 같은 회사라도 제조 시기에 따라 다르게 표기된다. 영국 민턴(Minton)의 경우 1891년부터 1912년 사이 제조된 제품에는 기본 인쇄 마크에 'England'란 단어가 새겨져 있지만 이후 1950년까지는 'Made in England'라는 문구가 종종 추가된다. 서 대표는 이 점을 매력으로 꼽았다. "보통 오래된 도자기를 보면 예쁘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도자기마다, 심지어는 같은 제조 회사라도 시기에 따라 백마크 디자인이 다 달라요. 그런 새로운 정보들을 알아가는 게 정말 즐겁더라고요. 모르는 백마크는 알 때까지 찾아본다고 몇 달이 걸린 적도 있어요. 온·오프라인 서적을 모두 들여다봤죠." 앤티크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품이다. 장인들은 시대마다 고유한 스타일을 창출했는데, 접시에 담긴 그림이 당시 중요한 사건이나 문화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은 1888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기념접시를 발행하고 있는데, 한 해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접시 앞면에 쓰인 연도는 접시에 담긴 사실이 발생한 해를 의미한다. 그는 1919년 제조된 단네브로그(Dannebrog) 700주년 기념 접시로 설명했다. "하늘에는 덴마크 국기가 있고, 그 밑에는 군인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그림이죠. 1219년 십자군전쟁 때 하늘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색 깃발이 덴마크 진지로 내려오면서 덴마크 군대가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붉은색 깃발을 단네브로그라 해요. 그래서 덴마크에서는 이 붉은 깃발을 축복으로 여겨 국기로 정하게 됐어요. 그 일의 7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접시예요. 앤티크 도자기를 통해 역사적 사건도 엿볼 수 있는 거죠."제조사에 따라 그 회사만의 고유한 패턴도 나타난다. 로얄 코펜하겐의 경우 독일 마이센에서 매각한 '블루 플루티드'가 있다. 중국의 청화백자를 참고해 디자인한 푸른 밀짚꽃 문양 패턴이다. 영국의 와일만(Wileman)과 쉘리(Shelley)는 굉장히 다양한 패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마리 패턴'이 유명하다. 18세기 초 영국이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비결을 알게 되자 일본 도자기의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다. 이마리는 일본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를 수출하는 아리타 인근 항구 이름이다. 와일만과 쉘리는 19~20세기 화려한 금색으로 칠해진 붉은 주황색 장식과 함께 언더 글레이즈를 사용한 이마리 스타일로 화려한 패턴을 만들었다.이런 재미로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도자기들은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집을 장식하고 있다. 거실부터 주방, 방 안까지 다양한 회사, 여러 패턴의 제품들이 진열돼 있다. 세계 3대 도자기인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을 비롯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도자기를 구하는 방법이 어렵지 않았냐고 물으니 최근 국내에서도 앤티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간편한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요즘은 판매 시스템이 잘돼 있는 것 같아요. 국내에서도 여러 앤티크 도자기 셀러들이 활동하고 계셔서 그분들을 통해 하나둘씩 구입했어요. 오프라인 매장도 꽤 있어요"라고 했다."정말 흥미롭죠.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저 혼자 알고 있는 게 아쉽더라고요." 서 대표는 그의 신간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를 펴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미 2021년 앤티크 도자기의 백마크에 관한 책을 발간했지만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필요성을 느껴서다. 그는 "처음 펴낸 책에는 백마크에 관한 내용만 있었어요. 최근 앤티크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다 다양하게 쓰면 앤티크를 처음 접하는 분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좋은 건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라며 웃었다. 글=조현희기자·사진=도서출판 앤틱서운희 대표가 소장 중인 영국 로졸 웨어의 도자기.로얄 덜튼의 셰익스피어 시리즈 제품들. 도자기에 표현된 셰익스피어.아래는 도자기로, 뚜껑은 실버 플레이트 혹은 니켈 등으로 만든 비스킷 배럴.영국 웰링턴 차이나 찻잔 세트. 그래픽=장수현기자서운희 대표의 자택. 세계 3대 앤티크 회사의 도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앤티크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1) 컬렉터 서운희씨가 말하는 빈티지 도자기 수집의 미학
수집은 아주 재미있는 취미다. 다양한 물건과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쾌락과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에 따라서는 어떤 문화나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수집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물건 중 하나가 '앤티크(앤틱, Antique)'다. 앤티크란 형용사로 옛날의, 고대의, 고풍의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명사로 치면 골동품이다.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 된 물건을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쓰임새가 넓어져 100년이 지나지 않아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 오래된 물건이면 앤티크로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앤티크 수집의 가장 큰 매력은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앤티크는 현대 제품들과는 다른 미(美)를 갖고 있어 매력적인데, 예스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희소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잘 살펴보면 물건이 만들어진 시대·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앤티크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제조된다. 특히 유럽의 왕조와 귀족들이 즐겨 쓰던 것들은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것이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은 1888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기념접시를 발행하고 있다. 접시 앞면에 쓰인 연도는 접시에 담긴 중요한 사실이 발생한 해다. 매년 특정한 사건이나 행사 등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다.