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공익을 생명처럼…"富·권력·명예만 좇으며 사는 삶이 어찌 행복하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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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09   |  발행일 2022-09-09 제34면   |  수정 2022-09-09 08:11
바르고 맑은 마음 유지 '유항심'…행복한 삶의 조건
공직자는 사익 멀리하고 공익을 우선해야 삶이 편안
천하를 자신 소유로 여기면 사리사욕 채우기 급급
크든 작든 남에게 도움 되는 태도…화목하고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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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을 생명처럼 여겼던 권벌이 1526년에 지은 청암정(경북 봉화).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정된 마음,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의식주를 비롯,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여건도 충족되지 않는 이들에게 공익이나 자비, 공명정대 등을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맹자의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나라의 임금(宣王)이 정치에 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부정하고 허황하여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른 마음,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유항심(有恒心)은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유항산자이든, 가난한 무항산자이든 마찬가지다. 맹자도 무항산이면서 유항심으로 사는 것은 뜻있는 선비나 가능하다고 한 것처럼,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유항심일 수 있는 유항산자인데도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하면, 행복할 수 있는데도 행복을 멀리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항심하려고 애쓰지 않는 유항산자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나 환경보다 주관적 의식이 더 좌우한다. 그리고 즐거움이나 기쁨의 강도보다 그 빈도가 더 중요하다. 양심을 거스르는 언행을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 있는 삶이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것이다. 크든 작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보람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사익을 멀리하고 공익을 우선하며 일을 해야 더욱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公)'을 생명처럼 여기며 공직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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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이 항상 휴대하고 다녔던 책 '근사록'.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정자인 청암정의 주인공인, 조선 중기 문신 충재 권벌(1478~1548)도 그런 선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후덕한 면모 속에 '죽음으로도 뺏을 수 없는 절의'를 지녔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흐트러짐 없는 절의 정신과 '공(公)'에 입각한 신념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벼슬길로 나선 이후 오랜 관료 생활 동안 줄곧 '공(公)'을 우선시하며 행동했던 권벌은 1512년 8월 어느 날 경연(經筵: 임금에게 경서나 역사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무릇 시종(侍從)하는 신하는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니, 말하는 것이 만약 '사(私)'라고 하면 그르거니와 그것이 '공(公)'이라면 어찌 꺼리며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마땅히 악한 것은 멀리하고 착한 것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착한 말은 써주고 악한 말은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공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떤 사안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금 역시 임금 자리를 공으로 여기는 군주관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518년 6월에는 "요순은 천하를 만백성의 소유로 보고 자기 자신을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이 그 자리를 천하의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 마음은 넓게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그는 공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안이라도 군주에게 말해야 하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꾸밈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을 공이라고 믿었다. 이런 충재에 대해 사신(史臣)은 '충성스러운 걱정이 말에 나타나고 의기가 얼굴색에 드러나 비록 간신들이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개의하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개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일컬을 만했다'라고 기록하고, '머리를 베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 해도 말을 바꾸지 않을, 실로 무쇠 같은 사람(眞鐵漢)이었다'라고 평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천 길 절벽에 선 듯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라며 스스로 경계했던 난은 이동표(1644~1700) 또한 청렴 강직한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사간원 사간이 되어 시정을 논한 '논시정소(論時政疏)'에서 이렇게 간언했다.

"사대부의 출처거취가 올바르지 못해 승진을 다투어 관기(官紀)가 극도로 혼탁함에도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이 바로잡지 못함은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없고, 전하가 간신(諫臣)을 대하는 도리 또한 다하지 못해, 10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도 1대신(大臣)이 말 한마디로 제지하며 잘난 듯이 남의 뜻을 꺾기만 하고 받아들이는 아량이라고는 없으니, 오늘날 언로가 막힌 것이 어찌 제신(諸臣)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정의(情意)가 통하지 못해 독촉과 견책이 따르게 되니, 신하는 임금의 뜻에 어긋날까 두려워 아유구용(阿諛苟容: 아첨하는 일)을 일삼아서 이른바 '황공대죄(惶恐待罪) 승정원(承政院)이요 상교지당(上敎至當) 비변사(備邊司)'라는 옛말이 불행히도 오늘의 현상입니다."

승정원은 대통령실에 해당하고, 비변사는 국가안보위원회와 유사한 기관이었다.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앙받던 남명 조식(1501~1572)이 단성현감에 임명되자(1555년) 현감직을 사양하며 상소문을 올린다. 조선을 놀라게 한 극언(極言)으로 유명한 이 상소문은 '단성소(丹城疏)' 혹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불린다. 그중 일부다.

'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 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게 된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모든 선이 갖추어져 있고 모든 덕화(德化)도 이것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를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공직에, 특히 고위공직에 있으면서 본분인 공익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리사욕 채우는 데 더 마음을 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도 평생 부와 권력, 명예를 좇으며 항심으로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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