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9] 中 저장성 부춘강…청산 속 숨어 있는 에메랄드 보석…황제 광무제 절친, 낚시하며 은거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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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30 08:32  |  수정 2023-01-20 08:11  |  발행일 2022-09-30 제35면
황공망 부춘강 산수화 '中 10대 명화'
山川 절경에 취해 신선이 된 듯한 기분
한자문화권 선비의 은둔 표상 엄자릉
강가 언덕 낚시하던 바위 '엄자릉조대'
조대 찾은 시인 묵객 석상·詩碑로 즐비
복수의 화신 오자서와 江 일화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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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자릉조대에서 바라본 부춘강 풍경.

부춘강(富春江)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경내를 흐르는 강이다. 길이는 100㎞ 정도. 이 강은 안후이성(安徽省)의 황산에서 발원하는데, 저장성 중북부를 지나고 항저우(杭州)를 거쳐 동중국해로 흘러든다. 이 강의 상류는 신안강(新安江)이고, 중류가 부춘강이며, 항저우를 흐르는 하류가 전단강(錢壇江)다. 지역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이다.

부춘강과 그 주변은 특히 자연풍광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산수화로도 많이 그려졌다. 특히 원나라 황공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중국 10대 명화로 꼽히는 걸작으로, 중국 최고의 산수화로 꼽힌다. 1347년부터 3년 동안 여섯 장의 화선지를 이어 붙여가며 부춘강의 풍경을 담은 후인 1350년 봄, 여든두 살의 황공망은 부춘산거도의 마지막 부분에 8행의 발문을 쓰고 낙관을 찍었다. 긴 두루마리 형식의 이 그림(33㎝×637㎝)에는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 울창한 소나무와 빼어난 기암괴석, 구름과 안개에 덮인 농가 등이 어우러져 멋진 정취를 자아낸다.

2007년 7월 항저우 서호를 둘러본 후 부춘강을 찾았다. 하류에서 배를 타고 엄자릉조대를 향해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었다. 부춘강은 청산 속에 숨어있는 에메랄드 보석이라는 찬사도 듣는다. 강 양쪽의 첩첩한 푸른 산봉우리와 능선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그 사이를 고요히 흐르는 맑고 풍부한 물이 별천지를 연출했다. 그리고 강물 위 곳곳에 부평초가 수를 놓고 있어 각별한 풍광을 선사했다. 그 넓고 긴 강을 가고 오는 동안 함께한 일행 말고는 다른 여행객이 아무도 없었다.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춘강이 멋진 풍광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영원히 회자하도록 한 인물이 있다. 후한 때의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중국은 물론 한자문화권의 선비들에게 은둔의 표상이 된 주인공인데, 그 엄자릉이 은거하며 낚시를 하던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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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강 엄자릉조대 유적지 입구에 있는 패방의 뒷면. 엄자릉의 덕을 표현한 글귀 '산고수장(山高水長)'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중국 서화가이자 문화계 유명인사였던 조박초(1907~2000)의 '엄자릉조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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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자릉이 낚시하던 바위 위에 세운 '한엄자릉조대' 비석.

◆엄자릉이 낚시하던 조대

엄자릉(기원전 37~서기 43)으로 더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 이름은 엄광(嚴光)이다. 자릉은 그의 자. 저장성 닝보(寧波) 출신이다. 친구가 황제(후한 광무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원래 성과 이름은 장준(莊遵). 그러나 광무제가 황제가 된 후 황제 아들 이름이 유장(劉莊)이라서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제도(避諱) 때문에 '장'자를 쓸 수 없게 되자, 성과 이름을 엄광으로 바꾸고 부춘산에 은거했다.

광무제는 중국 역사상 정치를 잘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한을 찬탈한 왕망을 제압하고 한나라를 새로 부흥한 그는 전란으로 피폐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탐관오리를 단죄하는 등 덕치를 펼쳤다.

엄자릉은 광무제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 사이다. 유수가 황제에 오르기 전 군대를 일으키자 엄자릉은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그가 황제가 된 후부터는 은거에 들어갔다. 광무제는 엄자릉이 보고 싶어 초상화를 그리게 해 방방곡곡을 수소문하며 찾았다.

마침내 제나라 사람이 "어떤 남자가 양가죽 옷을 걸친 채 연못에서 낚시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해왔다는 보고를 듣자, 광무제는 그가 바로 엄자릉이라 생각했다. 광무제는 귀한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궁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엄자릉은 세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할 수 없이 응했다.

엄자릉이 도성에 도착하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도(司徒·관직 명칭) 후패(侯覇)가 자신의 처소에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엄자릉은 응하지 않았다. 광무제는 그의 언행을 전해 듣고는 웃으며 "이 친구, 예전 그대로구먼"이라고 한 뒤 수레를 타고 엄자릉의 처소로 찾아갔다.

