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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스토리텔링연구원기자 |
태풍이 할퀴고 간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비극이 빚어졌다. 지난달 14일 서울의 한 지하철 역사 화장실에서 여성 역무원이 살해된 것. 이른바 '신당역 살인 사건'이다. 사건 초기 피의자의 신상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됐지만 늘 그랬듯 사진과 영상 속 피의자 얼굴은 모두 모자이크 처리됐다. 경찰은 사건 발생 5일 뒤에서야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열고 피의자 신상 공개를 결정했다.
신당역에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한 그날 전남에서는 청소년 성매매 알선 혐의로 체포된 20대가 수갑을 풀고 달아났다. 경찰은 신속한 검거를 위해 그를 긴급 수배하고 사실을 언론에도 알렸다.
언론 보도에는 여전히 도주자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수배 전단 이미지는 역시나 모자이크로 가렸고, 그가 오토바이에 올라탄 뒤 사라지는 CCTV 영상에도 얼굴은 식별할 수 없도록 흐리게 처리됐다. 도주한 피의자를 잡기 위해 긴급 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언론을 통해선 신원을 알릴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 같은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지난해에도 경찰은 전자발찌를 자르고 도주한 성폭행범을 공개 수배했으나 언론에서는 얼굴을 공개하지 못했다.
신당역 사건의 경우, 피의자가 구속된 상태라 신상공개의 유무가 촌각을 다투진 않는다. 하지만 검거 뒤 도주했거나 신원을 특정하고도 잡히지 않은 강력 범죄자라면 사정이 다르다. 인권 보호라는 미명 아래 추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이가 길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돕는 꼴이다. 국민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물론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생겨나기도 한다. 범죄자 인권을 위해 선량한 이들의 인권이 위협받고 재산권이 침해받는 부조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인권은 민족, 국가, 인종 등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정되는 보편적인 권리 또는 지위다.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유효하다. 헌법 제27조 4항에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또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함께 불구속 수사원칙도 작동한다. 이에 더해 피의자 신상 공개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이뤄진다.
물론 피의자 단계에서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또 신상 공개가 범죄율을 낮춘다거나 피해자 보호구제를 보장한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다수의 선량한 국민의 이익이 먼저일까, 소수 강력범죄자의 인권이 먼저일까.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박종진 스토리텔링연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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