이처럼 앤티크 수집은 단순히 독특한 물건을 모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앎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같은 매력으로 유럽에서 앤티크 수집은 일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취미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 생소한 문화로 여겨진다. 앤티크에 대한 정보도 그리 많지 않아 입문의 벽도 존재한다. 이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던 중 최근 앤티크 관련 책이 나왔다.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다. 두 책은 상호 연결돼 있는 책으로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이 체계적으로 담긴 백과사전이다.저자인 서운희 도서출판 앤틱 대표는 10여 년 전 앤티크 도자기를 우연히 접하게 됐다가 '이건 언제 만들어졌지?' '이름은 뭐지?' '어느 회사 제품이지?' 등과 같은 궁금증을 갖고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집한 앤티크 도자기는 현재 셀 수 없을 만큼 모였다. 그는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수요층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처럼 궁금증을 갖고 앤티크 도자기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앤티크 전문 출판사를 차려 책을 발간했다. 2021년 12월에 펴낸 '서운희의 앤틱(엔틱) 백마크'가 첫 저서다. 앤티크 도자기의 백마크(밑바닥 상표)에 관한 책으로는 국내 최초다. 앤티크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할 정도로 첫 저서부터 반응이 좋았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요청도 줄이어 이번 신간 두 권을 펴내게 됐다고 한다.앤티크 도자기와 서 대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집에 방문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가득한 그의 집은 유럽 여러 회사에서 나온 오래된 도자기들로 채워진 '박물관'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매력적인 앤티크 도자기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최은지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세계 홀리는 'K-라면' (2) 중국서 밀가루 늘여 만든 납면, 일본 인스턴트 라멘 거쳐 한국의 라면으로
도약기중일전쟁 비상식량이던 납면日사업가 치킨라멘으로 개발삼양식품이 제조기술 배워와1963년 한국 최초 라면 선보여황금기1980년대 신라면·너구리 등장사발면·짜파게티 출시 다양화전성기유튜브 '매운맛 챌린지' 열풍한류 타고 수출 효자품목 등극 ◆中→日→韓…삼양의 '치킨라면'이 시초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중국 북방에서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잡아 늘여 만든 납면이 중국군의 비상 식량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일본으로 전파됐다.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인 안도모모후쿠가 1958년 미군이 구호품으로 지급한 밀가루를 활용해 개발한 '치킨라멘'이 오늘날 인스턴트 라면의 시작이다.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생산된 것은 1963년 9월15일이다.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초 전중윤 회장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봤고,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5만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100g에 10원이었는데, 커피 한 잔이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그러나 밥과 국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은 초기에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1965년 나온 정부의 혼분식(混粉食)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이 정책은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를 줄이고 혼식과 분식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이때부터 라면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음식으로 다가왔고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해 롯데공업(현 농심)에서도 롯데라면을 생산했다. 1966년 연 240만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개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파병 장병들의 보급품으로 납품되기도 했다. 삼양식품은 1963년 총 42명의 종업원만이 몸담고 있었지만, 약 10년 후인 1970년 중반엔 무려 5천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거대 제조사로 성장했다.◆황금기 도약…신라면·짜파게티의 등장1970년대가 라면의 도약기였다면 1980년대는 황금기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찾는 상품 다수가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절대빈곤 해소를 위한 기업인들의 의지, 급속한 경제발전 등으로 라면 수요 증가에 탄력이 더해지면서 제조사들은 새로운 상품을 계속 출시하며 제품의 다종화에 주력했다. 삼양라면은 1980년대 초반에만 '뽀빠이면' '귀빈면' '떡라면' '라면1번지' 등을 선보였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의 '라면의 기원과 국내 보급의 역사'에 따르면, 이에 대항하는 농심은 기념비적인 제품을 출시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981년에 시판되기 시작한 '사발면'으로, 이는 용기를 개봉한 이후 물을 넣어 즉석라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조된 제품이다. 이어 1982년에는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 1983년엔 '안성탕면', 1984년엔 '짜파게티', 1986년엔 '신라면'을 출시했다. 특히 신라면은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을 받는 제품으로 2020년 국내 라면시장 전체 매출의 15.97% 규모로 1위다.