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올해로 100세 맞은 손기창 대구 경창산업 창업주 "깡통으로 카바이드燈 만들어 암흑천지 대구 피란촌 밝혔다"

  • 임성수
  • |
  • 입력 2022-01-03   |  발행일 2022-01-03 제2면   |  수정 2022-01-03 09:18

2021122201000686800027511
경창산업<주> 창업주 손기창 명예회장이 영남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윤관식기자 yks@yeongnam.com

지난달 9일 대구 성서산업단지 경창산업 본사에서 처음 만난 손기창 명예회장의 모습은 한마디로 '멋진 남자'였다. 중절모에 고급 안경테가 잘 어울린 그의 모습은 99세라고 믿기지 않았다. 명함을 주고받는 간단한 인사 후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지난 90여 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담배는 한 번에 반 개피씩, 하루에 반 갑 정도 피운다고 했다.

손 명예회장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구미CC(컨트리클럽)로 향한다. 여름철에는 오전 8시 전후, 겨울철에는 10시30분 전후 라운딩을 시작하는 손 명예회장의 골프 멤버 또한 늘 한결같다. 올해 90세가 된 박병웅 구미CC 회장을 비롯해 모두 80∼90대다. 지난달 11일에도 구미CC에서 오전 10시35분 라운딩을 시작한 손 명예회장은 첫 홀에서 비록 트리플보기를 했지만, 쇼트 게임은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세컨드 샷 이후는 카트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18홀을 모두 소화했다. 라운딩 전 스타트하우스에서 만난 손 명예회장 손에 들린 아이스아메리카노는 기자의 눈을 의심케 했다. 다른 라운딩 맴버 3명은 모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임인년 (壬寅年) 새해를 맞아 그가 살아온 지난 100년에 대해 들어봤다.

2021122201000686800027512
2021122201000686800027513
손기창 명예회장이 직원과 대화를 나눈 뒤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윤관식기자 yks@yeongnam.com

▶1923년 8월24일(음력) 태어나 100세가 되는데, 건강은 어떠신지.

"아직 토요일마다 18홀 골프 라운딩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는 건강한 게 아닌가 싶다."

▶특별한 생활습관이 있다면.

"규칙적인 생활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20분간 요 위에서 요가를 하고 생수 한 잔을 마신 뒤 아침밥을 먹는다. 점심과 저녁 식사도 가능하면 정시에 정량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밤 10시에는 어김없이 잠자리에 든다. 이런 생활 패턴이 30대부터였으니까 근 70년 가까이 됐다. "

▶출근은 얼마에 한 번씩 하는지. 아들인 손일호 회장께서 명예회장님이 매일 출근하셔서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다고 하든데요.

"매일 오전 8시 전에 성서 본사로 출근해 집무실에서 특별한 사안이 있을 경우 보고를 받고, 일정에 대해 체크한다. 그날 약속이 있으면 만날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등에 대해 스스로 점검한다. 오전 10시가 되면 본사 내 공장을 둘러보고 매주 수요일에는 차량으로 40분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달성에 있는 공장들을 찾아 생산라인에서 직원들과도 이야기도 나눈다. 공장이 넓다 보니 올해부터는 조금 힘들어 휠체어를 이용할 때도 있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고, 술도 하는지.

"담배는 기억으로 일본에 있을 때니까 17세 때부터 피운 것 같다. 반주로 막걸리를 마신다. 아침식사 때 빼고는 점심과 저녁 식사 때는 꼭 막걸리를 한두 잔씩 한다. 벌써 50년이 넘었다."

▶골프는 언제부터 시작했고, 스코어와 홀인원은 몇 번이나 했나.

