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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추자도 해안에 세워진 천주교 성지의 황경한 십자가.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는 탄압과 순교의 역사 뒤에 가려진 절체절명의 시간을 주요 인물과 조직, 사건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살려낸 책이다. <김영사 제공> |
탄압과 순교의 역사 뒤에 가려진 절체절명의 시간을 주요 인물과 조직, 사건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서학 연구를 넘어 18세기 조선의 정치·사회·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치밀한 연구와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천주교계와 학계에서 답습해 온 오류를 바로잡는다. 새롭게 발굴한 문헌과 방대한 사료, 상세한 각주를 통해 서학을 둘러싼 논란과 쟁점을 검증하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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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지음/김영사/904쪽/4만4천원 |
집요하고 끈질긴 연구 끝에 저자는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周文謨失捕事件) 당시 신부를 탈출시킨 이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주문모는 조선으로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로, 한양에 숨어지내며 천주교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부활절에는 미사까지 집전한다. 조선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리에 행보를 이어갔지만 천주교도 한영익의 밀고로 거처가 들통나게 된다. 정조는 급히 체포령을 내리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최인길, 지황, 윤유일은 주문모의 행방을 묻는 고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셋은 이튿날 사망하게 된다. 저자는 당시 주문모 신부를 도와 탈출시킨 주역이 정약용이라고 다양한 문헌을 통해 밝혀낸다.
또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유일한 문집 '만천유고'가 가짜 책이라는 사실도 밝힌다. '만천유고'는 초기 천주교회의 주요 자료로 70여 년간 성전으로 인식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만천유고'에는 이승훈의 글이 한 편도 없다. 한 예로 '만천유고'의 2부에 해당하는 '만천시고'에는 이승훈이 세상을 뜬 지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한시와 거의 동일한 한시가 실려있다. 인물의 이름만 바꾼 한시를 베껴서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만천유고'가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20세기 초반에 짜집기된 가짜 책이라는 주장이다.
이밖에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약국들이 당시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기점이었다는 사실, 명례방 사건으로 귀양 가 유배지에서 죽은 김범우의 유배지 논란, 16세에 장원 급제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차세대 리더 황사영 등 새로 밝혀낸 이야기와 초기 신앙공동체의 절박한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서언에서 "서학은 조선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지만 너무 과소평가된 느낌"이라며 "의도적으로 은폐되고 지워져서 별일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진앙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는 다급했던 현장의 비명과 탄식이 묻어 있다. 행간을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그 기록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진실의 지점을 열어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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