스포츠는 한국인의 라면 사랑에 더욱 불을 붙였다. 1984년 LA올림픽 1호 금메달리스트 레슬링의 김원기는 "조금이라도 양을 늘리려고 일부러 라면을 불려서 먹었다"라고 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 사상 최초의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회자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관중석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도 세계에 중계되며 한국 컵라면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형 컵라면은 1972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봉지라면보다 두 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는 부진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 이후 컵라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한류 열풍…미디어 통해 세계 각지로 쏙쏙21세기 들어 세계화가 본격화된 가운데 한국의 라면은 'K-푸드'가 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난 12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우리나라 농식품 수출액은 22억달러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라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30.1% 증가해 2억740만달러로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농심의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경우 2021년 처음으로 해외 매출(5천억원)이 국내 매출(4천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신라면 국내 매출은 5천억원(41%), 해외 매출은 7천100억원(59%)에 달한다.수출의 일등공신은 K-콘텐츠다. 전 세계 사람들이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 등의 OTT를 통해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접하면서 라면의 인기도 뜨거워졌다. K-라면은 단순히 제품만 알려지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레시피와 재미있게 먹는 법까지 더해져 널리 퍼졌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원 안〉는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라면에 채끝살 등을 얹은 요리인데, 인스턴트 라면도 고급 음식의 식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이를 통해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K-라면 레시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에는 '라면땅'(끓이지 않은 라면 면을 양념 스프에 묻힌 것)을 먹는 장면이 등장해 라면 과자에 대한 외국인들의 궁금증도 유발했다. '먹거리 경험 소비' 문화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SNS, 유튜브 등에서 매운 음식 먹기에 도전하는 소위 '매운맛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매운 라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삼양식품이 2012년 출시한 불닭볶음면은 국내외 매운 라면 열풍을 선풍적으로 일으킨 상품인데, 신라면보다 매워 매운 음식에 익숙한 한국인이 먹어도 땀을 흘릴 맛이다. 구독자 59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는 영국인 유튜버다. 2014년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 반응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는데, 외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불닭볶음면에 대한 궁금증, 시식 후기 등이 줄이었다. 이후 '불닭볶음면 먹기 챌린지'도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불닭볶음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출시 해인 2012년 1억원이 되지 않던 불닭브랜드 수출액은 꾸준히 상승해 지난해 6천800억원을 달성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올해도 해외법인을 중심으로 현지 영업마케팅을 강화하며 해외사업 성장세를 이어갈 계획"이라며 "수출 시장 다변화와 소스, 냉동식품 등으로의 수출 품목 확대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삼양식품 초기 광고. 창업주인 전중윤 회장은 국내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생각해 라면을 출시했다. 지난 12일 서울 성동구 플랜트란스에서 농심 짜파게티 출시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짜파게티 분식점' 팝업스토어에서 라면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컵라면을 구입한 관광객들. 591만 유튜버 '영국남자'가 2014년 올린 '런던의 불닭볶음면 도전' 영상.
2024.04.19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날, 옛 그림 속 노승을 찾아서
햇살 한 줌이 새순에 닿는다.햇살이 이불 위에 모여 겨울을 털어낸다.식물에도 손길이 뻗었다.생명을 움트게 한다.평온한 봄날이다.해바라기하는 꽃나무 곁에서차를 마신다.나른해진다.금방 꿈결로 접어든다.멀리 따스한 햇살 아래 잠 든 노승이 보인다.그도 나처럼 꿈속일까.도인을 찾아서 조선시대에 유행한 선승화(禪僧畵) 속으로 들어간다.◆낮잠 든 노승과 이 잡는 노승낮잠에 빠진 스님을 그린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은 차비대령화원을 지낸 중인 출신이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문하에서 남종문인화풍을 받아들였지만 풍속화의 마지막 전통을 이었다. 그의 '오수삼매(午睡三昧)'는 한 명의 인물이 화면을 장악한 선승화이다. 주름진 옷 선이 꿈틀거리는 용 같다. 마치 도를 가슴에 품은 스님이 중생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듯하다. 화가는 질문에 답을 하듯 '오수삼매'를 그려 보인다.한낮 햇살 아래 노승이 무릎을 세운 채 잠에 들었다. 성근 짚신을 신은 스님의 맨발이 처연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얼굴을 묻은 자세가 엄숙하다. 짓눌린 높은 콧대에 감은 눈, 검은 눈썹, 반듯한 이마가 수려하고, 주름진 얼굴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깎은 머리가 희끗하다. 머리카락에서 깊은 도력이 묻어난다. 가사 아래 드러난 목덜미가 꿋꿋하다. 곧고 건조한 필선으로 옷깃을 그렸다. 웅크린 어깨에는 강한 먹을 가했고, 풀어헤친 장삼은 농담에 변화를 주었다. 옷 주름이 날개를 접은 천사의 폼이다.햇살이 기운다. 깊은 잠은 바람 소리, 새소리도 멀리한다. 꿈속을 거닐다가 적정(寂靜)에 든 노승은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환한 가슴을 열어 극락으로 들어가는 순간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이' 때문이었다. 겨우내 입었던 장삼에 여러 마리의 이가 기생하고 있었다. 노승은 옷 속에 있는 이를 잡아서 놓아주기로 한다. 스님이 옷을 풀어헤쳐 이를 잡는다. 이 광경을 기막히게 그린 화가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이다. 조영석은 서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대부 화가이다. 그는 관념적인 산수화나 인물화를 그리기보다 현실생활에 종사하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풍속화의 새 시대를 연 시대정신이 앞선 화가였다. 사대부의 신분이어서 그림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의 재능에 순응하며 살았다. 노승을 그린 작품에는 그의 위트와 순발력이 넘친다. 특히 '이 잡는 노승'은 소나무 등걸에 앉아 이를 잡아서 놓아주는 노승의 여유로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햇살이 좋아서 산책에 나선 노승은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소나무 등걸에 앉은 스님은 옷자락을 펼쳤다. 