엄자릉은 황제인 광무제가 찾아와도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광무제는 누워 있는 엄자릉 옆에 앉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엄자릉은 "옛날에 요 임금은 그렇게 덕행이 있었지만, 허유(許由)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소부(巢父)는 허유가 귀를 씻은 물조차 더럽다며 말에게도 물을 먹이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는 허유와 소부의 고사를 모르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광무제는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광무제는 엄자릉을 불러들여 옛날 일을 언급하며 며칠 동안 지내며 함께 누워 자기도 했다. 이때 엄광은 자신도 모르게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얹는 실례를 저질렀다. 이를 본 환관이 황망하여 태사(太史)에게 보고했다.

이튿날 태사가 광무제에게 지난밤 일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에 갑자기 혜성이 황제의 별자리를 침범했습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려 하자,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다시 은거하였다. 서기 41년에 광무제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서기 43년 80세에 생을 마쳤다. 광무제는 매우 상심하며, 바로 조서를 내려 돈과 곡식을 하사했다고 한다. 엄광은 부춘산에 묻혔다.

후세 사람들은 부춘산을 '엄릉산(嚴陵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낚시하던 강의 여울을 엄릉뢰(嚴陵瀨), 그가 앉아 낚시하던 바위를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로 칭했다.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인 범중엄(989~1052)이 엄주(嚴州)의 태수였을 때 엄자릉의 사당을 짓고 그 후손을 불러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지은 글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가 전한다. 그 내용의 일부다.

"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보다도 높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바깥까지도 감싸 안을 만하구나. 선생이 아니라면 광무제의 위대함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광무제가 아니라면 어찌 선생의 고결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탐욕스러운 사람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니, 이는 유교의 가르침에 커다란 공로가 있는 것이다. 나 중엄이 이곳의 태수로 와서, 이제야 비로소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노라. 그리고 선생의 후예인 네 집안의 조세를 면제해 주어 선생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짓는다.

'구름 위에 솟은 산 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네/ 선생의 덕은(先生之風)/ 산같이 높고 물처럼 영원하네(山高水長)'"

엄자릉조대는 강가 언덕 위에 있다. 엄자릉조대 유적지에 도착하면 뒷면에 '산고수장(山高水長)' 글귀가 새겨진, 돌로 만든 패방(牌坊)이 맞이한다. 패방 부근에 엄자릉 소상(塑像)을 모신 사당 '엄선생사(嚴先生祠)' 등이 있다. 낚시하던 곳에 오르는 산길에는 이 조대를 찾은 시인묵객들의 석상과 그들의 시를 새긴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소식, 육우, 정섭, 조맹부 등의 상과 많은 비석들을 볼 수 있다.

강가 언덕 위에 오르면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 '엄자릉조대' 비석이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유장하게 흘러가는 부춘강과 주변의 산들이 어우러진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한편 당나라 시인 이백은 엄자릉의 삶을 주제로 이렇게 읊었다.

'소나무 잣나무는 고고하고 곧으니/ 복숭아나 자두 같은 얼굴 하기 어렵네/ 고결하여 환히 빛나는 엄자릉은/ 푸른 물결에 낚싯대 드리웠네/ 몸은 떠돌이별과 은거하고/ 마음은 뜬구름과 한가롭네/ 만 승의 천자에게 길게 읍하고/ 부춘산으로 돌아갔네/ 맑은 바람 천치를 씻어내는 듯하니/ 아득하여 오를 수 없네/ 나를 길게 탄식하게 하니/ 바위틈에 깊이 숨어 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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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강가에 있는 오자서 사당의 오자서 상.

◆오자서 유적

부춘강 가에는 중국 춘추시대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이자 '복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하는 오자서(伍子胥)를 기리는 사당과 정자 서정(胥亭)도 있다.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출신이다. 오자서의 아버지는 초나라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 내분에 말려들어 장남과 함께 결국 초나라 왕(平王)에게 죽임을 당한다.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고 도망을 가게 되는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강을 건너 오나라로 망명한다. 당시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오자서는 어떤 노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기 전 얼마나 노심초사했던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고 한다. 이곳 사당에는 머리가 세기 전의 오자서와 머리가 센 다음의 오자서 상이 함께 봉안돼 있다.

오나라로 도망가 공자 광(光)의 책사가 된 그는 BC 515년 광을 오나라 왕(합려)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재상이 된다. 그 후 초나라 정벌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추진, 오나라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다. 마침내 BC 506년에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 수도를 함락하고 종묘를 불태우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300대나 매질함으로써 사원(私怨)도 풀었다. '사기' 오자서열전에는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이런 행동에 대해 천리(天理)에 어긋난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라고 말했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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