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유계영 시인 수상 소감..."다 지우고 눈부신 무지 속에서 다시 시작하렵니다"

  • 유계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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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3 08:22  |  수정 2022-01-03 13:36  |  발행일 2022-01-03 제25면

유계영-수상자
☞유계영 시인은 1985년생.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이 있다.

어제 오전엔 시각장애인 안마사에게 동해 바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보는 바다'가 아니라 '듣는 바다'에 대한 상상으로 온종일 바빴습니다. 오후엔 학교에 나가 시 쓰는 아이들과 딸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줄딸기 덩굴에 오직 줄딸기 모양으로 줄딸기가 맺히는 것'에 경탄하는 아이의 감수성이 즐거워 박수쳤습니다. 오늘은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친구의 눈동자에 차오르다 잦아들고 다시 차오르다 잦아드는 물기를 보면서, 다만 내 앞의 눈동자를 마주 보려 했습니다. 손을 잡고 끌어안고 등을 쓸면서, 친구의 손과 어깨와 등 위에 내 손의 무게를 포개어보려 했습니다.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로 북적입니다.

아름다움은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한발 굼뜨고 노둔합니다. 아름답고 충격적이며 첨예한 것은 바깥에 있습니다. 내가 아닌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밖을 나가는 일은 두렵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루라도 밖을 나서지 않으면 영영 바깥은 꿈도 못 꿀 것 같습니다. 삶의 순간들을 시로 대하지 않고, 문장으로 세공하지 않고, 나의 판단으로 의미 짓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어느샌가 내 안으로 고개를 처박고 그걸 세상이라 믿게 됩니다. 시를 쓰는 동안에는 의심하고 점검합니다.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나와 내가 아닌 것들로 뒤범벅된 세상을 향해 있는지를. 움직이는 시의 곁에서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지를.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을 내어놓고서 겪어본 적 없는 무력감 속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채로요. 시에 대해 내가 알고 경험한 것들을 모두 지우고 눈부신 무지 속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수상 소식은 기꺼이 무지 속으로, 다만 백지 앞으로 가라는 응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족한 시집을 열고 함께 흔들려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발부리에 차인 조약돌 하나와의 만남에도 나날의 깊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구상 시인이 일깨운 삶의 신비일 것입니다. 사소한 마주침 속에 영원을 비추는 만남의 신비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생생한 영원 속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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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영 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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