겨울 동안 동거한 제법 살이 오른 이를 이사 보내기 위해서다. 이를 잡으려는 노승과 잡히지 않으려는 이 사이의 결전이 시작되었다.노승의 예리한 눈빛에 이가 딱 걸린 모양이다. 스님은 입술을 앙다문 채 눈빛을 모은다. 이를 놓치지 않을 태세다. 이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스님의 손길에 백기를 든다. 성근 머리에 흰털이 길게 자란 눈썹, 이를 잡기 위해서 숨을 참은 듯 상기된 얼굴, 스님의 앉은 자세 등에서 조영석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필선으로 옷 주름을 그렸고, 물기 가득한 담묵으로 나무를 표현했다. 사실적인 인물과 남종화풍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것은 조영석이기에 가능했다.◆호리병 속의 박쥐와 스님의 뒷모습뒷모습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신선이 있다. 호리병을 들고 길을 가던 중 잠시 쉬려고 앉았다. 불현듯 호리병을 연다. 순간 호리병에서 박쥐가 날아간다. 이 모습을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이 그림으로 남겼다. 바로 '박쥐를 날리는 신선'이다. 그는 선승화로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더 인기를 얻은 신필(神筆)로 불린 화가다. 대표작인 '달마도' 못지않게 빼어난, '박쥐를 날리는 신선'도 득의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신선과 박쥐가 등장하는 도석(道釋)인물화다. 왜 신선과 박쥐가 한 쌍을 이루었을까. 박쥐는 부처의 제자 16나한 중 열세 번째 인계타 존자의 전생 모습이다. 어느 날, 박쥐가 살고 있던 동굴에 지나가던 상인들이 추위를 피해서 들어왔다. 그중 한 상인이 불을 피우고 경전을 읽었다. 생솔가지가 타면서 동굴에 연기가 꽉 찼다. 죽음이 닥쳐와도 박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경 읽는 소리에 심취했다. 이후 박쥐는 죽어서 사람으로 환생했다. 불교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한 아라한과를 얻었다. 박쥐는 호리병 속에 있다가 중생을 구제할 순간이 오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박쥐를 날리는 신선'은 박쥐가 전생(前生)을 벗고 아라한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신선 옆에 놓인 호리병에는 박쥐가 빠져나간 뒤 한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신선은 가볍게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박쥐를 본다. 넓은 등을 보이며 앉은 신선은 더벅머리에 이마가 살짝 보인다. 화가의 표현력이 익살맞다. 살짝 드러난 이마가 빛을 발하며 신선의 앞모습을 유추케 한다. 대담한 필획으로 처리한 두꺼운 옷과 화가의 무르익은 텅 빈 배경에서 묘한 긴장감이 돈다. 왼쪽 위에 쓴 '연담'이 인물과 조화를 이룬다.호리병에서 빠져나간 박쥐는 아라한이 되어 한 사람의 죽음을 배웅하러 간다. 박쥐는 화가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화가는 죽음을 예감하고 혼신을 다해서 염불을 외운다. 꿈에서 깬 화가는 구름을 타고 아미타불 곁으로 가는 스님을 그린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염불서승(念佛西昇)'이다. 그의 바람은 그림처럼 스님이 되어 이생을 떠나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김홍도는 생을 반추해 본다. 화가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왕에게 총애도 받았다. 풍속화가로 알려졌지만 신선도를 잘 그려서 화원(畵員) 화가로 발탁되었다. 화려한 삶도 잠시 인생의 덧없음을 감지한다. 화가로서 마지막 힘을 다해 '염불서승'을 그린다. '염불서승'은 염불을 하며 서방 정토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김홍도는 아미타불을 친견하러 갈 때 입을 수의(壽衣)를 생전에 준비했다. 모시 천에 자신을 스님의 모습으로 그렸다. 옅은 하늘색 위에 구름이 물결을 이루며 떠 있다. 구름 위에는 연꽃이 만발하게 장식되어 있다. 승복 차림의 스님은 극락세계를 바라본다. 편안하게 앉은 자세가 평화롭다. 화가의 기량이 넘치는 필력을 가볍게 처리하여 머리와 귀, 꼿꼿한 목선, 갸름한 얼굴선이 해맑다. 눈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찍어 마치 부처의 눈에 점안(點眼) 의식을 한 것 같다. 김홍도만의 노련함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광배를 그려서 득도한 스님의 열반을 표시하였다. 왼쪽 위에는 '단로(檀老)'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그 아래 자신의 호를 새긴 두 개의 낙관을 두었다. 김홍도는 아마 '염불서승'의 수의를 입고 아미타불 곁으로 갔을 것이다.◆베란다의 아미타불오수를 즐긴 스님이 몸을 일으킨다. 덩달아 나도 잠을 깬다. 알싸한 꽃향기가 가득하다. 새가 우짖는다. 정신을 차리니 우리 집 베란다다. 차가 식었다. 꽃나무 위로 햇살이 찬란하다. 콩알만 한 연둣빛 점이 박힌 춘란은 생명을 틔우느라 분주하다. 40년 넘게 나와 함께한 관음죽이 등대처럼 서 있다. 관음죽은 그림 속의 노승이 애타게 찾던 나의 아미타불이다.김홍도, '염불서승', 모시에 옅은 채색. 20.8×28.7㎝. 유숙, '오수삼매', 종이에 수묵, 40.4x28㎝.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옅은 색, 23.9×17.3㎝. 김남희(화가)
2024.04.12
[사람의 서재] 서머싯 몸
소설가로 더 유명하지만 극작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명작을 남기고 간 작가가 있다. 인생관을 강하고 명석한 문체로 묘사하고,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풍자 희극을 써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서머싯 몸이다.몸은 1874년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고문변호사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자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숙부 밑에서 자랐다. 한동안 독일에 유학한 뒤 런던의 한 의대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97년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했다. 1897년 의대를 졸업하고는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해 소설, 희곡을 계속 썼다. 1907~1908년 그의 희곡 4편이 런던 4곳의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되면서 이름을 떨쳤다.한국에서도 많이 읽히는 '인간의 굴레'는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몸이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이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 1919년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모티프를 따온 소설 '달과 6펜스'〈사진〉를 펴내면서 호평을 받고 작가로서 지위를 확립했다.그는 91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해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소설은 '케이크와 맥주'(1930), '면도날'(1944), 희곡은 '순환'(1921 초연), '높은 사람들'(1923), '서밍업'(1938)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2) "까칠하고 강인한 모습 선인장, 나와 비슷해 자주 그리죠"