"서른다섯부터 골프를 쳤다. 주변 기업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시작한 것이 어느새 65년이 됐다. 지금도 매주 토요일이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인들과 구미CC에서 라운딩을 한다. 멤버는 올해 아흔이 되는 박병웅 구미CC 회장, 82세의 박형웅 세무사, 81세의 박재광 건축사다. 멤버 중 사정이 있어 라운딩을 함께 하지 못하면 지인들이 대신 오기도 한다. 예전엔 싱글도 치고 했는데, 지금은 95타에서 100타 정도 친다. 홀인원은 지금까지 4번 했다. 100세가 되는 내년엔 꼭 한번 더 하고 싶다."

▶구한말 유학자이자 명필가인 송담 손시헌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은 어땠나.

"일제 감정기였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위로 딸 다섯을 낳은 후 장남으로 귀하게 태어났지만 7세 때 어머니, 13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소년가장으로 어렵게 살았다. 하는 수 없이 여동생은 남의 집 부엌데기로, 남동생은 시집 간 큰누님 집에 맡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

▶일본 생활과 귀국은 언제.

"마침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거기서 공장에 다니며 야간 공업전문학교에서 기술도 배워 프레스 금형기술 1급 자격증 취득한 뒤 광복되기 직전인 1945년 5월 귀국했다. 일본에 있으면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2월 한국으로 잠시 건너 와 큰누님이 소개한 아내와 결혼도 했다. 2018년 아내와 나는 결혼 75주년 기념 금강혼식(金剛婚式)도 올렸다. 스물한 살, 열아홉 살 신랑과 신부로 만나던 날 사모관대를 하고 연지곤지를 찍은 그 모습 그대로 전통혼례를 올렸다. 그때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큰아들 일호가 '다시 태어나도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 말이다."

끊임없이 신제품 아이디어 구상
日서 배운 금형기술 재활용품 활용
미군 폐드럼통 이용 담뱃대 제작
아연 철판으로 세숫대야·백철대야
꽃밭 물조리개 만들어 팔아 인기

스물넷에 내 이름 딴 상호 '경창'
자전거 스포크로 만든 재봉틀 바늘
품귀 대체품으로 불티나게 팔려
자전거 체인케이스 사업 '대성공'
60년간 노사갈등 없는 회사 성장

▶고향이 경남 밀양인데, 대구에 정착하게 된 이유라도.

"조실부모 후 고향에 가까운 친척도 없고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어 귀국 후 처가가 있는 청도 동곡에서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피땀 흘려 일본에서 모아 가지고 나온 거금 2천엔(당시 쌀 한 가마니 시세 25엔)이 일본 패망으로 종이쪽이 돼 시골에서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무작정 대구로 나와 셋방살이로 안 해 본 일이 없다. 처음에 집주인이 담뱃대를 만들어 파는 걸 보고 프레스 금형 기술로 대량 생산이 가능할 것 같아 미군 폐드럼통을 구해 하루에 10개도 못 만들던 담뱃대를 200개나 제작해 팔아 지금 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떼돈을 벌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종이로 만든 궐련형 담배가 나오면서 다른 사업을 찾아야 했다."

▶이후에도 많은 사업을 한 것으로 아는데.

"할 일이 사라지면서 월세 낼 돈도 없어 대구 중앙통(남일동)에 '소개(疏開)터'라는 곳에 판잣집을 지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가져 본 집이라 좋았다. 방 두 칸에 2평 정도의 점포도 냈다. 이렇게 살 집과 가게 모양이 갖춰지자 나는 즉시 내다팔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품목은 일본에서부터 손에 익숙한 철판으로 정하고, 아연 철판으로 세숫대야와 백철 대야뿐 아니라 꽃밭에 물을 줄 때 쓰는 물조리개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일종의 '철판상(鐵板商)'이었다."

▶'경창'이란 상호는 어떻게 탄생했나.

