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2] 북송 서예가 미불…날카로운 칼로 적진 베어버리고 강한 쇠뇌로 천리 쏘아 꿰뚫는 형세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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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09   |  발행일 2022-09-09 제34면   |  수정 2022-09-09 08:14

미불-산호첩
미불 작 '산호첩'

미불(1051~1107)은 중국 북송의 화가이자 서예가. 자가 원장(元章)이어서 미원장으로도 불린다.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등. 화가로서는 발묵산수(撥墨山水)를 배워 점묘에 의한 미법산수(米法山水)를 시작, 남화(南畵)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글씨는 침착하면서 통쾌하여 '준마를 탄 듯한 입신의 경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화 감식가 중의 한 사람으로도 칭송받고 있다. 행동거지가 가끔 미친 듯하여 '미전(米癲)'으로도 불린 그에 대해 '송사(宋史)' 중 '미불전'은 '특히 서예에 절묘했으며, 침착하면서도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왕헌지의 필의를 얻었다'라고 적었다.

서예 공부에 특히 매진했던 그는 스스로 "평생 내가 종이에 쓴 것을 합치면 10장은 넘는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아들도 그에 대해 "소장하고 있던 진당(晉唐)의 진적(眞跡)을 책상에서 펼쳐보지 않은 날이 없으며, 손에서 두루마리를 놓지 않고 이를 임서하며 공부했다"라고 전했다.

미불은 '군옥당첩(君玉堂帖)'에서 자신의 글씨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안진경의 글씨를 배웠는데, 이때가 칠팔 세 때였다. 글자가 너무 커서 한 폭에 다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 유공권의 긴밀하게 짜인 결구를 보고 그가 쓴 금강경을 배웠다. 오래 있다가 이것이 바로 구양순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구양순을 배웠다. 오래 지나니 글씨가 마치 목판에 도장을 찍고 주판알을 배열하듯 일률적으로 되었다. 그리고 저수량을 좋아하여 가장 오랫동안 배웠다.'

황정견은 "미불의 글씨는 마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적진을 베어버리고, 강한 쇠뇌로 천 리를 쏘아 목표물을 꿰뚫는 형세이다. 다른 서예가들의 필세가 여기서 다한다"라고 평했다.

미불은 옛사람들의 묵적을 임서하는 데도 남달리 뛰어나, 사람들이 때때로 진품과 그의 임서작품을 분간하지 못하곤 했다. 그는 또한 서화 평론을 좋아해 '서사(書史)' '화사(畵史)'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등의 책을 지었다. 전하는 서예 작품으로, 38세 때 스스로 시를 짓고 행서 35행으로 쓴 '초계시첩(苕溪詩帖)'을 비롯해 '축소첩(蜀素帖)' '다경루시첩(多景樓詩帖)' '배중악명시첩(拜中嶽命詩帖)' '산호첩(珊瑚帖)' 등이 있다.

배중악명시첩도 미불이 시를 짓고 행서로 쓴 작품이다. 44세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첩 뒤에 원나라 서화가 예찬이 쓴 발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동파는 미불이 문장이 맑고 뛰어나면서 빼어나며, 글씨는 초탈하고 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당시 이미 아는 이가 이와 같이 평가를 했는데, 하물며 후세에 그의 시를 외우고 글씨를 보는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미불이 앞서간 대가들을 넘어서 자신만의 서풍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대가, 여러 가지 서풍, 여러 시대의 서예작품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미불은 왕희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왕희지보다 그 아들인 왕헌지를 더 좋아했다. 때로는 이왕(二王)보다 저수량을 더 우대하기도 했던 그는 저수량을 가장 오랫동안 공부했고, 실제 그가 변함없는 칭찬을 보낸 이는 저수량뿐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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