"사실 제 그림은 한풀이 같은 거예요. 갑자기 제게 닥친 불행이 제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으니까요.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세상은 봄꽃으로 환한데 마음은 우울하다. 대구 대명동 한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이환상(47)씨를 만났다. 손목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 힘겹게 휠체어를 끌고 면회실로 왔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장기 입원 환자다.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이씨는 계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술을 가까이하며 살았다. 개인전도 열고, 대학 졸업 후에는 달서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도란도란 어울려 지냈다. 그런 건강한 청년에게 2018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다. 누나들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착한 막내아들에게 세계는 야속했다. 어느 날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일어서는데, 방 안에 있던 서랍장 손잡이에 몸이 부딪히면서 목뼈가 부러졌다. 수술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스스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는 5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원래 오른손잡이인데…왼쪽 팔로 그리고 있죠."감금 아닌 감금 생활은 그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병상 생활 중 한 번도 그린 적 없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라도 그려야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나에게 갤럭시탭을 사달라 부탁해 하나씩 그렸다.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지만, 왼쪽 어깨와 팔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어 손등에 펜을 고정해 그리고 있다. 원래 그는 오른손잡이다. 불편한 팔을 움직이다 보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8시간을 꼬박 그려야 한 개를 완성할 수 있다.그가 들고 온 갤럭시탭으로 이씨의 그림을 함께 봤다. 폴더에는 벌써 300개가 넘는 작품들이 있었다. 한(恨)과 동시에 삶에 대한 집념이 느껴졌다. 소재도 가족의 얼굴, 자화상, 가수, 사물, 풍경화 등 다양하다. 재미있게 본 방송 프로그램, 자주 듣는 음악 등이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그는 '싱어게인'을 즐겨 보는데, 방송을 보면서 '안개'라는 노래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원곡 가수인 정훈희를 그린 적이 있다. 이씨는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리는데, 많게는 하루에 5개가 올라올 때도 있다. 이제 그의 일상은 다시 그림 그리기가 된 것이다.송두리째 바뀐 일상서양화 전공한 후 개인전도서랍장 부딪혀 목뼈 부러져수술 받았지만 5년째 병상다시 화업이 생활로거동 가능한 왼팔에 펜 고정 태블릿 피시 사용 그림 그려그림으로 찾은 자유떠나고 싶어서… 욕하려고…기존 화풍 벗어나 소재 선택누나 "작은 전시 열어주고파""예전에 개인전을 준비할 때는 일관된 스타일, 화풍(畵風)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 그게 조금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있어요. 몸은 자유롭지 못 하지만 머리는 자유로워진 거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유난히 선인장 그림이 많아 이유를 물어보니 선인장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제가 좀 까칠해요.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을 쓰죠. 선인장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시만 있을 뿐이지, 사막에서도 오래 버티고 살아가니까. 그 모습이 제 모습 같아요." 신발, 발가락, 캐리어, 자동차 등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무의식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발과 발가락은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에 대한 답답함, 캐리어와 자동차는 어디로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제가 태국을 안 가봤거든요. 유튜브에서 여행 영상을 많이 봤는데 태국이 정말 가고 싶더라고요. 슬리퍼 신고 캐리어 몰고 태국에 가고 싶다, 이런 마음을 표현한 거죠."음식이 나오는 그림들도 있어 대뜸 물었다. "그림에 음식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네요. 이 가지는 뭔가요?"그는 욕하기 위해 그린 거라고 답했다. 설마 '가지가지' 한다는 뜻이냐며 다시 물으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조금 짜증 나는 일이 있었는데, 속으로 저 사람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며 그린 거〈원 안〉예요. 그래서 가지도 두 개죠." 그림을 하나씩 설명해주는 그의 눈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본인만의 철학이 보였다. "정말 단순하죠. 그림 그리고, 예술 한다고 해서 특별한 게 없어요. 억지로 특별하게 그리려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고 어렵기만 하죠. 가장 일상적인 게 특별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면회 시간이 끝나가 이씨의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씨는 "아직은 다른 계획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몸은 움직일 순 없지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데 작은 희망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이씨의 누나 이정임씨는 "동생만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지지만 늘 마음이 아프죠. 지난해 갤럭시탭을 구입해 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불편한 몸으로 누워서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동생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기회가 되면 작은 전시회라도 열어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그림. 선인장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의 신발 그림. 무의식 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가 노래 '안개'를 듣고 감명 받아 그린 원곡 가수 정훈희.