"가게에 손님들이 심심찮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가게의 이름을 구상하게 됐다. 우선 내 이름 가운데 한 글자 창(昌)을 택했다. 창의 훈(訓)은 '창성한다' '번성한다'는 것으로, 가게 이름으로는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에 경사로울 '경(慶)'을 합해 읽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경창(慶昌)'이었다. '경창상사'라는 상호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다. 이후 1961년 경창공업사를 창업해 이후 60년 넘게 역사를 이어가는 이름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광복 후 일본인 철수로 재봉틀 바늘이 품귀현상을 빚어 자전거 스포크로 그것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재봉틀 바늘 대체품으로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새로운 방식으로 담뱃대를 생산한 후 재봉틀 바늘은 나의 두 번째 독창적인 생산품이었다."

▶재활용품을 신제품으르 만드는 센스가 남다른 것 같다.

"폐드럼통 담뱃대에 이어 자전거 스포크 재봉틀 바늘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착안해 낸 제품이 상품화되면 승산도 있겠다는 확신이 가질 수 있었다. 이후 전기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만든 카바이드등(燈)도 같은 생각으로 직접 만들게 됐다. 촛불보다 더 밝은 불은 없을까 골똘히 생각한 끝에 일본에서 본 광산이나 어선에서 불을 밝히던 카바이드등 칸델라가 생각이 나 시제품 제작에 바로 들어갔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주물통 대신 깡통으로 대처하는 등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저렴한 카바이드등을 만들어 냈다. 촛불이나 호롱불에 비할 수 없이 밝아, 만들어 노전에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내 아이디어와 직접 만든 제품이 암흑천지의 대구 피란촌을 대명천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대구를 환하게 밝힌 등은 내 희망도 함께 밝혔다. 하지만 곧 유사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연구 개발한 카바이드등은 특허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업도 채 6개월도 못 돼 접어야 했지만 나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던 시기는.

"남일동 판자촌이 철거되고 방천 둑에 판잣집을 구해서 살면서 낮에는 라이터와 만년필 수리를 하고 저녁엔 대구역∼반월당 야시장에서 장식용 소쿠리를 팔며 생활을 이어가다 판잣집이 또 철거되면서 달성로터리 과자 점포를 싸게 얻었다. 과자와 술은 물론 양담배도 숨겨놓고 팔았다. 마침 근처에 시외버스 정류장이 생기면서 장사가 꽤 잘 됐다. 그러던 중 신문에 정부에서 자전거 국산화를 위해 전국에 사업자를 모집하는 사실을 알았다. 모집 막바지에 알게 돼 사업을 시행하는 자전거협동조합을 찾았을 땐 다른 부품은 이미 사업자가 모두 결정되고 '체인 케이스' 한 분야만 남아 있어 하는 수 없이 그거라도 신청하게 된 것이 지금의 경창산업이 됐다."

▶첫 사업이라 노력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첫 사업이라 생각하고 일본과 대만 제품을 직접 사서 연구하고 동인동에 창고도 사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금형 재료로 부서진 미군 탱크 철판과 열차 스프링 등도 활용했다. 그때 금형 기술자라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직접 금형을 세 번 찍어서 체인 케이스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체인 케이스를 단 자전거가 고급 제품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동이 날 정도로 잘 팔렸다. 가족을 포함해 종업원 7명으로 시작한 '경창공업사'다. 그때 구입한 수작업 프레스가 경창 1호 기계다. 지금의 경창을 있게 해 준 기계여서 현재 본사 1층에 전시돼 있다."

▶후배 기업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회사를 동인동에서 침산동을 거쳐 검단동으로 옮기면서 회사 친목모임인 '경우회'를 내가 만들었다. 경영진·종업원 구분 없이 모두가 참여했다. 봄·가을 동촌과 수성못에서의 야유회를 비롯해 경조사도 꼼꼼히 챙겼다. 3공단으로 회사를 이전하면서 노조가 설립돼 '경우회'가 '경창산업 노조'로 이름만 바뀌었다. 전 사원이 노조에 가입토록 했고, 경우회 정신으로 노조가 운영됐다. 60년 동안 노사 간 갈등이 없고 쟁의 한 번 없었던 것은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 더 있다면 늘 아이디어 제품을 생각하는 정신이 기업인의 생명줄인 것 같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제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