[위클리 키워드] 성인 10명 중 3명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 가장 고려"
사교육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위기 속에 학군, 학원가 등과 인접한 소위 '학세권' 단지에 대한 선호 현상이 높아지고 있다. 성인 10명 중 3명은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부동산R114는 지난달 21∼31일 전국 성인남녀 5천4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 집 마련에 대한 수요자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지난 8일 밝혔다. 그 결과 거주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지 요건으로 응답자의 29.7%가 '교육환경'을 꼽았다. 이어 교통(25.1%), 주거 쾌적성(21.2%), 편의시설(15.2%) 순으로 나타났다.아파트를 구입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는 40.6%가 브랜드를 꼽았다. 상위권 브랜드 아파트가 품질, 설계, 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하위권 브랜드 아파트보다 신뢰도가 높고 향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뒤로는 조경 및 커뮤니티 시설(20.8%), 단지 규모(19.9%), 실내 평면 구조(18.0%) 순으로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최은지기자
[동 추 거문고 이야기] 〈7〉줄 없는 거문고(상) 전원시인 도연명 '줄 없는 거문고' 뜯으며 마음의 소리 읊다
거문고(琴)는 도연명에서 유래한 '줄 없는 거문고', 즉 무현금(無絃琴)의 정신이 부각되면서 선비들로부터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되었다. 관리 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전원시인으로 살았던 도연명(365~427)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선비 시인이다. 도연명은 거문고를 사랑하고 연주하기도 했는데, 무현금도 곁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거래사'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긴 도연명에 대해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했다.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었다.대표작 '귀거래사' 남긴 中 대문호관직 내려놓고 전원에 묻혀 낭만 즐겨이백 등 후대 시인 그의 문장 추종'무현금' 바람직한 선비 표상으로◆도연명과 무현금이런 도연명의 삶을 기록한 양(梁)나라 소통(蕭統·501~531)의 '도연명전'은 '도연명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거문고를 늘 곁에 두고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마음을 기탁하곤 했다(淵明不解音律, 而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意)'라고 적고 있다.그리고 소통은 도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인격과 문학을 높게 평가했다. '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넘어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며, 아울러 굳은 정절로써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도연명 사후 60년 정도 지나서 심약(沈約)이 지은 '송서(宋書)' 중 '은일열전(隱逸列傳)'에서도 도연명의 무현금에 대해 거의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도연명은 그의 작품이나 기록을 보면, 거문고를 전혀 연주할 줄 몰랐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명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면서 이와 같이 표현한 후 무현금의 세계는 바람직한 선비를 표상하는 경지를 상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돌아가리라. 교제를 그만두고 어울림을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는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메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리면, 장차 서쪽 밭에서 농사일을 해야겠다. 혹은 천을 두른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숙하게 물고랑을 찾아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길의 언덕을 지난다.'그리고 51세에 자식들을 위해 쓴 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는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뜨기도 했단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거문고 연주를 배워 연주할 줄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며 즐기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세계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도연명은 줄 없는 거문고를 지니고 수시로 거기에 마음을 실어 달래면서, 스스로도 '다만 거문고가 지닌 아취를 알면 그뿐이지, 어찌 수고롭게 줄을 튕겨 소리를 낼 것인가(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거문고를 곁에 두고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소리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며 깨달음을 얻는 데 있었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은 도연명을 사모하는 친구를 위해 지어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漢)나라 제갈후(諸葛侯)가 은거할 때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불고 칠현금(七絃琴)을 연주하며 평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다가, 고기가 물을 만나듯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자 우뚝이 삼분천하(三分天下) 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 저 도연명 또한 제갈량을 사모한 자였기에 깊이 좋아하는 뜻을 자신의 이름에 드러내고서 마침내 무현금(無絃琴)을 두고 그에 회포를 부쳤으니, 아마도 제갈량과 같은 체(體)를 가지고 있었으나 쓰임이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 그대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도연명이 제갈량을 좋아했던 이유이니, 이것으로 충분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벗은 힘쓸지어다.'◆'무현금'에 대한 중국인들의 찬사도연명 별세 후 많은 이들이 그의 무현금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중 먼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0)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栗陽)'이다.'도연명은 날마다 취해서/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봄이 온 줄 모르네/ 꾸미지 않은 거문고엔 본래 줄이 없고/ 술을 거를 때는 칡베 두건을 쓰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쪽 창문 아래에서/ 스스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말하네/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 가까이 했던 벗을 한번 만나 볼는지' 도령(陶令)은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 벼슬을 지냈다 하여 칭한 말이다. 오류(五柳)는 도연명이 자신의 집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컬었던 데서 유래한다.그리고 도연명은 여름철 한가로울 때에 북쪽 창 아래에 눕고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희황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이자 상고 시대의 제왕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은 복희씨가 살던 상고 시대야말로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지던 때라 믿어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율리(栗里)는 도연명이 살던 마을로, 여기서는 시인의 친구가 현령으로 있는 율양을 이야기한다. 백거이(772~846)는 '구중유일사(丘中有一士)'라는 시를 남겼다. '산 속에 사는 한 선비(丘中有一士)/ 도를 지키며 오랜 세월 보냈네(守道歲月深)/ 걸을 때는 새끼로 맨 옷을 입고(行披帶索衣)/ 앉아서는 줄 없는 거문고 타네(坐拍無絃琴)/ 흐린 샘물은 마시지 않고(不飮濁泉水)/ 굽은 나무 그늘에는 쉬지를 않네(不息曲木陰)/ 티끌만큼이라도 의에 맞지 않으며(所逢苟非義)/ 천 냥의 황금도 흙보다 못하게 여기네(糞土千黃金)/ 마을 사람들 그 기풍 따르니(鄕人化其風)/ 난초 숲에 있는 듯 향기가 나네(薰如蘭在林)/ 지혜롭든 어리석든 강하든 약하든(智愚與强弱)/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일 없었네(不忍相欺侵)/ 그 선비 찾아가 보고 싶어(我欲訪其人)/ 만나러 가려 하다 다시 생각하네(將行復沈吟)/ 그 얼굴 꼭 봐야만 하겠는가(何必見其面)/ 그 마음 제대로 배우면 될 일이지(但在學其心)'이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연명 이후 많은 중국 선비들이 그의 무현금의 정신세계를 인용하는 가운데, 도연명의 삶을 사랑하며 이상적인 선비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선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그래픽=장수현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1) "손등으로 그린 그림, 내게 다시 자유 주네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이 중 무엇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모두 우리의 일부다. 이 감정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항상 함께한다.하지만 야속하게도 기쁨보단 슬픔이, 즐거움보단 노여움의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진다. 때론 그 슬픔과 고통,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되는 일을 겪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결코 간결하고 명쾌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겪어본 감정, 슬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또한 슬픔이다. 왜일까. 자신의 슬픔에는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는 그토록 무심하기 때문이다.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잘 우는 우리가, 소설 속 비극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떠올리면서 복수를 기획하기도 하는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는 무감각하다. 자신 말고 다른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사실이지만 인간이 그렇다.그래서 우리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슬픔에 대한 공부다.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그러면서 말한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고.최근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한 작가를 만났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채 5년째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만나기 전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괜한 질문으로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아닐지, 내 시선이 과하게 동정 어린 시선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중에도 상처를 다시 쑤시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그림에 신발과 발이 자주 등장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봤다가 금방 후회했다. 조금만 생각했다면 답을 알 수 있었을 텐데.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슬픔을 공부한다. 이 공부는 어렵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한평생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우리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도 하니까.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이야기를 전한다. 봄이 왔는데 병원에 있는 그의 세상이 너무 외롭고 차갑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나의 죄를 벌하며 그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길 바라본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자화상. 침대에 앉아 손등에 펜을 고정시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환상 작가의 갤럭시탭 그림 폴더. 300개가 넘는 그림이 들어 있다. 천윤자 시민기자
[사람의 서재] 프랑수아즈 사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극한의 자유 즐겼던 문학계 거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김영하의 소설 제목으로도 인용된 이 문장은 프랑스 여성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한 말이다. 오늘날까지 회자될 만큼 파격적인 발언인데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사강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다운 말이다.사강은 1935년 남프랑스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에 진학했지만 첫 시험에서 낙제했다.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위스키와 재즈를 즐기다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요트 사고를 당해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6주 만에 소설 '슬픔이여 안녕'〈사진〉을 쓰고 출간하는데, 18세의 나이였다. 남녀 간의 심리 전개를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단단한 문체로 묘사해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해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문단 데뷔와 함께 '사강 신드롬'을 쏘아 올린 것.1957년에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 "사강, 교통사고로 즉사하다"라는 뉴스가 전 세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소생해 3개월간의 병상 생활에서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23세 때 20세 연상의 남성과 결혼하지만 2년 만에 헤어졌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7세에 한때 패션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젊은 미국인과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시 이혼했다.이후 사강은 신경 쇠약, 정신병원 입원, 폭음과 마약, 도박에 탐닉했다. 도박으로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된 그녀는 '도박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적인 정열'이라고 하며 '돈이란 본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다.1995년에는 두 번씩이나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한 말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다.2002년엔 탈세범으로 기소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옹플레르에서 노년을 보내던 사강은 심장과 폐 질환으로 수년간 투병하다 2004년 숨을 거뒀다.대표 작품으로는 '슬픔이여 안녕'을 비롯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패배의 신호', 희곡은 '스웨덴의 성(城)'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2024.04.05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시집 '마카다' 펴낸 김계희씨(2)음식하다 깃든 사색, 詩로 풀어…"마카다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어서예"
"중학교 졸업 이후 글을 따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신 젊을 때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했어요.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편지를 참 많이 썼습니다."40년간 공사현장 식당(일본어 '함바')에서 일한 할머니가 첫 시집을 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계희씨는 칠순을 맞아 지난달 23일 시집 '마카다'를 출판했는데, 1970년대 중학교 졸업 이후 시(詩)는 물론 글공부도 특별히 한 적이 없다. 그런 김씨가 시를 쓰게 된 건 글쓰기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젊을 적부터 가족과 지인들에게 편지를 즐겨 썼는데, 이런 습관이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도 이어졌다고 한다.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나서부터는 휴대전화에 여러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했다. 어릴 적 추억부터 최근 있었던 일, 사물과 자연을 보며 든 생각까지. 소재가 다양하다며 운을 떼니 그는 남들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라며 살갑게 웃었다. "원래 사색을 즐겨 해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는 건가…이런 생각을 특히 많이 해요. 함바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음식 하나를 봐도 인생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글로 옮겼죠."김씨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건 주변인들의 칭찬으로 시작됐다. 휴대전화에 기록해둔 글들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낼 때마다 '재밌다' '울컥했다' '구수하다' 등의 답장이 이어지면서 시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기존에 쓴 짧은 구절들을 다듬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장문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때부터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후 언어유희 등 시적 요소를 추가해 글을 쓰면서 내 글들을 시집으로 내보자 생각했죠."김씨의 시집 '마카다'는 그의 한평생 추억이 담긴 이야기다. 총 99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집은 가족, 음식, 고향, 인생, 자화상으로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는데, 어릴 적 가족과의 추억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대다수다. 그런 만큼 1950~1970년대 살아온 사람들이 공감할 요소가 많다. 김씨는 안동 길안면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가족에 대한 시들은 궁핍한 시절 시골에서의 정겨운 생활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등엔 언제나/ 찌든 땀 냄새/ 풀 냄새/ 볏짚 냄새'(지게) '허겁지겁 산길 내려와/ 풀숲에 주저앉아 펼쳤더니/ 고추 된장에 버무린 주먹밥 서너 덩이/ 군침이 마중물이 되어/ 게 눈 감추듯 먹었다'(나무꾼과 도시락).김씨의 에너지 넘치는 성격이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 신선하고 구수한 표현도 많다. 김씨는 매년 봄이면 고향으로 봄나물인 두릅을 따러 가는데, 몇 년 전 무리하게 채취를 시도하다 손목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일화를 추억하며 나물을 면밀히 관찰한 작품이 '두릅'이다. '독한 놈/ 몸뚱이에 가시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며/ 봄볕 따사로운 날/ 전투에 나섰다'. 대표 시이자 표제인 '마카다'는 '모두'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김씨가 대표 시를 '마카다'로 정한 이유는 타인에 대한 애정에서부터다.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상이지만 혼자 잘 사는 것보다 가족,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모두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 실제 김씨는 모임에 나가면 '분위기 메이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별명이다.김씨가 '함께'의 가치를 배우게 된 건 그의 언니로부터다. 김씨의 언니는 칠남매의 맏이로서 어릴 적부터 그의 동생들을 반듯하게 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빈자리까지 채울 만큼 넉넉함을 실천했다고 한다. '마카다'도 그런 언니에 대한 김씨의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한 시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형제들 간 우애가 남달랐는데 언니의 역할이 컸어요. 동생들과 돈독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 동생들을 잘 챙겨줬죠. 그랬던 언니가 지금 아픈 상황이에요. 옛날 일은 기억하지만 당장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요. 언니에게 이렇게 고마움이 큰데…." 그는 인터뷰 중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김씨의 향후 계획은 경상도 방언이 담긴 시집을 내는 것이다. 그는 "마카다로 시집을 내고 나서 경상도 방언으로 시집을 구성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언 중에는 재미있고 특이한 말들이 참 많은데, 지역 사람들에겐 친근하고 타지인들에겐 흥미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신춘문예에 도전할 거란 목표도 살며시 내비쳤다. 신춘문예는 일간 신문사가 문학 작품을 공개 모집해 신인 작가를 등단시키는 제도다. 김씨는 시집을 낸 후 시에 대한 흥미가 커져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욕심이 생겨 신춘문예에도 도전해보려 해요. 아직 시를 전문적으로 쓰진 못 하지만, 문학을 더 공부하고 사색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며 수줍게 웃었다. 글=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사진=B-story 제공김계희씨의 휴대전화 메모장. 메모장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모여 시집 '마카다'가 나왔다.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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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155명' 조정에 대구경북 타 대학 결정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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